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흰 캐딜락을 타고 온다
추정경 지음 / 다산책방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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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주관적 후기입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 제목만 보고는 액션 활극인가 했다. 뻔하게 주먹이며 돈이며 오가는 이야기려나 싶어 가벼운 마음으로 집어들었다 앉은 자리에서 순식간에 끝을 봤다. 제목이, 아, 그래서 제목이. 하는 중얼거림과 함께 덮은 이 책은 제법 발랄한 표지와 현대판타지라는 장르의 선입견을 놓고보면 꽤나 정석적인 액션소설이다. 영화로 개봉하면 화려하게 돌아가는 카메라에 눈을 번득이는 배우가 클로즈업으로 잡히는 장면이 쿵쿵 울리는 음악과 함께 암전되며 로고가 뜨는 그런 광고를 낼 것 같은, 정석적인 능력자 배틀을 주제로 하는 소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부하지 않다. 소설이라고는 해도 그렇게 얇지는 않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읽고 나면 잘 만든 영화를 한 편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쾌한가 하면 머뭇거리게 하고, 질척이는가 하면 말마따나 관리 잘 된 "올드 카가 아니라 클래식 카"를 타고 질주하는 문체가 저자의 기량을 가늠케한다.
욕망이 모여 고이는 곳, 고이다 못해 썩어가는 곳. 잠깐의 일탈부터 삶의 밑바닥에서 몸부림치는 이들과 그것을 가장 잘 아는 돈줄, 관리자 혹은 방관자, 거부하지 못할 유혹으로 끌어당겨 뼛속까지 빨아먹고나면 뱉어버리는 늪의 수하들. 변두리에서 조장도 협력도 그렇다고 구원하지도 않는 전당사가 있다. 한때의 달콤한 맛을 잊지 못하고 돌다 돌다 결국 마지막 남은 인간성까지도 저당잡히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그 바닥에는 흰 캐딜락을 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성 사장과 그의 직원들이 있다. 홀연히 나타나 자리잡았다는, 거금을 다발로 들고 다녀도 아무도 건드릴 생각 한 번 하지 못한다는 성 사장, 어디고 주먹질을 일삼는 일수꾼, 악당의 표본같은 험악한 저 옆 전당사 직원이 눈길 한 번 받아보려 오매불망 좇는다는 그 성 사장, 차만큼은 절대 저당잡지 않는다는, 언성 한 번 높이지 않아도 모두가 설설 긴다는 바로 그 성 사장이 다친 새를 돌보듯 무심하게, 그렇지만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게 싸고 도는 이가 바로 주인공 장진이다. 진아. 진아 네가. 하고 불리는 그 진이.
이 소설에 행복한 이는 아무도 없다. 대체 결혼한 것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는 생활을 하면서도 재혼할 생각을 않는 아버지와 어느날 나타나 함께 사는 정희 아줌마, 경쟁업체-라고 쓰고 인근 전당사-현수막을 찢어발기고 유유자적 복귀하는 진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성 사장, 삶을 저주해야 할지 아득바득 붙잡아야 할 마지막 보루로 여겨야 할지 입을 꾹 다물고 속내를 감추는 배준과 카지노의 주인, 그리고 불길한 그림자처럼 언뜻 등장했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심 경장이라 불리는 사내까지. 저마다의 불행과 저마다의 늪에 발을 담그고 살아간다. 고작해야 잠시 들렀다 떠났다는 묘사로만 존재하는, 흐릿한 배경 속 무늬들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그러나 와중에 나름대로 적응해 살아가고 저마다의 비밀을 감춘 채 지키기 위해, 빼앗고 파멸시키기 위해 몸부림친다.
시공간 이동이라는 만만찮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있는 문체로 독자를 붙잡고 결말까지 질주해내는 솜씨가 상당하다. 분량의 한계보다는 내 욕심 탓이겠지만,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좀 더 풀어주었다면 훨씬 만족스럽지 않았을까. 시리즈로 이어가려는 과욕 없이 캐딜락을 타고 찾아온 그에게 울듯 말듯 한 웃음을 보내며 딱 덮을 수 있어 약간의 시원섭섭함을 남기는 최선의 결말이었다.
슬슬 찬 바람이 부는 지금부터 코가 떨어지게 추운 겨울까지 읽기 딱 좋은 배경이니, 때를 놓치지 말고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스포일러 없이 쓰려니 어렵네요. 덕분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추정경 #그는_흰_캐딜락을_타고_온다 #다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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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잊어야 하는 밤
진현석 지음 / 반석출판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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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반석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개인적인 후기입니다.

머리말 이후 추천사도 해제도 없는 책은 참 오랜만이다. 더불어 전업 작가가 아닌 저자의 작품도 참 오랜만이다. 문외한의 고루한 편견일지는 몰라도, 날로 창작에 대한 진입장벽이 낮아지고 있음을 실감하니 기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선 "추천사도 해제도 없다"도 없다는 평은 달리 말하면 "내용에 충실한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약 350쪽에 가까운 분량을 오롯이 결말을 향해 질주하는 내용으로 채운 저자의 지구력과 서술능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작품이었다. 스릴러, 추리 장르의 한계상 내용을 소개하기가 어렵다. 장르소설을 추천하는 일이 늘 그렇듯 이 책을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이번 서평은 작품에 대한 소감으로 갈음하기로 하자.

이 책의 주인공은 take로 나누어진 파트의 서술자인 김성균, 김성찬, 임강철로 나눌 수 있다. 특이하게도 서술자에 따른 시점을 장으로 나누지 않고 한 챕터 내에서 분할된 take로 구분해 마치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든다. 또한 교묘하게 교차하는 시점과 사건 서술이 결말까지 숨가쁘게 따라가도록 만든다. 능숙한 서술트릭에 기시감이 들어 찾아봤더니 아비코 다케마루의 "살육에 이르는 병"(시공사, 2007)와 유사한 느낌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밀리지 않는 기량을 이렇게 좋은 기회로 누리게 되어 감사하다.
작품은 맥락을 알 수 없는 대화로 시작해 뒤통수를 치는 충격을 남기며 끝난다. 읽는 내내 초현실적인 존재가 개입한걸까? 타임패러독스를 이용한 내용일까? 수없이 질문을 던졌지만 결국 사람의, 사람으로만 이루어진 이야기라는 점이 서술력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다소간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소설보다는 시나리오에 가까운 느낌이 들며, 인터넷 분할 연재였으면 딱 알맞을 정도인 글의 짜임새나 밀도가 아쉽다. 이 점은 저자의 장편 출판 경험이 쌓임에 따라 이런 시절이 있었다. 정도로 회자될 부분이니 벌써부터 가능성을 닫아두고 싶지 않다. 여성 캐릭터에 대한 저자의 시선 또한 다소 아쉽다. 저자가 중년 남성이라는 한계를 부딪힌 탓이 아닐까 싶지만, 이 또한 앞으로의 숙고와 경험에 달려있으니 쉽사리 선을 긋고 싶지 않다.
전반적으로 차기작을 기대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아이디어이며 초반 서술은 작품 전체를 끌고 나가는 동력이 되고, 임팩트를 주지 못하는 결말은 집을 다 지어놓고 문은 달지 않고 가버리는 것과 같다. 초반부의 흡입력을 덮는 그 순간까지 잃지 않고 질주해 마지막 문을 닫는 순간 뒤돌아보게 하는 작품, 여름의 무더운 시간까지 잊게 하는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출판사 바른북스에게 감사드린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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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삭제 완역본) -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현대지성 클래식 37
메리 셸리 지음, 오수원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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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판사 현대지성에서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개인적인 후기입니다.
#메리셸리 #프랑켄슈타인 #SF소설시초 #고전문학 #여성문학 #뮤지컬프랑켄슈타인 

 이제는 고전이 되었고, 혹자는 (도통 이해할 수는 없지만)명작동화로, 혹자는 영화 내지는 뮤지컬, 완역판으로 읽었을 이 작품을 모르는 사람은, 적어도 이름이라도 들어본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번 글은 줄거리 소개보다는 개인적인 감상과 질문에 집중하기로 하자.
 
 연금술 시대를 지나 측정과 실험, 객관적 진리를 향한 과학기술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오만의 도약이기도 했다. 이 작품을 선한 인간과 악한 괴물의 대립 내지는 단순한 개인의 실수 정도로 읽어내는 독자라면 초반의 발트만교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과연 그 "오만이나 가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견해(p.55)"에 반면교사로서의 의미가 포함되었는지는 저자만이 정확히 알고 있을테지만. 책의 부제인 "현대판 프로메테우스"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명작동화나 공포영화에서 그린 슬픈 과학자와 끔찍한 괴물의 대립구도에 그다지 동의하기 어려울테다. 액자식 구성에서 바깥 서술자와 서사의 주인공인 빅토르 자신 모두 인간을 선하고 용기있는 존재로 그리고 있지 않나. 그러나 작중에서 무고한 이를 위협하여 범죄자로 모는 것도, 위대한 발명이라는 이름 아래 책임지지 못할 만용으로 재앙을 불러온 것도 인간이다. 창조주, 괴물의 신.
 p.55 "천재들의 노고란 설사 그 방향이 잘못되었더라도 종국에 가서는 인류에 견고한 유익이 되지."

 소설 전체의 묘사가 황홀하고 아름답다. 심지어 절망하는 주인공을 그릴 때 조차. 주인공의 절규와 괴물의 분노에서 과연 이 작품의 프로메테우스는, 창조주는, 괴물은 누구인지 다시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빅토르는 전능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혼란에 빠트릴 괴물을 인세에 불러낸 프로메테우스인가? 재앙을 만들어낸 창조주인가? 만들어졌을 뿐이지만 탄생의 순간부터 오점, 저주가 되어 스스로를 재앙으로 여겨야했던 괴물은 인간이 전능하지 않다는 깨달음과 좌절을 주는 프로메테우스인가? 혹은 차세대의 신이 될 것인가? (동종이 아니면 번식이 불가능하다는 암시가 있지만, 기실 시체를 모아 만들었으니 그다지 인간이 아닌 것만은 아니지 않나)
 p.115 죽고싶은 순간이 닥칠 때마다 아프게 울었습니다. 평화가 내 마음에 다시 찾아들어 가족들에게 위로와 행복을 줄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자책이 희망의 불을 모조리 꺼버렸으니까요.
p.123 인간의 충동애 배고픔과 목마름과 성적 욕망에만 있다면 다른 것에 의존할 필요가 거의 없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텐데요. 하지만 인간은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우연한 말 한 마디나 그 말이 전하는 풍경에도 마음이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p.152 "부나 혈통 중 하나만 있어도 존경은 받지만, 둘 다 없다면 매우 드문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 선택된 소수의 이익을 위해 힘을 탕진할 운명에 처한 부랑자나 노예로 간주되더이다."

 결국 빅토르가 두려워한 것은 괴물의 존재 그 자체보다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 통제할 수 없는 여성체가 결합된 존재였을테다. 피창조물이자 부속물로 여겨지던 여성을 지배할 수 없다는 공포는 당대 사회에서 저자 메리 셸리가 부딪혀온 시대에서도 급속하게 퍼져나가는 중이었겠지. 허용되지 않은 존재의 침입, 통제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은 역설적으로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나온다.
 이미 널리 알려진 작품의 본문만을 옮기는 데에 그치지 않고, 풍부한 설명이 특기할만한 해제를 첨부한 출판사의 세심함이 돋보인다. 본문의 외연을 넘어 페미니즘, 자연과 인간의 대립, 오만한 이성과 기술에 대한 경계 등 다양한 관점에서 접할 수 있는 점이 좋았다는 말을 남기며, 이상으로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 37번, 프랑켄슈타인(부제: 현대판 프로메테우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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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 - 뉴욕의 초정통파 유대인 공동체를 탈출하다
데버라 펠드먼 지음, 홍지영 옮김 / 사계절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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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
데버라 펠드먼, 사계절, 2021.
ISBN 9791160947458

#독서일기/2021년/7월
#문학/에세이
#언오소독스:밖으로 나온 아이#

*사계절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고 쓰는, 개인적 감상입니다.

Unorthodox. 정통적이 아닌, 특이한. 부제를 읽기도 전에 쉬운 이야기가 아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목의 의미를 신경쓰는 독자라면 읽는 내내 작은 의문이 해소되지 않고 부유하는 느낌이 들 것이다. 밖으로 나온 아이, 대체 누가. 주인공이라고 하기엔 그의 아이가, 아이라고 하기엔 주인공 데버라가 너무 어리다. 어리고, 미숙하고, 혼란스럽고 겁먹었지만 누구보다 용감한 여성. "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는 억압되고 짓눌렸던 저자의 시간들과 그를 둘러쌌던 폭력의 세계를 고발하고 그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쟁취하고자 뛰쳐나온 용기를 고백하는 글이다. 길고 끈질긴 폭력과 굴욕의 굴레.

저자가 속했던 공동체는 뉴욕 소재 초정통파 유대인 공동체로, 율법 하에 모든 곳이 정해지는 곳이다. 코셔를 지키지 않는 식품, 물품은 사용치 않으며, 부부관계와 삶의 전반적인 것들의 기반에는 엄격한 율법이 있다. 아마 원작인 이 책이든, 넷플릭스 시리즈로 제작된 드라마든 이 이야기를 따라가는 독자는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여자는"에 진저리를 치게 될 것이다. 여자는 이걸 해서는 안돼, 여자는 이런 옷을 입어서는 안돼, 여자는 순종해야 해,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 여자는. 그 모든 것의 기반에는 율법이라는 이름의 폭력이 있고 여성은 순종이라는 이름의 굴종의 삶을 견디며 살아간다.
p.63 할아버지는 탄압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동유럽에 살았던 우리 조상은 수 세대에 걸쳐 히틀러 시대의 박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집단 학살을 경험했다. 엄청난 고통과 상실의 역사를 물려받은 할아버지가 왜 평생 자신을 탄압하며 살아가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작고 무해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가두고, 그 박탈에서 만족을 얻는 것 같았다. 나의 조부모가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시련을 가하는 것은 죄책감 때문일까?
p.121 나는 렙베의 부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다. 그것이 할머니처럼 늘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나는 힘을 간절히 원했지만 그 이우는 다른 사람을 내게 복종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주인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p.147 나도 신의 기적을 기다리는 대신 직접을 만드는 여성이 되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속죄일 기도를 중얼거리긴 해도, 나는 기도문의 의미를 생각하지 않았고 자비를 구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삶의 모든 것을 두고 떠나는 마음은 대체 무엇일까? 나의 집이, 나의 부모가, 나의 세계가 나를 열등하고 하등한 인간으로 규정지을 때, 결국 나의 절대자는 나를 복종하는 자로 만들었다는 것을 자의 혹은 타의로 받아들여야 할 때,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받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사회에서 피해자는 또다른 피해자에게 방관자이자 가해자이다. 어쨌든 나름대로 바르게 키우고 가르쳤다고 생각했지만 그 모든 것은 그를 소유할 신과 남자의 행복을 위해서였던 것처럼. 가해자는? 역시 가해자다. 데버라의 삶에서 순박하게 눈을 빛내고 율법을 따르던 남편은 역시나 엄마를, 아버지를, 계율을, 신을 사랑하고 또 두려워하며 누리고 순종했던 모든 것은 결국 그를 위해 순종하고 견뎌야했던 이들의 비명이었던 것처럼. 성추행범을 같은 집단이라는 이유만으로 용서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안식일의 가족 모임이라는 이유로 진통이 오는 임신부를 내원시켜야 할 보호자가 열두시간쯤 미루면 안 되겠냐고 말하는 잔인한 멍청함처럼.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저자를 향한 폭력의 세계를 고발하는 일에 대체 믿음과 종교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신념이 사람을 억압하고, 공격하고, 끝내는 삶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면서 그것을 행복과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역사가 끊임없이 마주쳐온 계몽과 자유의 문제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끝없이 묻고 또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문제라는 점에서.
p.195 모든 질문에는 오직 한 가지 정답만 존재했다. 선생님은 타협이라 불렀지만 내게는 굴복이나 다름없었다.

스스로와, 선택이 아니었으나 사랑으로 선택한 아이를 폭력과 굴종의 세계에서 자유로운 삶으로 뛰쳐나오게 한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아울러, 올해의 여성저자, 올해의 에세이로 추천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언오소독스: 밖으로 나온 아이"에 대한 감상을 이것으로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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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를 키운 채식주의자
이동호 지음 / 창비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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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고 저도 비거니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요... 아니었습니다... 이 책의 방점은 돼지도 채식주의자도 아닌 "돼지를 키운 자"에 찍혀있습니다. 이 책은 대안축산에 대해 고민하는 저자가 세 마리의 돼지를 사육하고 도축하기까지의 이야기입니다. 결론적으로 비거니즘에 대해 고민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저자의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애초에 브런치북 출판 콘테스트 입상작이니까요.

책의 내용은 모 농업학교에서 축산수업실습용으로 사육한 돼지에게서 태어난 새끼돼지를 데려오는 것에서 시작해 도축과 도축으로 끝납니다. 저자가 채식을 고민하고
실천했던 경험이 있어 "자연양돈"을 채식의 연장선으로 간주하는 듯 합니다. "먹는 자의 예의"와 비슷한 느낌이에요. 줄거리보다는 읽고 난 생각을 얘기하고 싶어요.

동물권운동에서 축산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비인간동물을 착취하고 살해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논쟁이 아니라 축산을 포함하는 동물 기반 산업의 미래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자의 말처럼 "서민의 고기"는 생존과 고통, 위생에서 눈을 돌려야만 얻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생존 또는 생계의 문제일테고요. 동물 기반 산업이 일시에 중단될 수는 없겠지요. 현실적으로 불가능함을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비거니즘과 동물권운동이 나아가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우리의 목표와는 별개로, 우리는 어디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동물복지산업은 정말 동물을 위한 일일까요. 저자는 공장형축산의 항생제사용, 집단살처분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축산시스템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요? 그 안의 윤리적 쟁점은 무엇일까요?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이래 오래도록 다른 종을 죽이고 먹는 것을 넘어 지배하고 착취해왔으니 그 역사의 시간만큼 이 문제를 풀어가는 일도 어렵습니다. 당장 답을 내리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진짜 문제는 여기에 사람도 비-사람 동물의 목숨도 한꺼번에 달려있다는 데에 있지요. 다만 먹히는 대상과 먹는 사람은 이 문장에서 드러나듯이 "대상"과 "사람"의 관계인 이상, 동등할 수 없습니다. 기본적인 불균형에 기반한 관계니까요. "살아있는 동안 존중받고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가축과 인간이 지난 수천년간 평화로웠듯이 말이다."는 말은 먹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생명을 빼앗는 일에 평화로움이란 존재할 수 없어요.
나의 생계와 타자의 생존이 물러날 방도가 없이 맞닿아있을 때, 우리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저자의 "먹는 윤리"에 앞서, 당장 생계가 달려있지 않은 이들에게 묻고싶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이 타자의 생존에 영향을 미칠 때, 무엇을 말하고 또 선택할 수 있을까요.
책에 대한 감상은 여기까지입니다. 답을 내려주기보단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책이에요. 많은 에세이와 타인의 삶이 그러하듯. 다만 저자가 스스로 "축산의 윤리"를 이야기하기엔 시도가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었고,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는 폭력과 불필요한 가해가 동반되었다는 점과 어떤 식으로 고통을 가했는지를 이렇게까지 공들여 쓸 필요가 있었나 싶은 부분은 상당히 아쉽습니다. 미숙함으로 인한 실수라고 해도 결국 머 출판 이전의 경험으로 같은 시도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동물권과 비거니즘에 대해 심도있게 고민하길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이 책은 돼지도, 채식주의자도 아닌 "돼지를 키운 자"의 이야기입니다. 대안축산의 경험이 궁금하셨던 분은 읽어보세요. 읽기에 그치지 않고 오늘의 "불편한 마음"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고민햄보시길 바랍니다.

*출판사 창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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