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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은빛 눈
이요하라 신 지음, 김다미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평점 :
보이지 않는 것은 닿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알지 못하는 것은 쉽게 짐작된다. 나에게도, 남에게도.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 사람의 존재가 그러하다.
유난히 견디기 힘든 날들이 있다. 사람 흉내를 내고 있다고 느낄 때, 여긴 내 자리가 아니라고, 사실 그런 건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느낄 때. 돌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이대로 영원히 떠돌며, 주변인으로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숨이 턱 막혀올 때.
부적절감, 어울리지 못하는 느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수치심, 그리고 자괴감. 중심과 정상으로부터 밀려나있는 사람들, 외로운 사람들. 주변인, 2류인간이라는 뼈아픈 모멸감.
p.19 다 됐고, 이제 더 이상 '당신은 필요없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상처받고 싶지 않다. 더는 못 참겠다. 다른 것보다 이제 두 번 다시 면접 같은 건 보고 싶지 않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소리내서 크게 울지도, 악을 쓰며 발버둥치지, 차마 애꿏은 데에 분풀이를 하지도 못하는 보통의 사람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세계만큼이나 잔잔한 이야기. 쓸쓸하지만 따뜻한 문장들은 가만히 등을 받쳐주고 손을 잡아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런 부분이 일본소설다운 면이려나. 잔잔히 흘러가는 일상, 아침으로 시작해 밤으로 끝나는 하루, 그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울분, 좌절, 외로움, 그리고... 무능감.
그 모든 울음, 채 눈물이 되지 못한 두려움과 서러움과 외로움을 끌어안는 품, 눈을 감고 고개를 기대라는 손짓, 더는 혼자 두지 않겠다는 다짐, 너도, 나도.
p.60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나한테 말해줬으면 싶었다. 너는 너 나름대로 열심히 해왔구나, 하고.
p.92 독자들은 주인공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초인적인 힘과 캐릭터에 빠져들 것이다. (...) 주연급 이외의 인간은 너무나 쉽게 목숨을 잃는다. 자신의 인생이나 사정은 단 한순간도 조명받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의 사정으로 살해당하는 이들. 그리고 나는 말할 것도 없이 간단히 죽는 쪽의 인간이다.
세상에 주먹질을 하지 않고도 위로할 수 있다고, 이해하고 함께 설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안일함으로 충분히 물러난 태도인가. 이 또한 방관인가. 그럼 어떤가, 우리는 이렇게 작고 무력한 존재인 것을.
인간애를 녹여낸 미스터리, 라는 소개에 잠시간 망설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사람의 마음, 그 바닥을 의심케하는 장르가 인류애도 아니고 인간에를 끌어안는 시도를 했다고?
첫 작품을 읽자마자 느꼈다. 미스터리가 꼭 무서울 필요는 없다. 괴로워하고 두려워하는 동시에 이렇게, 작게 웃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도 우리 종족의 잔인함과 어리석음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절망을 안겨줄 수 있지 않은가.
p.264 "문제는 우리 인간이 대단한 위험을 동반하는 방법이나 사악한 방법도 생각해내고 만다는 겁니다. 생각해낸 이상 그것을 실현하고 싶다는 호기심을 누르기 어려운 법입니다. 그리고 일단 그 위력을 알게 되면 쉽게 버릴 수 없지요. 헤매면서도 그때그때 변명을 찾아내서 결단을 뒤로 미루고 계속 사용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파멸적인 피해가 발생한 뒤에도요. 가장 바보 같은 예가 핵무기이고, 가장 무책임한 예가 원자력발전입니다."
희망은 모든 것이 술술 풀려나가는 행운에 있지 않다. 고난조차 알지 못하는, 모든 것들을 무심히, 당연하게 받아먹는 삶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고독과 좌절, 연민과 낯선 이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말의 힘을 믿는다.
보이지 않는 저 깊은 곳에서 소리없이 내리는 눈,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나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한 믿음, 희망. 그 앞의 작고 작은 인간에 손을 내미는 일, 그것이 문학의 힘이라면 힘일 것이다. 나는 이 손길의 미약한 힘을 믿는다.
"지구 중심에 소복이 쌓여가는 은빛 눈. 내 안에도 뭔가가 내려서 쌓이고 있을까."
p.68 "맞아, 연구도 사람 흉내에서 시작이에요. 과거의 연구, 누군가의 방법, 많이 공부하고 똑같이 해봐요. 잘 안 되는 부분, 더 잘 하고 싶은 부분, 반드시 생겨나요. 그러면 궁리하죠. 그렇게 해서 조금씩 진보해요. 정말 조금씩. 당신 일도 똑같죠?"
p.230 "그래도, 대단한 건 내가 아닙니다. 자연이죠. 이렇게 작고 이렇게 정교한 유리그릇을 만들어냈으니까요. 나는 그저 인간이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유리 예술품을 줍고 모을 뿐, 자연을 빌려서 내 작품으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