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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저녁의 연인들
서윤빈 지음 / 래빗홀 / 2024년 4월
평점 :
흔히들 노년기를 '인생의 황혼기'라 부르곤 한다. 해가 뜨고 힘차게 활동하는 시간이 지나면, 지난 하루를 정리하고 가만히, 조용히, 부동과 무의식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처럼 인생을 정리하고 끝을 기다리는 시기라는 뜻일테다.
그렇다면, 나이는 들지만 영원히(적어도 이론상으로는) 살 수 있게 된다면, 성장을 늦출 수는 없으니 나이듦의 시간을 영원히 영원히 늘여가며 '젊은 노인'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면, 우리의 시간은 영원한 저녁에 머무는 것이 아닌가? 기약없이 늘어난 삶에서도 사람들은, 사랑을 할까.
다분히 한국적인 상상을 해보자. 인공 장기 기술의 발달로 "장기 구독 서비스(이것도 지독한 블랙코미디가 아닌가?)"가 보편화된 사회에서, 그 돈은 다 누가 대나? 그 때도 건강보험 제도가 버티고 있다면, 어떤 형태로 가난과 부를 구분해낼까?
p.52 임플란트 장기를 제작하는 회사들은 제각각의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는데, 가장 성공적인 캐치프레이즈는 이거였다. "고장 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치료다." 거짓말은 아닌 것이 이제 사람을 가장 많이 죽이는 것은 암이 아니라 심장 정지와 폐 정지다. 다른 말로 하면, 모자란 통장 잔고다.
비효율이 곧 사치인 세상, 삶을 즐기는 어리석음은 곧 돈인 세상, 치솟는 "생존 비용"과 정확하게 찾아올 죽음 사이에서 매 순간을 저울질해야 하는 세상, 푸르고 풍요롭고 어리고 넘치는 것을 기다리는 일은 상상조차 못할 부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그런 세상.
그런 세계에서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가난이 생존을 앞지르는 삶을 어떻게 버티고, 남겨지고, 외로워하고, 숨을 쉬고, 울고, 사랑할까. 그때도 이마를 맞대고, 뺨을 어루만지고, 속삭이듯 이름을 부르고 아낌없이 눈을 감을까.
p.12 인류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그 전까지의 인류가 만든 것보다 더 많은 정보를 만들어냈다. 옛날 영화들이 몇몇 명작을 빼고는 대부분 잊혔듯, 우리의 기억 역시 선명히 빛나는 새로운 것들만 남고 모두 사라져버릴 것이다. 세계지도가 생겨난 이후로는 아무도 오아시스를 그리워하지 않듯이.
p.111 임플란트 장기가 세상에 등장하기 이전 시대의 노인들은 세월만큼 침식된 몸을 이끌고 몇 킬로미터를 무작정 산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몸 안에 새겨진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 시대의 노화란 세금과 기억만으로 존재하는 건지도 몰랐다.
"남의 돈"이 살아있을 권리보다 먼저가 된다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무엇을 미워하게 될까. 머릿속을 속속들이 알아낼 수 있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세계에서 어떤 마음을 가장 먼저 버리게 될까. 한없이 길어지고 "유능해진" 삶에서 여전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사랑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생의 마지막을 바칠 사랑을 찾는 사람. 왜 그렇게까지, 라고 묻는다면, 두려워서, 외로워서, 다른 방법이 없어서. 삶의 마지막에는, 하루의 끝처럼, 누구나 머리를 쓸어주고 눈을 감겨주는 다정한 손길이 필요한 법이니까.
p.43 지저분한 옷들에서 모래 냄새가 났다. 어쩌면 사막의 모래 하나하나는 죽은 이들의 흔적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구가 점점 사막화되는 건 단지 이상기후 때문만은 아니리라.
p.123 성아는 아이들의 세계에 어느 날 갑자기 밤이 찾아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아이들의 세계에 밝은 빛을 비추려고 노력했다. 광합성만 잘 시키면 나무가 빨리빨리 자라 존재통 없이 어린 시절을 졸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을 믿지 않는다 하겠지만, 누구보다도 사랑의 절실함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일테다. 깎여나갈 부분이 누구보다도 먼저 부서지고 닳아버린 사람일테다. 통각에 민감한 사람, 자기 안의 연약함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살기 위해 돌변한 형태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안에도 권력이 있다. 중간에서 이문을 떼먹는 이가 있고, 보다 나중에 죽을 사람이 먼저 죽을 사람을 등쳐먹고, 믿지 않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속인다. 이런 세계에서 발버둥치는 것은, 뜨겁게 쿵쿵 울리는 심장은 멍청한 짓이다. 아파하는 것은 사치이다.
로맨스라고 봐도 좋을까. 제목은 연인들이지만, 내용은 무겁고 흐릿하다. 꼭 저녁처럼, 손을 뻗어 더듬지 않으면 서로의 표정을 알 수 없는 시간처럼.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생겨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이 살았고, 슬퍼하고, 무언가를 깨달았으며, 누군가는 그를 기억할 것이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p.231 138억 년은 모든 과거를 잊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긴 시간이다. 고작 100년씩 살았던 기억을 모아 138억 년을 채우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기억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