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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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뭘까. 사랑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구질구질하게 만드나. 사랑의 순간은 끊임없이 묘사되어왔다.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꿈결같이, 때로는 절절하고 또 고요하게.

운명같은 사랑을 믿나요, 누가 내게 묻는다면, 코웃음을 치고 단칼에 부정하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마법같은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단 한 사람에게 쏟아지고,
태초부터의 모든 순간은 그 사람을 위해 이어져왔다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임을 예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고, 그렇게 믿는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한겨울 크리스마스 파티, 모두가 반가움에 소리 높여 인사를 주고받는 가운데, 아무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숨어든 곳에서 운명을 마주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나또한 이 한 마디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고. "나 클라라예요".

p.15 우리의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서 밝혀지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부터 움켜쥐어지고, 도저히 낯선 사람일 리 없지만 그녀가 낯선 사람밖에는 무엇도 아니기에, 오늘 밤 나는 네 삶과 삶의 방식에 네가 쓰는 얼굴이야. 오늘 밤 나는 너를 돌아보는 세상을 향한 너의 눈이야, 나 클라라예요 하고 말하는 시선으로 우리의 눈길을 붙드는 사람 때문에 끝내 실재가 되고 빛나게 된 우리의 삶.


대단히 오랜 시간도, 서로의 지난 삶을 귀띔해줄 접점도, 동화같은 순간도 타오르는 쾌락도 없는 일주일의 시간에 어째서 이렇게나 초조해지고 애달파지는 걸까. 그렇게 읽히기를 바랐기 때문일까. 우리의 세상에는 사랑받는, 마법같은 순간이 필요하기 때문일까.

존재의 경계, 무엇으로도 넘을 수 없는 한계로 인해 우리는 타자를, 그의 세계를 갈망하고 하나가 될 수 없음에 좌절하게 된다. 영원히 알 수 없는 진심, 영원한 미지의 영역.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약자다. 어떤 사랑은 세계의 중심을 내어주는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p.169 왜 나는 오늘 밤 이렇게 행복할까요? 나는 묻고 싶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와 사랑에 빠지고 있고 우리는 그게 벌어지는 걸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 둘이 함께. 슬로, 슬로모션으로. 누가 알겠어요? 당신은 묻는다. 내가 알죠.

p.307 나는 어쩌면 우리를 한데 모아준 것은 어떤 갈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똑같이 은신하고 싶어서 절박한 사람, 매우 적은 것을 바라고 상대가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상당한 것을 내어줄 수도 있는 사람과 함께 은신하고 싶은 갈망.


기어코 빈 손을 내보이게 하는 것, 초라해지는 것, 키득거리는 웃음을, 잔인한 조롱을, 둘만의 속삭임을, 이해할 수 없는 벽과 속절없이 사랑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것, 그 모든 것이 두려움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여전히 너무도 사랑하는) 작가 맥스 포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고. 그러니 사랑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죽음에 대해 숙고하는 것과 같다고.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싶기에, 사랑은 곧 두려움이기도 하다고.

p.436 "왜 내가 당신을 믿지 않는데요? 말해줘요." "정말로, 정말로 내가 말해주면 좋겠어요, 빈달루 씨?" "네." "왜냐면 내가 당신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걸 당신은 아니까."

p.540 클라라. 나 거짓말하고 있었어요. 나는 실망하는 게 무섭지 않아요. 나는 내가 가질 자격이 없으면서 가지게 될 터라거나 매일 가지고자 분투하는 법을 배우기는커녕 가진들 뭘 할지 모를 터였을 것이 무서운 거예요. 그리고 맞아요. 당신이 나보다 나은 사람일까 봐 무서워. 내가 오늘 밤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일 더 사랑하게 될까 봐 무서워. 그렇게 되면 내가 어디에 있게 되겠어요?


비단 물리적 죽음이 아닐지라도, 상실은 죽음과 맞닿아있다. 어떤 이를 삶에서 떠나보내는, 혹은 그렇게 되는 것은 그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상실의 공포, 자신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그러니 눈물로 얼룩지고 애원하게 되는 것, 그또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 한가운데서 드디어, 마침내 마주한 순간에, 다시금 아, 얼빠진 웃음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 아닐 리가 있나. 사랑받는 것, 사랑하는 것, 다시금 용기내어 손을 뻗는 것, 그 마법같은 순간. "이거 꿈만 같네요. 게다가 새해가 막 시작됐어요".

p.683 나는 그 단어를 한 번도 말하지 않지 않았는가? 눈에다가는, 밤에다가는, 공원의 동상에다가는, 내 베개에다가는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단어를 말할 것이다. 내가 당신을 놓쳐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클라라,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놓쳐버렸기 때문에, 내가 당신과 영원을 보았기 때문에, 사랑과 상실 역시도 틀림없는 동반자이기 때문에.

p.766 우리는 다같이 성 요한 대성당으로 갈 건데, 우리랑 같이 갈래요? 그리고 내가 답할 겨를도 없이 누군가 샴페인 잔을 내게 건넨다. 나는 그 손목을, 당신의 손목, 당신의 손목, 당신의 달콤한, 축복받은, 하느님이 내린 내가 숭배하는 당신의 손목을 알아본다. "이스트 아인 트라움, 이거 꿈만 같네요." 그녀가 말한다. "거기다 새해가 막 시작됐어요."


*도서제공: 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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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길 잘했어
김원우 지음 / 래빗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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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살다 이렇게 뻔뻔한 소설은 처음 본다... 아무리 "SF는 이왕 치는 뻥, 통 크게 쳐야 제 맛"이라고 말해왔다지만 이렇게까지 냅다 던져놓고 왜요? 불만있어요? 사측이세요? 하는 건 처음 봤다는 말이다.

기가 막히게 웃기고 찌질하고 나약한데다 쉴 새 없이 삐끗하는 게 아주… 절로 얼굴을 붉히게 하는 주인공들, 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결국에는 해야 하는 것, 포기할 수 없어 다시금 돌아서고 일어서야 하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것, 수없이 다치고 깨져도 사랑했음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

사람을 믿는다, 사람이 가진 마지막의 마지막, 그 희미한 가능성을 믿는다고 항상 말한다. 그것은 어떤 초인이나 대단한 영웅적 능력이 아니며 선명하고 흔들림없는 의지도 아니다. 오히려 후회하고 당장의 욕심과 두려움에 쉴새없이 흔들리는, 부서지기 쉬운 마음이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p.11 21세기에 태어난 저 아이들은 죽음과 텔레비전에 대한 내 말을 이해할 수 없겠지. 텔레비전이 꺼질 때 가늘고 긴 하얀빛이 반짝인다니. 저 아이들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어지러이 점멸하는 우주배경복사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138억 년 전에 태어난 그 빛. 디지털 텔레비전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빛.


수없이 말해졌듯이, 세상은 더럽고 희망은 연약하다. 어떤 목숨은 너무 쉽게 사라지고 어떤 삶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부서진다. 소란스럽고 분주한 세상에서 조용하고 소심한, 좁은 길로 흘러가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손쉬운 길은 일하다 죽는 사람의 피로, 무고한 사람을 가두는 밀실로,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의 눈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진부하고 처량맞을 정도로 연약한 희망을 놓지 못하는 것은, 게다가 때때로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가 되는 까닭은 대체 무엇인가.

p.124 "사고가 나면 길이 막히는 이유 중 하나는 사고 현장 옆을 지날 때 사람들이 속도를 늦추기 때문이잖아요. 서로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단지 구경을 하기 위해 속도를 늦추기도 하더라고요."

p.278 이 세상은 엉망이고 나아질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아. 고장난 건 핸들인데 사람들은 자꾸 바퀴만 고치려고 들어.


거대하고 무자비한 폭력, 이해할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은 악의와 "레귤러와 노말의 세계 "에서 밀려났다는 수치심, 패배감. 그 모든 것들을 "사랑의 힘!"으로 물리칠 수는 없겠지만, 기껏해야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하다 찌그러져선 한동안 이불이나 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다고 울며불며 발을 구르다가도 멈칫하게 하는 것, 차마 어떻게 할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돌아서게 하는 것, 조금쯤 유치하게 으쓱이도록 하는 것, 결국에는 똑같은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 그 모든 것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나는. 인간의 것만이 아니더라도.

p.165 생각이 굳어지면 집착이 된다. 현실은 파도 앞의 모래성이고 생각은 수십 년에 걸쳐 건설된 대성당이다. 내부에 침범하는 것들을 신성모독이라도 당한 것처럼 거부한다. 그 단단한 벽이 무너진 이유는, 맞아. 그랬지. 등 떠밀려 시작된, 연민이나 동정에서 시작된 사랑은 잘못된 걸까.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짓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p.380 두렵지 않은 것들도 생겼어. 더 이상 유령이 무섭지 않아. 나이가 든다는 건 죽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겁에 질리기에 앞서 반가운 얼굴이 아닐까 기대하게 된다는 것 같아.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아. 나를 두렵게 하는 사건들을 꾸미는 인간들이 두렵지 않아. 그저 화가 날 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단한 힘을 지닌 "주인공"도 없고, 다들 눈물 콧물 아이고 두통이야 하기 바쁘기만 하다. 그러나 이것은 영웅의 이야기다. 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바닥부터 기어올라갈 것이다. 밟고 일어서기 위함이 아닌, 손을 내밀고 맞잡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느다란 심지같은 것, 끊어지고 부러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 것, 희망, 사랑, 구닥다리 낭만, 부질없는 것. 그래. 이 작가의 글에는 낭만이 있다. 초라하고 구질구질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을 울리는 것,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로 그것으로 산다.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것들로.

p.86 "미래 씨. 우리는 실패했어요." 그리고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그 실패를끝이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두통은 사라졌다. 멀리서 시작된 함성이 이내 거리를 휩쓸었고 바라는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걸음들이 이어졌다.

p.254 원래 그런 건 없다. 현재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내가 미래를 고를 수 있다면 모든 게 뿔뿔이 흩어져서 밤하늘에 별도 없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미래보다는 개들이 뛰어노는 미래를 고를 것이다.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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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여자, 작희 - 교유서가 소설
고은규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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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이런 말은 본 적이 있다. 어렸을 땐 누구나 화가를 꿈꾼다고, 그러나 자라서도 그리는 사람만이 화가가 된다고.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모두 청자로 태어나 독자가 된다. 이것은 감각의 문제가 아니다.

주어지는 대로 수용하던 존재가 자기만의 서사를 쌓는다. 최후의 영역, 그 어떤 존재도 침범할 수 없는 세계, 내면의 이야기가 차올라 형태를 갖추고 마침내 범람하는 것, 그것이 이야기이다. 그것을 풀어내는 이가 작가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 글에는 힘이 있다.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안타깝게도 그만한 힘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그런가? 침묵은 쉽다. 침묵하게 하는 것, 쓰지 못하게 하는 것은 더 쉽다. 그러나 '쓰기'의 원천을 말살하기란 쉽지 않다. 열망은 힘이 세다. '써야만 하는 마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약자란 무엇인가. 쉽게 사라지고 지워지는 자다. 그렇게 여겨지는 자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약자는 약한 자인가? 뺏길 것이 거의 남지 않은 이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기를 요구받을 때 순순히 빼앗기는가? 사람을 삶의 경계밖으로 밀어내는 일은 그렇게나 간단한가?


"그"의 도둑질은 문학혼이다. 열정이요 온갖 사연을 방패처럼 휘감아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지사다. 연민의 대상이자 사소한 오점이다. 반면 도둑맞은 "그녀"의 분노는 한갖 발버둥에 그친다. 치사스런 투정이다. 대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감정적

빼앗김에 익숙한 이들은 안다. 그렇게라도 악을 쓰고 지켜내지 않으면 내 것은 이름조차도 존재하지 못할 것을. 그런 연유로 "그녀"의 이름은, 정당한 주인이자 한 사람으로서의 그의 이름은 역사에 남지 못했다. 하다못해 반역자, 반동분자로도.

이것은 완전한 패배를 시사하는가? 지겹도록 들어온 "현실"의 재현인가?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닐 수 있음에서 시작한다. 너무도 뛰어났으므로, 그러나 순종하고 침묵하기를 거부했으므로 지워졌다. 어떤 공백은, 어떤 '부정'은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존재를 증명한다. 지워졌으므로 지워지지 않는 것이 있다.

p.125 작희가 수저를 놓은 후 트림을 하자 탕국집에서 밥을 먹던 남자들이 무슨 연유인지 '되바라진 년'이라는 소릴 했다. 남자도 대동하지 않고 그것도 여자 혼자 아무 거리낌 없이 밥을 먹는 게 그들 눈에는 속이 뒤틀릴 정도로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작희는 남자들을 경멸하는 눈으로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되바라진 년이면 당신들은 여자나 깔보는 치졸한 놈들이겠지.


나는 여기서 다시 묻는다. 결국에는 누가 "약한 자"였느나고. 고고한 명예로 담장을 쌓는, 제 말을 하는 여자를 집안에 처박아놓고 주먹질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속이고 훔치지 않으면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닌, "모던 걸"을 욕하고 후려잡는 그러지 않으면 어떤 자리도 내지 못하는 "그들"은 강자였는가.

목숨을 걸고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 차마 버릴 수 없는 것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부, 누군가에게는 쾌락, 누군가에게는 영예,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글. 쓰는 것.

유사 이래 글쓰기가 좋은 밥벌이 수단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좋은 글이 그 자체로 인정받은 경우는 드물다. 즐거운 글쓰기, 쓰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은 무시로 굶어죽고 밀려나 입을 닫고 붓을 꺾었다. 그만둘 수 밖에 없었다.

p.244 "우리는 무엇을 위해 쓰려고 하는 걸까요?" 나는 남은 힘을 쥐어짜 가까스로 작희에게 물을 수 있었다. 작희는 대답 대신 슬픔을 이기지 못하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릴 뿐이었다.


그렇게 지워진 이들의 이름을 불러낼 수 있을까? 지워지고 덧씌워진 자리에서 희미한 흔적을 찾아낼 수 있을까? 본래의 것, 설명할 수 없는 것, 기가 막혀 말이 되지 못하는 것을.

이 책은, 작은 정의다.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이다.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에 이대로 끝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설사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괴로워도 충분히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글만 쓸 수 있다면 그 어떤 고독이라 해도 친구처럼 곁에 두고 오래오래 쓸 터"인 이들의 흔적이다.

이름을 돌려주는 것. 쓰려는 여자를 쓰는 여자로 두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아무도 모르게 두지 않는 것, 그럴 수 없는 것. 시간을 넘어 시선이 맞닿는다. 바람이 분다. 멀고 오래된 곳으로부터.

p.290 살기 위해 밥을 먹는 것조차 비루하게 느껴진 적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티나 싶은 날도 있었다. 문득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날도 있었다. 그러나 작희는 한 번도 목숨을 버리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꼭 살아야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쓰고 싶은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제공: 교유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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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이데올로기 - 수저 계급 사회에 던지는 20가지 질문
조돈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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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경제면 기사를 잘 보지 않게 되었다. 보더라도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만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크게 한 뒤 재빨리 쓱쓱 읽은 뒤에 덮어두고 다시금 숨을 고르는 식이다. 첫째 이유는 속된 말로 빡쳐서...고 둘째는 이 "경제"가 누구 입장에서의 "경제"인지가 너무 뻔해 도무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항상 의문이었다. '떨어질 콩고물도 없는 자들이 똘똘 뭉쳐도 모자랄 판에 왜 저렇게 재벌에 이입하지 못해 안달인가'? 다시금 시작되는 질문. 어째서 이 극심한 빈부격차의 사회에 저 비논리적인 믿음이 일종의 진리 내지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자리하고 있는가?

조금 돌아가보자. 한국 태생의, 이주배경이 없는 환경에서 자라나 한국 바깥의 삶, 비주류의 경험을 하지 않았던 이라면 '다름'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종종 한다. 실질적으로는 섬인 국토, 인접국의 그것과 소통이 어려운 언어, 비교적 "단일한" 인종을 상정하는 전체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이념 교육. 그 모든 것들이 다양성을 경험하고 체화할 기회를 가로막는다.

사회 구성원들이 다양한 배경과 사회경제적 계급에 속한 이들과 뒤섞이는 경험이 부족하다. 징집대상 집단은 "군대에서 온갖 사람 다 만난다"고 여겨지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은 환경이다. 삶의 전반에서 마주치고 알아차릴 기회 자체가 적고, 있다고 한들 실제적인 경험으로 와닿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파편화된 사회' 라든지, '개인주의 세대'나 '좁은 식견' 따위로 치환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사회적 안전망과 공생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불평등한 계급체계 바깥을 상상할 능력마저 잃은 꼴이 작금의 우리 사회인 셈이다.

전국각지에 공실이 남아도는데도 "내 집 마련"이 인생 목표인 사회, 평생을 벌어도 노후를 장담할 수 없는 사회, 아무리 발버둥쳐도 "타고난 수저"를 뛰어넘을 수 없는 사회, "어린이 재벌"의 이자소득이 평생을 노동한 숙련공의 전재산을 뛰어넘는 사회는 분명 제대로 돌아가는 사회가 아니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도, 실력과 자격의 문제도 아니다.

p.38 반세기 동안의 고속 경제 성장을 통해 1인당 GDP가 미국 달러 명목 가치 기준 30배나 상승했지만 생활 수준이 그만큼 상승했다고 실감하는 국민은 많지 않다. 국민소득 총액은 크게 팽창했지만, 소득 분배가 불평등하다면, 경제적 풍요의 혜택은 일부 고소득층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불평등은 주관적 판단이 아니라 객관적 실태의 문제다.

p.83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피지배계급을 상대로 지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피지배계급이 수용하여 사회 전체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배계급은 기존의 계급 역학관계와 함께 자원의 분배•재분배 구조를 유지하며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현대와 같은 형태의 자본주의-시장경제의 역사는 생각만큼 길지 않다. 사유재산의 범위가 기초인권과 생존, 사회적 안전망까지도 침범하는 횡포의 뿌리는 기대만큼 깊지 않다. 그 말은, 이 체제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뜻이다. 타들어가는 도화선에 모른척 눈 돌리고 있는 사회는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다. 분노는 힘이 세다. 공분이라면 더더욱.

"못 살겠다. 갈아보자". 익숙한 구호다. 그러나, 가능한가? 지금 우리 사회는, "기회는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가? 국가는 정의의 편인가? 그 "국가"는 누구의 목소리로 말하는가? 다시금, 우리 사회는 진실로, '이렇게는 못 살겠으니 갈아볼' 준비가 되어있는가?

p.84 이데올로기적 호명은 호명자와 피호명자 사이의 사회적 관계와 각자의 위치•역할을 확인해주고 사회 질서의 지시와 요구를 수용하게 한다. 그 과정에서 피호명자는 불평등 체제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불평등한 분배•재분배 구조를 수용하게 된다.

p.336 불평등과 불공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편, 경험 속에서 형성된 시민들의 평등 감수성과 공정 감수성은 불평등 이데올로기가 불평등을 공정한 것으로 정당화하기 어렵게 한다.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에 대한 기대와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현실 사이의 괴리는 시민들에게 박탈감을 안겨주며 시민들의 불만을 증폭시킨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당연하지 않음에 대해 고민해온 이에게 제목이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 "불평등 이데올로기". 이미 사회체제 전반에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해버린 지배논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이 책은 답이 아니다.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어떤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한, 단일한 해답으로 마침표를 찍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제제기다. 이러다간 정말 다 죽는다는 절박한 호소이자 이해를 도울 하나의 길이다. 독자에게는 응답하고 질문할 책임이 있다. 어째서 이렇습니까? 언제까지 이렇게 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러고도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p.285 한국 재벌은 경제적 수탈로 이득을 취할 뿐만 아니라 온갖 불법•비리 악행으로 명백하게 상호성 원칙을 위반하고 있다. 상호성 원칙을 위반하는 재벌들은 시민들의 마음속에 신뢰와 존경이 아니라 불신과 질시의 정서가 자라게 한다. (...) 재벌들이 상호성의 원칙을 위반할 때 국가 권력은 상호적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역할도 수행하지 않았다.

p.329 사회 서비스의 상품화가 아니라 공공성을 강화하여 사회적으로 제공하고, 공기업을 사유화하지 않고 공공재를 위한 국가•지자체의 정책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며, 기업 지배 구조를 주주 지배 방식이 아니라 노동자, 협력 업체와 지역 공동체 등 이해 당사자가 지배하는 방식으로 바꾸고, (...) 노동자 중심 주체 형성 전략과 소득 재분배 과제가 잘 진행되어야 이행 주체와 폭넓은 지지 기반이 형성될 수 있어서 시장경제 모델의 제도 개혁도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다.


*도서제공: 한겨레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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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랑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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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대화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건인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는 이와 마주해본 적이 있는가. 분명히 말을 한 것 같은데, 분명 소리를 지르고 미간을 찌푸리거나 애원하거나 눈을 크게 뜬 것 같은데, 상대에게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던 적이 있는가.

그럴 때 인간은 무엇을 하는가. 제일 먼저, 다시 말하게 된다. 묻는다. 내가 한 말을 이해했냐고, 제대로 들었냐고. 그 다음엔? 화를 내거나 애원하거나 가진 것을 총동원해 상대를 이해 가능한 세계에 놓으려 애를 쓰겠지만...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지는, 해 본 사람만이 안다. 그것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 세계에 놓인 자가 가장 잘 안다.

p.337 나는 소피아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만, 소피아는 내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소피아가 쓰는 말을 알아듣지만, 소피아는 내가 쓰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는, 그러려고 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권력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지금까지 읽어온 켄 리우의 작품들은 내게 공통된 인상을 남겼다. 비참하고 고통스럽고 외롭고 잔인한 세계라 할지라도 마주할 눈이 있다면, 천진한 웃음이 있다면, 소박하고 따뜻한 대화가 오가는 자리가 있다면, 지켜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먼 미래의 우리 자신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이번엔 달랐다. 냉소적이고 절망적이었다. 희미하지만 꺼지지 않는 희망은 더욱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오만함과 무력함. 최악의 최악만을 골라 선택하는 동물, 끝없이 가지고도 탐욕스럽기를 멈추지 않는 동물, 반성도 참회도 모르는 동물. 그리고, 아주 드물게 차마 선하지 않기를 택하지 못하는.

p.27 "환경을 오염시킨 책임이 가장 컸던 부자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을 상대로 발전을 멈추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지 말라고 했어. (...) 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가난한 이로 하여금 부자가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도, 피부색이 어두운 이들이 피부색이 밝은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애쓰지 못하게 막는 것도."

p.371 선진국이라는 오래된 꼬리표는 비록 수 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 뜻이 변하기는 했지만, 강직한 도덕성과 비슷하게 여겨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계를 가장 먼저 가장 지독하게 오염시킨 장본인이 바로 선진 제국이었고, 그럼에도 감히 자신들을 따라 했다는 이유로 인도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장본인 또한 다름 아닌 선진 제국이었다.


만일, 틀에 박힌 상상처럼 외계 종족이 찾아와 묻는대도 할 말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너희 종족이 여전히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그렇기에 묻고 싶어졌다. 대체 무엇이 그토록 따뜻한 이야기를 그려내던 사람을 이렇게나 냉소적으로 변하게 했는지.

다시금 더듬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전에도 충분히 그래왔음을. 보고 싶은 면만 보고, 잠시간의 동정과 감동에 젖어 성급히 책장을 넘겨버린 건 바로 나였음을. 말이 되지 못한 것을 애써 활자로 그려내는 시도에 의미가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p.154 "그자들은 너한테 과거는 과거고, 죽어고, 이미 사라졌다고 말하지. 자기네는 새사람이라고, 예전 자신들이 한 짓에는 책임이 없다고 말해. (...) 우리 가운데 일부는 집단 망각을 생존의 대가로 받아들였어.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야. 난 너고, 넌 나야. 과거는 죽지 않아. 과거는 배어나고, 누출되고, 침투하고, 튀어나올 기회를 기다려. 네가 지닌 기억이 곧 너야..."

p.325 감정의 합의가 사실의 합의를 대체했다. 가상현실을 통한 대리 체험의 감정적 수고는 실제로 조사하고, 비용 및 편익을 평가하고,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등의 육체적 수고와 정신적 수고를 대체했다. 여기서도 진위를 입증하는 수단은 작업 증명이었다. 단지 작업의 종류가 다를 뿐이었다.


13편의 단편들은 일관되게 물러설 수 없는 의지를 담고 있다. 내려놓을 수 없는 것들, 지켜야만 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꺾이고 부러지고 상처입을지라도. 과연 독자가 자신의 집으로 삼을 이야기를 발견하기를 바란다는 작가의 마음이 가득 배어있었다.

이에, 나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빌어, 이렇게 답하련다. "'몰락은 가깝고 구원은 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이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한 줄을 덧붙인다. '...그런데 빛이 있다. 아주 희미한, 그러나 꺼지지 않고 반짝이는 어떤 빛이 있다. 이 빛은 무엇인가?'"

p.43 나는 엄마에게 말해 주고 싶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위대한 삶을 살고 싶었던 엄마의 충동을, 자신의 사랑으로 태양을 어둡게 만들어야만 했던 엄마의 간절함을, 난해한 문제들을 풀고자 했던 엄마의 분투를, 불완전한 것인 줄 알면서도 기술적 해법에 걸 수밖에 없었던 엄마의 믿음을, 이해한다고. 우리는 흠 있는 존재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이롭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엄마에게 말해주고 싶다.

p.248 앞서 본 이미지들이 머릿속을 거듭 또 거듭 스쳐 지나갔다. 이해가 늘 생각을 거쳐서 찾아오는 건 아니구나. 때로는 이렇게 두근대는 심장 고동이나, 이렇게 가슴 저린 뭉클함을 거쳐서 찾아오기도 하나 봐.


*도서제공: 황금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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