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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악의 교전 1~2 세트 - 전2권
기시 유스케 지음, 한성례 옮김 / 현대문학 / 2025년 2월
평점 :
확실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나는 성인을 보기 위해 이 책을 펼치지 않았다는 것. 초판 이후로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처음 읽었을 때의 기억을 잊지 못해 께름칙과 두려움 사이 어딘가를 헤매던 마음을 간신히 다잡게 한 생각이다. 희망을 버려라. 오직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라. 어째서?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생명의 위협,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아닌, 일상에서 목숨을 잃을 걱정은 그저 환상이다. 연약한 살결이나 물어뜯길 목덜미 따위를 거리낌없이 내놓는 안전하고 익숙한 공간이 대부분이므로.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우리 인간은 서로를 해치기를, 상대를 그저 말하는 고깃덩이로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좋을 "문명"을 이룩했는가?
p.94 그때 가타기리는 깨달았다. 학교란 아이를 지키는 성역이 아니라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라는 사실을… 여기에서 무사히 살아 돌아오기 위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행운이나 다른 사람보다 빨리 위험을 감지하는 직감, 또는 자신의 몸을 보호할 만한 무력이 필요하다. 자신이 갖춘 능력은 직감뿐이다.
p.425 넌 사기꾼이야. 교묘한 말주변으로 주변 사람들을 꾀는 게 특기인가 본데, 그 속은 겉과 딴판이지. 이 학교에서 무슨 짓을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에서 학교를 지배하는 내 영역을 침범하려 든다면 철저하게 처리해 주지. 나는 지금의 지위를 얻기 위한 교환조건으로 네가 상상도 못 할 대가를 치렀으니까 말이야.
교육의 전당, 사회학습의 장... 보호와 교류를 전제로 하는 대표적 공간인 학교가 지배의 장, 사냥터가 된다면 어떨까. 그때도 인간은 선량한 짐승들의 사회를 신뢰한다 말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당신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알아챈들 달라질 것은 없지만요. 이야기는 철저한 냉소와 절망의 선언으로부터 시작된다.
최상위 포식자를 자부하는 그는 지배자다. 가장 영리해서도, 힘 센 존재여서도 아니다. 그에게는 사회적 금제, 타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인간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터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학교라는 고인 늪에 잘못 흘러든 상어의 이야기"라는 작가의 말처럼, 그의 세계는 늪이다. 사냥터다. 그를 멈추는 것은 죽임당하는 자의 인격도, 호소도, 양심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안위, 순간의 흥미일 뿐.
p.114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지금까지 일본인이 모두 양이라고 생각했다네. 그런데 자네는 분별없이 다른 생물을 습격하는 데다가 같은 양까지 태연하게 잡아먹는 육식 양이더군. 자네는 늑대의 눈으로 봐도 정상이 아닌 괴물일세. 그런 자네가 이 세계에 있으면 내가 심히 성가시거든."
p.124 여기에는 경쟁자가 없다. 주위의 선생님들을 둘러보고 그렇게 느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진정한 경쟁에 뛰어든 적이 없을뿐더러 정말로 무서운 상대와 맞부딪힌 경험도 없었다. 학교란 물이 고인 연못과 같다. 가재나 메기가 위세를 떨치고 기껏해야 어쩌다 실수로 자리 잡은 악어거북이나 블랙배스가 살 뿐이다. 메가로돈과의 싸움에서 당한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잠시 바다를 떠나온 황소상어의 눈에는 주위가 온통 먹이 천지로 보이는 이상적인 은신처였다.
포식자의 아가리에 든 우물 안 개구리를 누가 동정할까. 그의 "지배"에 휘말린 이들은 상식적으로, 선하게 행동할수록 위태로워진다. 바닥까지 쥐어짜이며 가차없이 버려진다. 타인을 사람이 아닌 그저 이용대상으로만 간주하는 그에게 양심은 그저 잠시간의 즐거움에 불과하다. 어쩔 수 없다, 고 결론지은 순간 그의 "해결책"은 멈출 수 없는 참극으로 질주한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이 이야기는 그저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로 남는다. 과연 그러한가? 이것은 그저 사악한 개인을 사람 아닌 존재, 악마로 비난하기 위한 것인가? 작가가 그리는 세계는 그렇게 순진한가? 아니다. 그가 지목하는 악은, 두려워해야 할 것은 개인이 아닌 인간이라는 종과 사회에 내포된 시한폭탄같은 무저갱이다. 인간이 키워내는 인간의 악이다.
p.95 쳐다보는 눈길을 느꼈는지 야스하라가 눈을 뜨고 미소를 지었다. 비밀로 하라고 설득할 자신은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이 아이에게 약점을 잡히는 꼴이다. 역시 선수를 쳐야 하나? 굉장히 아쉽지만 이 아이도 조만간 처분해야겠군. 욕실 밖에서 애완동물의 애완동물이 야옹 하고 울었다.
p.289 "너 말이야, 이번에 일어난 일로 다른 애들이 크게 상처받은 건 모르지?"
"상처받았다고요? 하지만 딱히 다친 애들은 없었는데요?"
"몸이 아니라 마음을 말하는 거란다. 네가 꼭 알아줬으면 좋겠어. 인간에게는 감정이 있단다. 감정은 매우 부드럽고 상처받기 쉬워.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행위는 다른 사람의 몸을 다치게 하는 행위만큼 나쁜 짓이지.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몰라."
그것을 눈치채는 순간, 독자는 알게 된다. 어디도 안전하지 않다는 선언의 진짜 의미를. '우리 안의 악'을 경계하지 않는 교육시스템, 무사안일주의와 이권다툼, 도덕보다 권위를 내세우는 교육자로 얼룩져 악을 경계하지 않는 교육, 순종적인 성원을 양성하는 데 집착하는 근대 이후 일본 교육제도의 문제점은 한국사회에게도 남의 일만은 아니다.
결국 이 참사의 전적인 책임은 "황소상어"같은 악마도, 소수의 이기심에 있지 않다. 수많은 기회를 놓쳐온 사회 전체를 면죄할 수 없는 이유다. 뿌리 깊은 공포,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과 위기의식이 절망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 작가의 차기작을 기다리려 한다. 우물 안 포식자에서 썩은 사과, 인간 전체를 "통제"하고 "개량"할 수 없다면, 우리에게 남은 희망은 과연 무엇일지.
p.52 "아니. 그런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야. 살다 보면 누구나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잖아?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야 하지. 나는 너희들과 비교해서 그런 순간에 선택의 폭이 훨씬 넓은 거야."
p.253 나 같이 아무 쓸모 없는 인간에게는 침입자 역시 관심을 갖지 않으리라 믿고 싶다. 나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다. 쓰레기 같은 존재다. 죽여 봤자 헛수고다. 그러니까 못 본 척해줘. 죽고 싶지 않아. 반 아이들이 모두 살해당해도 상관없다. 그런 일쯤은 별거 아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전부 잊어버릴 일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만은 살고 싶다. 하느님, 제발 살려주세요.
*도서제공: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