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길 잘했어
김원우 지음 / 래빗홀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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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살다 이렇게 뻔뻔한 소설은 처음 본다... 아무리 "SF는 이왕 치는 뻥, 통 크게 쳐야 제 맛"이라고 말해왔다지만 이렇게까지 냅다 던져놓고 왜요? 불만있어요? 사측이세요? 하는 건 처음 봤다는 말이다.

기가 막히게 웃기고 찌질하고 나약한데다 쉴 새 없이 삐끗하는 게 아주… 절로 얼굴을 붉히게 하는 주인공들, 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결국에는 해야 하는 것, 포기할 수 없어 다시금 돌아서고 일어서야 하는 길을 알고 있다는 것, 수없이 다치고 깨져도 사랑했음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

사람을 믿는다, 사람이 가진 마지막의 마지막, 그 희미한 가능성을 믿는다고 항상 말한다. 그것은 어떤 초인이나 대단한 영웅적 능력이 아니며 선명하고 흔들림없는 의지도 아니다. 오히려 후회하고 당장의 욕심과 두려움에 쉴새없이 흔들리는, 부서지기 쉬운 마음이다.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 부른다.

p.11 21세기에 태어난 저 아이들은 죽음과 텔레비전에 대한 내 말을 이해할 수 없겠지. 텔레비전이 꺼질 때 가늘고 긴 하얀빛이 반짝인다니. 저 아이들은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어지러이 점멸하는 우주배경복사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138억 년 전에 태어난 그 빛. 디지털 텔레비전에서는 절대로 보이지 않는 빛.


수없이 말해졌듯이, 세상은 더럽고 희망은 연약하다. 어떤 목숨은 너무 쉽게 사라지고 어떤 삶은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부서진다. 소란스럽고 분주한 세상에서 조용하고 소심한, 좁은 길로 흘러가는 이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손쉬운 길은 일하다 죽는 사람의 피로, 무고한 사람을 가두는 밀실로, 이유를 잃어버린 사람의 눈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진부하고 처량맞을 정도로 연약한 희망을 놓지 못하는 것은, 게다가 때때로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가 되는 까닭은 대체 무엇인가.

p.124 "사고가 나면 길이 막히는 이유 중 하나는 사고 현장 옆을 지날 때 사람들이 속도를 늦추기 때문이잖아요. 서로의 안전을 위해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단지 구경을 하기 위해 속도를 늦추기도 하더라고요."

p.278 이 세상은 엉망이고 나아질 기미가 도무지 보이지 않아. 고장난 건 핸들인데 사람들은 자꾸 바퀴만 고치려고 들어.


거대하고 무자비한 폭력, 이해할 수도 그러고 싶지도 않은 악의와 "레귤러와 노말의 세계 "에서 밀려났다는 수치심, 패배감. 그 모든 것들을 "사랑의 힘!"으로 물리칠 수는 없겠지만, 기껏해야 달달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마디 하다 찌그러져선 한동안 이불이나 차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다고 울며불며 발을 구르다가도 멈칫하게 하는 것, 차마 어떻게 할 수 없어 이를 악물고 돌아서게 하는 것, 조금쯤 유치하게 으쓱이도록 하는 것, 결국에는 똑같은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 그 모든 것의 이름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나는. 인간의 것만이 아니더라도.

p.165 생각이 굳어지면 집착이 된다. 현실은 파도 앞의 모래성이고 생각은 수십 년에 걸쳐 건설된 대성당이다. 내부에 침범하는 것들을 신성모독이라도 당한 것처럼 거부한다. 그 단단한 벽이 무너진 이유는, 맞아. 그랬지. 등 떠밀려 시작된, 연민이나 동정에서 시작된 사랑은 잘못된 걸까. 완전하지는 않지만 거짓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p.380 두렵지 않은 것들도 생겼어. 더 이상 유령이 무섭지 않아. 나이가 든다는 건 죽은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겁에 질리기에 앞서 반가운 얼굴이 아닐까 기대하게 된다는 것 같아.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잃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아. 나를 두렵게 하는 사건들을 꾸미는 인간들이 두렵지 않아. 그저 화가 날 뿐이야.


처음부터 끝까지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단한 힘을 지닌 "주인공"도 없고, 다들 눈물 콧물 아이고 두통이야 하기 바쁘기만 하다. 그러나 이것은 영웅의 이야기다. 끝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바닥부터 기어올라갈 것이다. 밟고 일어서기 위함이 아닌, 손을 내밀고 맞잡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느다란 심지같은 것, 끊어지고 부러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 것, 희망, 사랑, 구닥다리 낭만, 부질없는 것. 그래. 이 작가의 글에는 낭만이 있다. 초라하고 구질구질하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을 울리는 것,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바로 그것으로 산다.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것들로.

p.86 "미래 씨. 우리는 실패했어요." 그리고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그 실패를끝이 아닌 하나의 과정으로 만들 것이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두통은 사라졌다. 멀리서 시작된 함성이 이내 거리를 휩쓸었고 바라는 미래를 현재로 끌어당기는 걸음들이 이어졌다.

p.254 원래 그런 건 없다. 현재는 필연적인 결과가 아니다. 내가 미래를 고를 수 있다면 모든 게 뿔뿔이 흩어져서 밤하늘에 별도 없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미래보다는 개들이 뛰어노는 미래를 고를 것이다.


*도서제공: 래빗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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