다다미 넉 장 반 신화대계 다다미 넉 장 반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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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 출간 이후 16년이 지났다. 다시 돌아온 얼간이 잡탕찌개, 아니, 청춘들은 어떤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을까? 청춘은 열정, 열정은 뜨거움 아닌가? 쪄죽고 타죽는 한여름의 교토에서 오순도순 '네 탓'을 이어가며 변함없이 허접쓰레기와 의미모호를 절찬리 생산 중인 그들에게 비현실의 순간이 들이닥친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여름, 이대로 쾅, 우주라도 멸망하지 않으려나.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번에는 숫제 시간여행이다. 본편의 환상성을 우주차원으로 확장한 허무맹랑 코메디의 실력이 과연 어떠할지.

p.19 아카시 군이 그토록 생산적인 한나절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대체 무엇을 했나. 무더운 다다미 넉 장 반에서 반라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서로 노려보며 비지땀만 생산하고 있었다. 무익하다. 어리석다. 현세의 지옥이다.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인생의 서머타임이 양지바른 곳에 놓은 빙수처럼 녹아간다. 너무 허무해서 뭐라 할 말이 없다.

p.98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은 내일… 시공의 저편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다다미 넉 장 반의 대행렬. 어제가 오늘과 똑같고 오늘도 내일과 똑같다면 이 여름에 과연 끝이 있을까. 나는 영원한 서머타임을 떠돌고 있다.


속편 출간까지의 시간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현실과 허구, 사건과 사건을 치밀하게 뒤섞고 넘나드는 솜씨가 조금도 녹슬지 않았다. 하나같이 한심하다 못해 누추하고 허름한 청춘들. 읽다보면 이렇게 앞뒤가 딱딱 맞을 수가 없다. 허투루 흘려보내는 것 하나 없이 꼼꼼하게 챙겨 담는다. 맥빠지게 하는 일화들마저도 설계도에 빠짐없이 들어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된다.

꼭 우주가 그렇게 되리라고, 처음부터 정해져있던 것처럼... 잠깐, 처음부터? 읽다보면 안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고. 이번에야말로 처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무더운 여름도 결국 지나가듯 젊음의 한 페이지가 끝나는 후련함과 아쉬움을 모두 놓치고 싶지 않은 독자에게 추천한다. 그래서 제 감상은요, 아 짜증나게 멋있어… 감동적인데 열받아… 자존심 상해... 콜로세움같아...

p.133 자신의 어리석은 실책을 얼버무리기 위해 우주 전체를 위기에 빠뜨리는 것은 너무나도 불손한 행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카시 군이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우주가 멸망해서는 의미가 없다. 그녀가 살아가는 이 우주를 지키기 위해 어리석은 결단의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게 바로 청춘이고 그런 게 바로 인생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울고 싶어졌다.

p.149 "밖으로 한 걸음 나가면 세계는 풍부한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어. 너 자신이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너란 인간의 가치는 그 무한한 가능성에 있는 거야. 물론 장밋빛 생활이 기다린다는 보증은 없지. 괴상망측한 종교 동아리에 걸려들지도 모르고, 동아리의 내분에 말려들어 깊은 상처를 입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이렇게 말하고 싶어. 그래도 된다고. 온 힘을 다해 가능성을 살아가는 게 청춘이니까."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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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를 믿다
나스타샤 마르탱 지음, 한국화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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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가 곰에게 공격당했다. 아니다. 캄차카 반도를 홀로 탐방하던 인류학자가 야생 곰과 마주쳤다. 이것도 충분하지 않다. 이방의 존재가 이계의 존재와 조우했다. 그렇다. 이것은 이해 너머에 있는, 그러나 언제나 함께 살아가는 존재와 마주한 인간의 이야기다. 얽힘이다. 휘말림이다. 뒤섞임이며 혼돈과 근원으로의 휩쓸림이다.

저자는 캄차카 반도 화산지대의 소수 거주민을 연구하기 위해 홀로 탐방 중이었다. 그곳에서 곰을 마주쳤고, 그와 곰은 서로에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치료를 위해 돌아온 일상에서, 파편화된 의식 속에서, 밀려오는 고통과 무의식에서 그는 차라리 혼란에 가까운 의문을 마주한다. 무엇이 나인가? 이해와 신비의 세계를 가르는 선은, 그 경계는 무엇인가.

p.27 나는 나 자신의 이야기를 생각한다. 내 에벤 이름 마추카에 대해 생각한다. 내 얼굴에 맞닿은 곰의 키스를, 정면으로 닫히던 곰의 이빨을, 부서진 내 턱을, 부서진 내 머리를, 그의 입안의 어둠을, 축축한 열기로 훅 끼쳐온 숨결을, 엄습하던 이빨이 느슨해지던 순간을, 나를 끝장내지 않은 그 이빨과,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불현듯 생각을 바꿔 끝내 나를 잡아먹지 않은 나의 곰을 생각한다.

p.39 검고 젖은, 빛나면서 날카로운 두 눈을 들어 그가 나를 바라본다. 곰은 너를 죽이고 싶어 하지 않았어, 곰은 너에게 표식을 남기고 싶어 했어, 너는 이제 미에드카야, 서로 다른 세상의 경계에서 사는 자.


기약없이 이어질 치료를 위해 돌아온 일상에서 그는 상처가, 수술이, 치료가 그 자신의 것만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의 몸은 냉전의 유산이고, 서방의 의료기술이며, 실험대상이자 구경거리인 동시에 혼란과 혐의를 담고 있다. 전장이다. 그의 일부는 설원을 떠도는 곰이 되었다. 동시에 그는 감시대상이고, 두려움이며, 인간의 경계를 넘어선 자다.

이어지는 수술, 부정, 어색한 만남, 감염, 또다른 수술, 다시 반복. 그가 돌아온 곳은 더이상 일상이 될 수 없었다. 저자는 직감했을 것이다. 차가운 불빛과 시선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니, 태곳적부터 그 자신이 속한 적이 없었음을.

p.60 나는 마치 포획되어 자세히 관찰되기 위해 창백한 형광등 아래 놓인 야생동물이 된 것 같다. 내 안의 모든 것이 절규한다. 할로겐램프의 하얀 불빛이 내 눈과 피부를 불태운다. 나는 사라지고 싶다. 태양도 전기도 없는 북극의 밤으로 돌아가고 싶다. 촛불들을 생각한다. 만약 내가 숨을 수만 있다면, 아주 잠시라도 내 몸을 숨길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더 편안해질 것이다.

p.91 곰에 맞서 생존한다는 것은 이 세계에서 '다가올 일' 에 맞서 생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구조적인 변화의 재개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우리를 매료시키는 단일성은 결국 그것의 본래 모습인 환상으로 판가름 난다. 형태는 그것만의 고유한 도식을 가지고 재구성되지만, 그것에 사용되는 요소는 모두 외부에서 온다.


그는 피해자인가? 그의 일상은 영영 돌이킬 수 없이 부서지고 훼손되었는가? 얼굴은 곧 정체성이라 말하는 심리치료사의 말처럼 그는 그 자신의 단일성을 영원히 상실했는가? 더 이상 자신일 수 없는가? 그는 얼굴과 턱이 부서지고 다리까지 물린 절체절명의 기로에서 죽음에 순응하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무기를 휘두르고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이. 영혼을 마주한 자가, 뜨거운 피가 돌고 심장이 펄떡이는 존재가 그러하듯이.

이 모든 혼란, 엄습하는 기억, 차라리 신비에 가까운 불가해의 세계. 마침내 그는 돌아간다. 얽히기 위해.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곳, 영혼으로 가득한 곳으로. "수많은 생명체와 호흡하는 법을 아는 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피해자로 남는 대신, 인류학자로서 다시 서기 위해". 서로의 일부가 된 존재의, 캄차카, 눈보라와 안개의 땅으로.

p.103 저는 다시 겨울을 나고 활력을 되찾기 위해서 깊숙한 굴로 들어가는 마추카가 되어야 해요, 그리고 제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수수께끼가 남아 있어요, 저는 곰의 문제를 아는 이들, 꿈에서 여전히 곰에게 말을 거는 이들,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고 삶의 궤도는 항상 매우 명확한 이유로 교차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들 곁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어요.

p.146 곰은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의 눈을 참지 못해, 그 안에서 반사되는 자신의 영혼을 보기 때문이야, 이해할 수 있겠어? (...) 인간의 눈을 본 곰은 항상 그가 그곳에서 본 것을 없애려고 해, 곰과 시선을 마주쳤다면 곰은 필연적으로 너를 공격하게 돼, (...) 곰이 인간과 다른 점은 그들이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는 거야.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해하기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또한, 그 이유가 오롯이 나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아집에 있었음을. '나'를, 현실을, 과학과 논리의 세계를, 이해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고집을 버리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느껴야 하는구나. 그 모든 경험이, 기억과 환상의 경계에 선 불가해와 영혼의 세계가 나를 통과해 또다른 미지로 향하도록 그저 두어야 하는구나. 온몸으로 느끼는 수밖에 없었구나. 처음부터.

이것은 문명세계의 위대한 승리도, 생존에의 찬양도 아니다. 오히려 현재와 과거, 미래가 한 데 얽히고 흘러가는 강이다. 직감인 동시에 예지다. 혼란에서 건져낸, 손가락 사이로 스쳐지나가는 사유다. 오직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전율과 경이. 새까맣게 빛나는 노란 눈동자, 축축하게 덮쳐오는 숨, 그들은 언제나 이 세계에 함께해왔음을, 시선 너머 희미하게 닿아오는 그들의 말을.

p.14 느껴진다. 그는 지금 멀리 있다. 그는 높은 평원에서 절뚝거리고 있다. 털가죽 위로 피가 맺힌다. 그가 내게서 멀어지고 내가 나 자신으로 되돌아올수록 우리는 각자 스스로를 되찾는다. 그는 나 없이, 나는 그 없이, 서로의 몸 안에 잃어버린 것을 견디며 살아 남는다. 남겨진 것들과 함께 살아간다.

p.172 다리아, 나는 어떻게 인류학을 하는지는 몰라요, 그저 내가 어떻게 하는지 알 뿐, 듣고 있어요? 응, 듣고 있어. 나는 다가가서 붙들리고 멀어지거나 도망가요. 나는 돌아와서 붙잡고 번역해요. 다른 자들에게서 온 것을, 내 몸을 통과해서 내가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을.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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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랜드 엘레지
아야드 악타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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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한 세대, 적어도 나의 부모 이상 세대에게 미국은 그야말로 기회의 땅이었다. 넘쳐흐르는 자본, 그에 걸맞는 무한한 일자리, 타고난 신분과 죽어가는 땅에서 벗어나 개인의 노력으로 눈부신 성취를 거둘 수 있는 곳. 황금향이자 이상낙원이고, 자유와 평등, 공정한 기회의 현신과도 같은 곳. 그러므로 미국에 정착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일종의 신분상승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아니. 이전에도 수없이 알아차렸으나 이제야 이해받고 있음에 가까울 것이다. "신세계" 침략에서 시작한 그들의 역사는 공고한 성이 되어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을. 창백한 피부색처럼 빛나는 금의 땅. 단 한 번도 "순혈"인 적이 없었던 그들의 제국. 영원한 이민자들의 땅. 배척의 낙원.

p.53 아버지는 늘 미국을 기회의 땅이라고 불렀다. 그게 아버지만의 독창적인 말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안다. 하지만 이런 의문을 품게 된다 누구를 위한 기회? 아버지를 위한 기회? 아버지가 소망하는 것이 될 기회? 물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지만, 다른 사람들과 아버지가 진정한 동격일 경우로 국한된다.

p.149 만일 이 모든 이야기가 피해망상처럼 들리는 독자가 있다면 그의 행운에 축하를 보내고 싶다. 분명코 그런 독자들은 공화국의 일원이기보다 그 적으로 인식될까 봐 — 그리고 그렇게 취급될까 봐 — 걱정에 시달리는 일상을 보낸 적이 없었을 테니까.


앞서 말했듯, 미국은 여전히 이민자의 땅이다. 인종의 용광로니 글로벌이니 어떤 수사를 붙여도 '이민자'는 이방인일 뿐이라는 뜻이다. 잠시 머무르는 이, "우리" 아닌 자들. 스스로에게조차. 이방인은 그저 낯선 자가 아니다. 영주하지 않는 자다.

그의 신원과 기원, 과거와 현재가 어떠하든 그는 정착하는 자가 아니다. 잠시 머무르는 이유가 해소되면 떠나는 이, 집단에의 충성과 믿음을 소유할 자격을 얻지 못하는 자다. 이방인은 "우리"가 아닌 탓에 우리 이하의 지위를 지닌다. 그들의 자리는 불신과 대립의 가능성으로 얻어진다. 그것을 거부하는 자는 이방인으로도 남을 수 없다.

p.297 나는 나 자신을 닮은 사람들이 내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걸 알았기에 나 자신도 마찬가지일 것임을 알았다. 그들을 닮은 거울 속 나의 모습은 내가 늘 잊고자 하는 나의 진실, 내 외모를 마주할 때를 제외하곤 알 수 없는 진실(내가 〈아웃사이더〉라는 의식이 없음에도 오직 그렇게만 보일 거라는)을 상기시키는(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암시였다.

p.493 늘 자신을 미국인으로 생각하고 싶어했었지만 사실 그 상태를 열망했던 것일 뿐이었다고. 되돌아 보니 자신은 그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하나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던 것이었는데 그 역할이 진짜인 줄 알고 있었다고. 나쁠 건 없었고 그저 그 역할을 하는 것에 지쳤을 뿐이라고.


이방인은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성원으로 생존하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려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성원 개개인으로부터 무엇을 착취하는가. 그것은 무엇으로 생명을 얻는가. 놀랍지도 않게, 돈이다. 기본적인 삶, 탄생부터 죽음까지, 건강과 교육, 존엄까지도.

미국의 신은, 뿌리는 건국의 여러 아버지도, 하늘에 계신 유일한 아버지도 아니다. "미국인들"이 기함하는 샤하다에 무엇보다도 미국이 목을 맨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자본 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달러는 신의 사도이다. 아, 엉클 샘의 영광이여.

p.363 이제 우리는 시민이기 전에 그 무엇보다도 소비자였으며, 구매가 우리의 특권적 행위였다. 이제 더 이상 제우스나 여호와 같은 의인화된 추상적 관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경제라는 물질적 존재를 섬기게 되었다. 우리는 그 존재의 변덕을 두려워하고, 그 존재가 베푸는 시혜에 감사하고, 의식과도 같은 구매 행위로 그 존재의 가상의 안녕에 이바지했다.

p.425 「사람들이 집도 마당도 돌보지를 않아요. 그들 자신도 돌보지 않고. 아무것도 돌보지 않는 거죠. 단순히 돈이 없어서가 아니에요. 가난해진 건 벌써 30년이나 됐고, 이제 의욕 자체를 잃은 거죠. 그걸 잃게 되면?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거죠.」


WASP의 제국,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있던 적도 없던 영광을 찾아오겠다는 헛소리는 현실의 위협이 되었다. 설마, 했던 재선까지 이뤄지며. 그 사회에서 여전히 이방인으로 자리하는 이들은 어떻게 구성되고, 이해되는가. 자서전인지 허구인지 모를 이 이야기는 음악적 형식이라는 외피를 두름으로서 다시 한번 독자를 혼란에 빠트린다.

일대기, 일생, 개인적인 동시에 지극히 익숙한 이 되풀이, 론도는 그와 다름없이 태어나 자란 곳을, 그저 우리-아님으로 "생각된다는" 이유로, 입 닫고 살든지 아니면 떠나라는 말을 너무도 쉽게 던지는 '순진함' 앞에서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것은 찬양의 노래가 되지 않을 것이다.

p.12 미국은 식민지로 시작했고 식민지로 남아 있다. 즉, 여전히 약탈이라는 단어로 정의되며, 부가 우선이고 시민의 질서는 뒷전인 곳이다. 약탈은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의 이익을 위해 이어져 왔으며, 여기서 조국은 더 이상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 미국적 자아이다.

p.507 「그거야 내 알 바 아니지요. 난 그저, 여기서 사는 게 그렇게 힘들다면 왜 여기서 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 「내가 여기 있는 건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좋든 싫든 — 늘 조금씩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죠— 나는 여기 말고 다른 데서 살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 미국은 내 고향입니다.」


*도서제공: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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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악의 교전 1~2 세트 - 전2권
기시 유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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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성인을 보기 위해 이 책을 펼치지 않았다는 것. 초판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해 께름칙과 두려움 사이 어딘가를 헤매던 마음을 간신히 다잡게 한 생각이다. 희망을 버려라. 오직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라. 어째서?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생명의 위협,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아닌, 일상에서 목숨을 잃을 걱정은 그저 환상이다. 연약한 살결이나 물어뜯길 목덜미 따위를 거리낌없이 내놓는 안전하고 익숙한 공간이 대부분이므로.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우리 인간은 서로를 해치기를, 상대를 그저 말하는 고깃덩이로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 "문명"을 이룩했는가?

p.94 그때 가타기리는 깨달았다. 학교란 아이를 지키는 성역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행운이나 다른 사람보다 빨리 위험을 감지하는 직감, 또는 자신의 몸을 보호할 만한 무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갖춘 능력은 직감뿐이다.

p.425 넌 사기꾼이야. 교묘한 말주변으로 주변 사람들을 꾀는 게 특기인가 본데, 그 속은 겉과 딴판이지. 이 학교에서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에서 학교를 지배하는 내 영역을 침범하려 든다면 철저하게 처리해 주지. 나는 지금의 지위를 얻기 위한 교환조건으로 네가 상상도 못 할 대가를 치렀으니까 말이야.


교육의 전당, 사회학습의 장... 보호와 교류를 전제로 하는 대표적 공간인 학교가 지배의 장, 사냥터가 된다면 어떨까. 그때도 인간은 선량한 짐승들의 사회를 신뢰한다 말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당신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알아챈들 달라질 것은 없지만요. 이야기는 철저한 냉소와 절망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상위 포식자를 자부하는 그는 지배자다. 가장 영리해서도, 힘 센 존재여서도 아니다. 그에게는 사회적 금제, 타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터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라는 고인 늪에 잘못 흘러든 상어의 이야기"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세계는 늪이다. 사냥터다. 그를 멈추는 것은 죽임당하는 자의 인격도, 호소도, 양심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안위, 순간의 흥미일 뿐.

p.114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일본인이 모두 양이라고 생각했다네. 그런데 자네는 분별없이 다른 생물을 습격하는 데다가 같은 양까지 태연하게 잡아먹는 육식 양이더군. 자네는 늑대의 눈으로 봐도 정상이 아닌 괴물일세. 그런 자네가 이 세계에 있으면 내가 심히 성가시거든."

p.124 여기에는 경쟁자가 없다. 주위의 선생님들을 둘러보고 그렇게 느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진정한 경쟁에 뛰어든 적이 없을뿐더러 정말로 무서운 상대와 맞부딪힌 경험도 없었다. 학교란 물이 고인 연못과 같다. 가재나 메기가 위세를 떨치고 기껏해야 어쩌다 실수로 자리 잡은 악어거북이나 블랙배스가 살 뿐이다. 메가로돈과의 싸움에서 당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바다를 떠나온 황소상어의 눈에는 주위가 온통 먹이 천지로 보이는 이상적인 은신처였다.


포식자의 아가리에 든 우물 안 개구리를 누가 동정할까. 그의 "지배"에 휘말린 이들은 상식적으로, 선하게 행동할수록 위태로워진다. 바닥까지 쥐어짜이며 가차없이 버려진다. 타인을 사람이 아닌 그저 이용대상으로만 간주하는 그에게 양심은 그저 잠시간의 즐거움에 불과하다. 어쩔 수 없다, 고 결론지은 순간 그의 "해결책"은 멈출 수 없는 참극으로 질주한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남는다. 과연 그러한가? 이것은 그저 사악한 개인을 사람 아닌 존재, 악마로 비난하기 위한 것인가?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그렇게 순진한가? 아니다. 그가 지목하는 악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닌 인간이라는 종과 사회에 내포된 시한폭탄같은 무저갱이다. 인간이 키워내는 인간의 악이다.

p.95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야스하라가 눈을 뜨고 미소를 지었다. 비밀로 하라고 설득할 자신은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이 아이에게 약점을 잡히는 꼴이다. 역시 선수를 쳐야 하나? 굉장히 아쉽지만 이 아이도 조만간 처분해야겠군. 욕실 밖에서 애완동물의 애완동물이 야옹 하고 울었다.

p.289 "너 말이야, 이번에 일어난 일로 다른 애들이 크게 상처받은 건 모르지?"
"상처받았다고요? 하지만 딱히 다친 애들은 없었는데요?"
"몸이 아니라 마음을 말하는 거란다. 네가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단다. 감정은 매우 부드럽고 상처받기 쉬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몸을 다치게 하는 행위만큼 나쁜 짓이지.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라."


그것을 눈치채는 순간, 독자는 알게 된다.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는 선언의 진짜 의미를. '우리 안의 악'을 경계하지 않는 교육시스템, 무사안일주의와 이권다툼, 도덕보다 권위를 내세우는 교육자로 얼룩져 악을 경계하지 않는 교육, 순종적인 성원을 양성하는 데 집착하는 근대 이후 일본 교육제도의 문제점은 한국사회에게도 남의 일만은 아니다.

결국 이 참사의 전적인 책임은 "황소상어"같은 악마도, 소수의 이기심에 있지 않다. 수많은 기회를 놓쳐온 사회 전체를 면죄할 수 없는 이유다. 뿌리 깊은 공포,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과 위기의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작가의 차기작을 기다리려 한다. 우물 안 포식자에서 썩은 사과, 인간 전체를 "통제"하고 "개량"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과연 무엇일지.

p.52 "아니.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야. 살다 보면 누구나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잖아?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야 하지. 나는 너희들과 비교해서 그런 순간에 선택의 폭이 훨씬 넓은 거야."

p.253 나 같이 아무 쓸모 없는 인간에게는 침입자 역시 관심을 갖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나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다. 쓰레기 같은 존재다. 죽여 봤자 헛수고다. 그러니까 못 본 척해줘. 죽고 싶지 않아. 반 아이들이 모두 살해당해도 상관없다. 그런 일쯤은 별거 아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전부 잊어버릴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만은 살고 싶다. 하느님, 제발 살려주세요.


*도서제공: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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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진 산정에서
미나토 가나에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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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오래된 고집이 있다. 사실 고집이라기보단 호되게 데인 흔적에 가까운데, 일단 이 작가 이름만 들었다 하면 일단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이 『고백』인데다 그 뒤로 『야행관람차』며 『경우』, 『모성』 등등을 줄줄이 읽어댔기 때문에 이번엔 대체 누굴 피말려 죽일지... 도통 안심하지 못하는 버릇이 생겨버렸다는 뜻이다.

뼈아픈 불신과 살떨리는 인간불신을 안겨준 바로 그 작가가 하필이면 등산을 주제로 돌아온 탓에 '힐링 드라마'라는 소개에도 산에서 누구 하나 죽어나가는 게 아닌지 바들바들 떨며 읽어야 했다. 그러니 불안이 무색하게, 아니, 꼭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게 그저 따뜻한 이야기로만 채워져 있지 않아 감동에 더해 역시, 하는 만족에 푹 잠긴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p.33 남편이 왜 고류다케를 제일 좋아했을지 가르쳐주세요. 마미코 씨는 즉답했어요. "고류다케 위에는 밤하늘이 아니라 우주가 펼쳐져 있어요." 우주. 우리는 둘이 동시에 사진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은하수도 이렇게 뚜렷하잖아요."

p.69 "쇠사슬이 있는 곳은 스스로 생각하지 않아도 걸을 수 있어." 그러니까 거기에 익숙해져버리면 아까 비슷한 곳에는 쇠사슬이 있었는데 이쪽에는 없다는 데에서 망설임이 생기고 무서워져 있으면 마련해준 사람에게 감사하고, 없으면 스스로 안전한 경로를 생각하면서 나아가라, 너라면 할 수 있다! 이 말이지. 쇠사슬에 의지하지 않는 인생을 나는 보내왔을 터다. 설사 산이 거기에 응답해주지 않아도.


네 편의 이야기는 산과 '산을 찾은 여자들'을 매개로 이어진다. 산이라는 특수한 공간, 평지를 걷는 일상과 다르게 땅이면서도 고립된 곳, 하늘에 가장 가까운, 거대한 자연의 일부가 되게 만드는 곳이다. 산에서는 누구나 겸허해지고, 솔직해진다. 자연을 굴복시키려는, 작아지기를 거부하는 오만은 산에게 허락받지 못하기 때문일까.

그래서일까. 산을 찾은 등장인물들은 들어서기 전의 각오랄지, 허세랄지. 단단한 벽을 허물고 저마다의 진심을 마주하게 된다.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무엇을 움켜쥐고 두려워하며 애써왔는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었는지.

p.149 인형이 좋다. 하늘하늘한 치마가 좋다. 귀여운 리본이 좋다. 그게 여성임을 보여주는 잣대라면 나는 완전히 여자다. 외견과 내면의 성은 일치한다. 하지만 왜 인형이나 치마, 리본이 어울리는, 내가 좋아하는 요소를 전부 갖춘 사람을 좋아한다고 하면 눈살을 찌푸릴까? 차라리 인형을 좋아하는 인간이 자동차를 좋아하는 인간을 좋아할 수 있는 원리를 가르쳐주면 좋겠다.

p.312 산에서도 힘들 때일수록 쉬는 게 두려웠어. 더는 못 움직이게 되는 것 아닐까 하고. 앉는 게 두려웠어. (...) 제대로 쉬어야 그 뒤에 더 잘 걸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어째서 산에서는 알고 있던 걸 일상생활에는 적용하지 못했을까? 그건 분명 여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나만 이물질이었어.


땅 아닌 땅, 고립된 공간으로서의 산은 오르는 이들로 하여금 해묵은 속내를 털어놓게 한다. 상처와 두려움을 길 위에 내려놓고 가야 할 길을 가게 한다. '노을 진 산정'에서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내일일까. 지나간 오늘이었을까.

어쩌면 네 편의 이야기의 그들은 어느 순간엔가 서로를 스쳐지나갔을지 모른다. 삶의 많은 순간처럼, 낯선 이와 작은 기억에 힘을 얻으며, 격려하고 또 다독이며. 온갖 산을 오르고 또 올랐다는 작가의 감상은 수없이 마주치고 안부를 기원했을 산행의 기억일지 모른다.

p.99 산에 오르면 그대로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그러면 우리는 줄곧 함께 있을 수 있다. 태양이 상공에 있는 동안에는 손을 맞잡고 암릉을 넘고 꽃을 즐긴다. 밤에는 랜턴 불빛 아래 한 손에 따뜻한 와인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하고, 연주하고, 서로의 심장 소리를 자장가 삼아 기대어 잠든다.

p.308 건물이 무너졌을 뿐이라면 또 세우면 돼. 하지만 그 땅이, 마을 전체가 안전한 생활을 보내지 못하는 장소가 돼버리면, 거기서 재생하는 건 불가능해. 적어도 반년, 일 년 같은 시간으로는.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릴 수도 없어. 오늘을, 내일을 살아가야만 하고 아이들도 먹여 살려야 하니까.


"아무도 다치지 않고 선의에 기대는 이야기"라는 소개는 반만 맞았다. 네 편의 이야기 속 인물들은 제각기 삶에 할퀴어진 상처를 끌어안고 있다. 시간이, 서로가 의도치 않게 상처입히고 무너지게 했다. 그러나 순간 미워할지언정 증오하지는 않는다. 아파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믿음과 선의가 서로를 일으켜세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괜찮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이.

이제야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는다. 바짝 붙잡고 있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만날 또다른 누군가가 머리 위엔 하늘, 단지 그것뿐인 파란 하늘이 펼쳐진 꼭대기에서 여기는 종착점이 아니구나. 흙과 바위를 디디며 올라온 산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까지가 산의 시간이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산에 가고 싶다.

p.218 나쓰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자기 마음을 더 솔직하게 표현하는 말을 찾기 위해. 나는 이제 충분한데. 그거면 됐다고, 그 말을 듣고 싶었다고 말해버리고 싶다. "그런 일을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나 자신이 사람의 생명에 다가설 수 있는 인간이 되고 싶어."

p.292 산에 이끈 건 나였는데, 언젠가부터 네가 앞장서 걸으며 시야에 들어오는 산 이름을 확인하고는 다음에는 저기로 가자, 여기로 가자며 다음 산으로 인도해줬지. 네 편지가 정상에 도착한 데에서 끝나는 것도 수긍이 가. 네게 산정은 목적지이자 다음 목표를 향한 출발점이기도 했던 거 아닐까?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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