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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밤
안드레 애치먼 지음, 백지민 옮김 / 비채 / 2024년 6월
평점 :
사랑, 뭘까. 사랑이 대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구질구질하게 만드나. 사랑의 순간은 끊임없이 묘사되어왔다. 때로는 달콤하게, 때로는 꿈결같이, 때로는 절절하고 또 고요하게.
운명같은 사랑을 믿나요, 누가 내게 묻는다면, 코웃음을 치고 단칼에 부정하는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마법같은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단 한 사람에게 쏟아지고,
태초부터의 모든 순간은 그 사람을 위해 이어져왔다고,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임을 예감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고, 그렇게 믿는다.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한겨울 크리스마스 파티, 모두가 반가움에 소리 높여 인사를 주고받는 가운데, 아무와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숨어든 곳에서 운명을 마주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나또한 이 한 마디에 속절없이 빠져들었다고. "나 클라라예요".
p.15 우리의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서 밝혀지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부터 움켜쥐어지고, 도저히 낯선 사람일 리 없지만 그녀가 낯선 사람밖에는 무엇도 아니기에, 오늘 밤 나는 네 삶과 삶의 방식에 네가 쓰는 얼굴이야. 오늘 밤 나는 너를 돌아보는 세상을 향한 너의 눈이야, 나 클라라예요 하고 말하는 시선으로 우리의 눈길을 붙드는 사람 때문에 끝내 실재가 되고 빛나게 된 우리의 삶.
대단히 오랜 시간도, 서로의 지난 삶을 귀띔해줄 접점도, 동화같은 순간도 타오르는 쾌락도 없는 일주일의 시간에 어째서 이렇게나 초조해지고 애달파지는 걸까. 그렇게 읽히기를 바랐기 때문일까. 우리의 세상에는 사랑받는, 마법같은 순간이 필요하기 때문일까.
존재의 경계, 무엇으로도 넘을 수 없는 한계로 인해 우리는 타자를, 그의 세계를 갈망하고 하나가 될 수 없음에 좌절하게 된다. 영원히 알 수 없는 진심, 영원한 미지의 영역.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약자다. 어떤 사랑은 세계의 중심을 내어주는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p.169 왜 나는 오늘 밤 이렇게 행복할까요? 나는 묻고 싶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와 사랑에 빠지고 있고 우리는 그게 벌어지는 걸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죠. 우리 둘이 함께. 슬로, 슬로모션으로. 누가 알겠어요? 당신은 묻는다. 내가 알죠.
p.307 나는 어쩌면 우리를 한데 모아준 것은 어떤 갈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똑같이 은신하고 싶어서 절박한 사람, 매우 적은 것을 바라고 상대가 절대로 바라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상당한 것을 내어줄 수도 있는 사람과 함께 은신하고 싶은 갈망.
기어코 빈 손을 내보이게 하는 것, 초라해지는 것, 키득거리는 웃음을, 잔인한 조롱을, 둘만의 속삭임을, 이해할 수 없는 벽과 속절없이 사랑하게 되리라는 두려움을 받아들이는 것, 그 모든 것이 두려움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여전히 너무도 사랑하는) 작가 맥스 포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죽는다고. 그러니 사랑에 대해 숙고하는 것은 죽음에 대해 숙고하는 것과 같다고. 살과 피로 이루어진 존재이고 싶기에, 사랑은 곧 두려움이기도 하다고.
p.436 "왜 내가 당신을 믿지 않는데요? 말해줘요." "정말로, 정말로 내가 말해주면 좋겠어요, 빈달루 씨?" "네." "왜냐면 내가 당신을 다치게 할 수 있다는 걸 당신은 아니까."
p.540 클라라. 나 거짓말하고 있었어요. 나는 실망하는 게 무섭지 않아요. 나는 내가 가질 자격이 없으면서 가지게 될 터라거나 매일 가지고자 분투하는 법을 배우기는커녕 가진들 뭘 할지 모를 터였을 것이 무서운 거예요. 그리고 맞아요. 당신이 나보다 나은 사람일까 봐 무서워. 내가 오늘 밤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일 더 사랑하게 될까 봐 무서워. 그렇게 되면 내가 어디에 있게 되겠어요?
비단 물리적 죽음이 아닐지라도, 상실은 죽음과 맞닿아있다. 어떤 이를 삶에서 떠나보내는, 혹은 그렇게 되는 것은 그의 죽음과 다르지 않다. 상실의 공포, 자신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그러니 눈물로 얼룩지고 애원하게 되는 것, 그또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 한가운데서 드디어, 마침내 마주한 순간에, 다시금 아, 얼빠진 웃음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 아닐 리가 있나. 사랑받는 것, 사랑하는 것, 다시금 용기내어 손을 뻗는 것, 그 마법같은 순간. "이거 꿈만 같네요. 게다가 새해가 막 시작됐어요".
p.683 나는 그 단어를 한 번도 말하지 않지 않았는가? 눈에다가는, 밤에다가는, 공원의 동상에다가는, 내 베개에다가는 말했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단어를 말할 것이다. 내가 당신을 놓쳐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클라라,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놓쳐버렸기 때문에, 내가 당신과 영원을 보았기 때문에, 사랑과 상실 역시도 틀림없는 동반자이기 때문에.
p.766 우리는 다같이 성 요한 대성당으로 갈 건데, 우리랑 같이 갈래요? 그리고 내가 답할 겨를도 없이 누군가 샴페인 잔을 내게 건넨다. 나는 그 손목을, 당신의 손목, 당신의 손목, 당신의 달콤한, 축복받은, 하느님이 내린 내가 숭배하는 당신의 손목을 알아본다. "이스트 아인 트라움, 이거 꿈만 같네요." 그녀가 말한다. "거기다 새해가 막 시작됐어요."
*도서제공: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