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신명은 여자의 말을 듣지 않지
김이삭 지음 / 래빗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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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이런 세상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느꼈는가. 수도 없이 많은 순간이 있었다. 대놓고 무서우라고 만들어진 귀신이며 괴물보다 인적 드문 길에서 마주친 사람에 더 큰 공포를 느꼈을 때, 침대 밑의 사람과 귀신 중 어느 쪽이 무섭겠느냐는 농담에 차마 웃을 수 없었을 때.

택시기사의 불쾌한 언동이나 위협에 웃으며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을 때, 폭력을 애정으로 여기라, 한 술 더 떠 감사하라고 강요당했을 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도리어 나를 해칠 이가 아닌지 겁부터 낼 때, 술 취한 이가 한참동안 문을 두드린 날 이후로 며칠동안 온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을 때.

이런 세상에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나를 보호하는 쪽으로 향한다. 여름밤 산책을 포기하라고, 한적한 숲길에 가까이 가지 말라고, 낯선 도시를 여행하는 건 꿈으로만 간직하라고, 굽이 높은 신발을 신지 말라고, 몸을 가리고 상냥하게 굴라고. "나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면".

p.12 안전한 곳으로 보여달라고 하니까 부동산 사장이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제가 만족할 만한 집은 없을 거라고,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하겠대요. (...) 때가 안 맞는 걸 어쩌겠냐면서 꼭 구해야 하는 거면, 기준을 좀 낮추래요. 집은 안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걸 포기한 집이 어떻게 집이냐고요.


그들의 걱정과 사랑은 쉽사리 모욕이 된다.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무시받고 언제든 해코지당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폭력은 너무나도 일상의 것이기 때문에 거의 아무도 분노하지 않고 자연스레 잊혀질 것이기 때문에.

이것만 피하면, 이 시간에만 돌아다니지 않으면, 이런 것만 참으면, 나만 조심하면, 이렇게만 하면... 조금씩 조금씩 세상으로부터 물러나기를 요구받는 일, 손가락질을 피하고 순종하기를 강요당하는 일. 그것은 결국 나의 발밑까지 무너뜨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한다. 침묵. 존재감을 지우고 없는 존재가 되면 안전할 수 있을까.

p.70 예전에 엄마가 그런 말을 했었다. 엄마가 살아남은 건 두려움과 불안 그리고 공포 덕분이라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 주저 없이 도망쳐야 한다고.

p.106 예원은 자기가 괴담을 즐겼던 건, 괴담 속 상황을 자신이 겪을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일종의 안전한 공포랄까. 즐길 수 있는, 안전한 공포. 하지만 그 일을 겪은 뒤로 더는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그래서 무섭다고 했다.


결코 온전한 사람으로 대우받을 수 없다는 모욕을 두고두고 확신으로 퍼붓는 사회에 살아가는 매 순간마다. 더는 살고 싶지 않다고 느낀다. 이런 세상 따위 지켜질 가치도 남아있을 이유도 없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순히 끊어버리지 않는 것은, 억울하기 때문에. 나는 나에게 여전히 온전한 사람이기 때문에.

다섯 수록작의 주인공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그곳에서 나고 자랐든, 이주해왔든, 그들은 영원히 이방인이요 주변인이자 잠재적인 추방 대상이다. 쉽게 내쳐지고 버려질 존재들이다. 그들의 존재는 "허락받지 못함"에 기인한다.

그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순순히 죽어나가기를 거부한다.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 지긋지긋한 세계에서 조용히 사라지기를 거부한다. 그들이 사수하는 것은 이름, 존재, 삶... 그 모든 것이다. 누구에게나 당연하듯이. 누구에게나 마땅한 권리이듯이.

p.219 무예에는 무도가 있었지만, 세상에는 도리가 없었다. 무예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면, 세상사는 다른 이와의 싸움이었다. 남을 짓밟으며 그 위에 서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세상이었다. 그와의 싸움에서 나를 지키려면, 그를 짓밟아야 했다. 그가 나를 짓밟으며 승기를 거머쥐고 있는 것처럼, 나도 그를 짓밟아야 했다. 그것이 그로부터 나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들의 분투는, 혹자에게는 허무한 상상, 또다른 이들에게는 슬픈 현실이리라. 나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나는 언제나 그래왔다고. 그러니 "세상 바깥에 있는 이들이 새로 있을 자리를 마련했다. 일그러진 질서의 틈을 메꾸던 이들은 외면당하거나 잊히지 않았다.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아도 용기는 남(289)"는 이야기가 기껍지 않을 리 없다고.

괴담의 규칙은 순응하지 않는 이에 대한 징벌이요 경고다. 이대로 죽지 않는다. 권력과 사회가 공모해 짓눌러 죽이려는 이들은 세계 그 자체를 부수고 뛰쳐나온다. 이방인, 약자, 여성들이 그 규칙 자체를 부술 때, 이전의 권력과 세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곳에 늘 있었던, 사라지기를 거부할 세계.

기꺼이 맞이하라. 자리를 찾는 이들을, 맞잡고 연대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손을, 분노를, 마주 응시할 눈을, 후려치고 뿌리치는 팔을, 다리를. 더는 모욕당하지 않을 이름을.

p.99 "우리 엄마가 예전에 그랬거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가야 할 때도 있지만, 가끔은 너 죽고 너 죽자는 마음으로 맞서야 할 때도 있다고."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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