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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과 정전
오가와 사토시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24년 3월
평점 :
지겹도록 해온 말이지만 사람의 바깥을 상상하는 글은 사람의 이야기다. 사실 사람이 쓴 글 중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게 얼마나 되겠냐만은. 사람-너머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이야기는 사람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강하게 부각한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픽션만큼 현실과 단단히 연결되는 장르는 없다.
세상에 좋은 작품은 수없이 많겠지만, 기분 좋은 허탈함과 함께 패배를 인정하거나, 정신없이 말려들어가 덮을 때쯤엔 훌쩍훌쩍 울게 하는 작품을 만나는 건, 일종의 행운 같은 것이다. 단순한 얄미움을 넘어 "마음을 탈탈 털어먹혔다"고 말해도 좋을만한 수작을 만난다는 것은.
거칠게 말해, 썩 옳다고 생각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이거 순 미친놈 아니야?"를 끌어내는 캐릭터, 전개, 설정, 작가를 만나는 경험은 뭐랄까, 독자의 세계 저 깊은 곳을 바꿔놓는 일이 아닐까.
p.33 "정확히 말해서 타임머신이 가짜라는 전제하에 생각했을 때 유일하게 합리적인 트릭이었다면... (...) 다케무라 리도는 천재야. 마술사상 최고의 천재. 이런 트릭을 고안해서 실행에 옮기는 건 천재 아니면 미친 사람밖에 없어. 만약 그 사람이 천재가 아니라면..." 누나가 그다음 한 말을 나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타임머신이 진짜였다는 거지."
사실 일본 작가의 추리소설, 적어도 아 이건 일본 소설이다, 하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나는 작품을 그다지 기꺼워하지 않는다. 분명 '좋아하지 않는다' 와는 다르다. 오히려 촘촘한 묘사와 집착적으로 느껴질 만큼 밀착된 서술을 아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추리력, 개중에서도 독자의 예상과 시야를 뛰어넘고 빈틈을 찌르는 내용이라면? 좋다. 아주 좋다. 그와 별개로 약은 오른다. 열받아...! 좀 더 솔직히는, 니가 언제 그랬어! 언제 어디서 몇 시 몇 분 몇 초!!! 하고 바득바득 우기고 싶어진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 질문(보다는 억지겠지만)은 과연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언제 어디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어디가 앞이고 뒤인가? 언제를 시원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p.106 "세상의 시간으로 따지자면 대략 이십 몇 년 뒤, 당신이 첫 승리를 거둔 밤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지난번 뵈었던 것은 미래 같지요. (...) 그러나 ‘미래’란 없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지난번도, 이번도, 그 지하실에서 보낸 밤에서 보면 둘 다 과거입니다."
작가는 여섯 편의 단편을 통해 묻는다. 한 존재와 "역사"를 꿰뚫는 거대한 시간의 경계를 일순에 무너뜨린 텅 빈 곳으로 독자를 초대해, 아니, 끌어 앉혀 묻는다. 당신은 단 한 번의 기적같은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습니까? 남은 일생이 아닌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두를 뒤틀어 바꿔버리는, 단 한 번, 순간의 도박을 위해.
죽은 자는 말이 없으나, 남겨진 것은 말을 하지요. 존재가 맞닿아 연결됨으로서 전해지는 것은 무엇을 말할 수 있습니까? 목적이 앎에 선행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의 단서를 따라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똑같은 개성을 추구하는 세계에서 낭만을 지켜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찰나의, 아주 작은, 단 한 번의 신호가 바꿔버리는 거대한 역사를, 배아의 잠재태로 파고 내려가는 상상조차 못 할 이 기획을, 존재의 가능성을 걸고 맞부딪히는 싸움에서 당신의 당연함은 어느 희미한 가능성과 우연의 조합임을 알고 있습니까?
"제 이야기를 들은 당신은 시간의 개념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했듯 픽션은 사람의 이야기, 현실의 틈새를 벌리고 비트는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에게 아주 반가울 책이다. 그러나 말랑말랑하다거나 설레는 내용은 절대 아니라, 뭐랄까…
충격을 넘어서는 경악과 감동을 야 빨리 집어넣어!!! 눈치채기 전에 비벼!!! 흔들어섞어!!! 짠!!! 해서 저쪽 작가분께서 보내시는 겁니다, 하고 쓱 밀어주는 느낌이랄까. 분명 신기하고 즐겁고 맛도 있는데 어째 한구석이 찜찜한... 거 가진 것 좀 다 보여봐요. 수상한 놈일세, 싶은 동시에 우리 이제 친하죠? 또 볼거죠? 기대하게 만드는 작가랄까.
전체적인 흐름이나 메인 테마가 추리소설이냐, 하면 꼭 그것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 소설이냐, 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고 하겠다. 혹 SF냐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다고 답할 수도 있겠다. 어쩌면, 혹시나, 표지에 눈길을 붙잡혀 "대체 이게 뭐냐?"고 묻는 이에게는... 뭐긴 뭐예요 심연이지... 와 함께 눈을 피할 수밖에.
여러모로 참 수상쩍고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단언컨대, 즐겁다. 이 작가가 열어젖힐 시공간으로 언제든 주저없이 뛰어들고 싶을 만큼. 여름이 오기 전에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이 모든 말은, 당신의 과거에서, 혹은 미래에서, 어쩌면 존재하지 않았던 현재에서 기록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출판사 비채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