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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평점 :
한국문학 속 젊음의 표상은 수차례 변해왔다. 지금 우리 시대의 젊음은 어쩔 수 없이 이런 모습일지 모른다. 들척지근하고, 찐득하게 들러붙는, 시원하게 터져나오는 기침이 아닌 트름에 가까운 소리가 나는, 반투명하고 답답한 것. 말캉하고, 보드랍고, 희미한 빛을 가만히 품은 것.
상상해본 적 없는, 안정된 삶에서는 알아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 누군가에게 인생은 찬란하고, 말끔하고, 이해 가능한 무언가일까. 합판처럼 얇은 벽 너머로 스며드는 기침소리는 과연 실재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을까.
p.24 어쩌면 핑계에 불과할 것이다. 그냥 한 장의 종이일 뿐이다. 사람과 감정과 배경은 만질 수 없지만 사진은 손에 쥘 수 있다. 그것이 주는 안도감. 검은색 종이나 그냥 흰색 혹은 녹색 종이 한 장을 보면서도 같은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인생이 들어 있는, 어디서 더는 구할 수 없는 한 장의 종이다.
p.85 그날 내 작업 노트에는 미끈액과 물렁뼈가 더해졌다. 이런 메모들이 언제 작업이 될 수 있을까. 아이디어는 살아가는 힘이기도 하지만 빚쟁이처럼 나를 짓누르기도 했다.
작가 이지의 세계는 현실과 환상을 무시로 넘나든다. 엄마가 떠난 이후 '남자가 되었다'는 주인공, 우리에 들어가 동물 행세를 하는 사람, 사람같이 행동하는 동물들. 누구도 그것이 현재진행형인 한, 묻지 않는다. 지나치고, 일상이 되고, 바라보고, 다시 지나친다. 환상은 일상의 소음과 리듬에 묻히고 녹아든다. 이 작가의 세계에서 현실에 현실성은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금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운상가와 닮아있다. 언제나 재개발 진행 중인 세운상가. 부수고 짓고 다시 부수고 짓기를 반복하는 곳, 늘 어디선가 누군가는 떠나기를 요구받는 곳, 밀려나는 곳, 재생이 아닌 재개발, 자주 신축 딱지가 붙는 곳. 부서지고, 사라지고, 새로 만들어지는 곳에 가득한, 금세 사라지고 자주 치워지는 것들.
비현실적으로 현실적인 이 공간은 소설 바깥에서도 숨 쉴 수 있을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내지는 작가 스스로도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썼는가, 싶었는데, 마지막쯤 가서 묻게 되더라. 뭐가 그렇게 서러웠어. 뭐가 그렇게 슬프고 초라하고 또 외로웠길래 이런 글을 썼을까.
p.43 생은 어쩌면 음식과도 비슷하다. 모르는 음식은 영원히 그 맛을 알 수 없지만, 한번 맛을 본 것은 모른다고 할 수 없다. (...) 세상의 모든 전성기는 그 찰나다. 모든 것이 아주 잠깐 동안 딱딱 맞아떨어지던 그 순간. 우리는 모두 긴 어둠 속에서 아직 먹지 못한 음식을 기다리거나, 단 한 번 맛본 그 최고의 맛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그런 이유로 표지의 점 내지는 작은 사각형들은 꼭, 젤리 씹는 소리나, 입안에서 조각난 젤리를 닮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던 걸까. 그래서 세운상가의 청년들, 그들의 일상과 닮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걸까. 턱이 벌어지고 닫힐 때마다 짝, 짝, 소리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는 채 씹히지도 못하고 넘어가는 조각들이.
누군가는 죽고싶어요? 무심한 질문을 던지겠지만 정작 그들은 어떻게 살지, 를 고민하지 죽을 생각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p.102 세상에 무심한 듯 굴지만 가장 주목받고 싶어하는 게 아티스트라는 걸 그때 또 한 번 깨달았다. 욕망이 없다면 아무도 이런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욕망 안에는 '욕망 없고 싶다'는 욕망까지도 포함된다. 그래서 우리는 욕망을 욕망 없 음으로, 흥건함을 건조함으로, 매끄러움에 대한 갈망을 거칢으로, 주목받고 싶다는 소망을 무심함으로 위장한다. 모든 작업은 위장술이다.
p.207 사랑은 그렇다. 하리보 같은 것. 인생도 그렇다. 아무것도 아닌 것. 젤라틴이 들어간 젤리 같은 것. 모양은 악어나 새, 콜라와 딸기지만 그냥 그것은 입에 쫄깃한 젤리다. 엘과 나는 서로 바라는 것이 없으므로 욕망도 금지도 없었다. 그런데 끝나버렸다. 물론 어떻게든 끝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우리의 벌어져 있는 틈은 알고 있었고, 그것을 모르는 척했을 뿐이다. 나는 유예하고 싶었다. 언제까지고.
읽는 내내 지나간 노래를 번갈아 들었더니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느낌이다. 제3한강교, 아파트. 이 작품과 닮았다. 외롭고 모호하고, 우유부단하고 초라하고, 원하는 것은 있지만 번듯하지는 않은. 환상과 현실 어디쯤 발을 걸친 핑크스 핑크스, 아니, 핑크스핑크스처럼.
이리저리 치이고 밀려나다 에라, 하고 드러누워 있는 '청년'에게, 그래도 살거니, 정말, 하고 휴일이, 엘이, 형수가, 도도와 태유 그리고 민지가 묻는다면, 주저없이 고개를 끄덕이리라. 후줄근하고 초라한 비정형 가운데 여전히 꺼지지 않은 빛이 있으니.
결국 이 두루뭉술한 감상이 전부다. 근데, 사는 것도 그렇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가 필요한 짐승인 거잖아요.
p.241 우리의 멜랑콜리는 따뜻하다. 검지도 희지도 않은 재 같은 우울이 눈과 진흙처럼 쌓인 것은 재의 마을 때문이 아니라, 카페 수영장 때문이 아니라, 하리보 때문이 아니라, 핑크스핑크스의 죽음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이 불확실해서가 아니라, 그저 우리가 사람이라서다. 그리고 인생을 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살아온, 살고 있는, 살아갈 생 그 자체. 지분이 없어도 발이 떠 있어도 결국은 나의 삶이니까.
p.243 그래서 둘만의 우주가 필요하다는 것. 약하디약한 우리는, 눈과 진흙처럼 서로에게 스며들고 녹아 더러워진다. 약하디약한 우리는.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