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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프픽션
조예은 외 지음 / 고블 / 2022년 1월
평점 :
안녕하세요, 오늘은 고블에서 나온 앤솔로지 《펄프픽션》을 가져왔습니다. 총 5명의 작가님이 '마이너'라는 주제로 쓰인 단편을 모은 엔솔로지입니다.
한 분 빼고는 모두 본 적 있는 이름이라 반가웠네요. 특히 조예은 작가님, 민음사 젊은 작가 시리즈로 《스노볼 드라이브》 정말 재밌게 읽었는데. 안전가옥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도 그렇고, 그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 대상 받은 《시프트》도, 뭔가 장르별로 휙휙 바뀌는 느낌이라 항상, 책 펼치기 전까지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다른 작가님들도 황금가지나 안전가옥에서 본 작가님들이라, 일단은 어느 정도 기대감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원래 SF도 처음에 펄프픽션이라는, 그러니 싸구려 소설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잖아요. 그 시절이 한참 마초적인 SF가 나오던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일부로 '펄프픽션'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걸 보니, 그 의미의 반전을 노릴만한 작품들이 실려 있는 걸까?
사실 이제 OTT 시대가 오고 '구독경제'라는 말이 시작되면서 '마이너'라는 주제가 예전 매스 미디어 시대의 마이너와는 전혀 달라졌잖아요. 예전에는 마이너 장르의 경우 돈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고 무언가 주류에서 외면받는다지만 최근에는 그런 마이너하지만 아주 탄탄한 팬덤층을 가진 장르 콘텐츠의 경우에는 오히려 새로운 소비자층을 끌어올 수 있는 회심의 콘텐츠가 되고 있고요.
넷플릭스에서 계속해서 K-좀비물을 끌어온다던가,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로 나오는 〈여고추리반2〉 같은 경우도, 사실 OTT 플랫폼이 아닌 일반 방송국에서 방영되었다면 수익이 날 수 있는 구조일까, 싶고요. 특히 드라마 〈구경이〉같은 경우 시청률은 낮았으나 넷플릭스에서 TOP 10안에 계속 들어 있었고, 제작사 측에서도 그 부분을 눈여겨 보고 드라마가 성공적이라고 판단하고요.
더 이상 마이너가 마이너가 아닌 시대에 펄프픽션이란 어떤 것일까, 싶은 마음으로 읽어나갔습니다.
첫 번째 단편은 조예은 작가님의 〈햄버거를 먹지 마세요〉입니다. 엄마의 압박으로 재수 기숙 학원에 들어간 루루와, 엄마의 남자친구의 사업이 망하는 까닭에 대학 등록금이 없어진 제이의 이야기입니다. 조예은 작가님 특유의 어느 곳으로 튈 줄 모르는 서사를 가진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조예은 작가님 《스노볼 드라이브》를 진짜 좋아하는데, 여기서 그려진 모루와 이월의 관계가 생각나기도 했고요.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소재를 미묘하게 틀어서 이야기를 구성하시는데, 기숙 학원-장학생-햄버거, 세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도시괴담과도 같은 'S대 합격시켜주는 햄버거' 예상된 반전은 기대한 만큼의 화력을 가진 채로 단편을 마무리 지어 줍니다. 아무래도, 엔딩이 가장 재미있죠.
두 번째 단편은 류연웅 작가님의 〈떡볶이 세계화 본부〉입니다.
안전가옥에서 류연웅 작가님, 연작소설집 《못 배운 세계》에서는 각각의 단편소설이라는 구성을 뛰어넘어서 새로운 한 덩이의 연작 소설집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좋았었거든요. 그런데 그런 작품을 하나의 단편으로만 마주하면 살짝이 당황스럽지 않을 수가 없더라고요.
매운 떡볶이를 먹고 죽은 서양인들과, 뱀fire가 된 Snake 씨의 이야기를 B급답다 웃으며 보기에는 이미 인터넷 밈으로 떠도는 뱀파이어와 vamfire가 너무 익숙한 바람에, 사실 계속 반전이 있겠지 있겠지 하고 봤는데.
상당히 아쉬웠어요. 짧은 단편에 등장하는 B급 다운 개그 요소가 사실 인터넷에서 많이들 향유되는 밈들인 바람에 B급 다운 새로움이 조금 떨어지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오히려 뱀fire라는 존재가 인간의 노동력이 아니라, 아예 기계의 노동력을 대신했다면? 그래서 오히려 자동화 시스템 대신 기계처럼 부려졌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도 해보았고.
오히려 작가 후기를 읽고 나서야, 조금 고개를 끄덕이게 된 소설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정말 재밌게 읽고 싶었는데,,
세 번째는 홍지운 작가님의 〈정직한 살인자〉입니다. 이 소설이 정말 현재 한국에서 '마이너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짧은 분량이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는 서사도 새로웠고, 작가님이 삽입해놓은 이야기를 듣는 존재의 유머러스함도 제게는 완전 제대로 먹혔거든요.
아주 흔한 금도끼 은도끼 동화를 차용한 구성임에도 마지막 반전을 보면 귀엽다는 말 밖에, 그러나 전체적인 단편을 보면 전혀 귀엽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한국에 빚에 팔려온 여자인 '나'를 주인공으로 하고 시작되는 이야기는 사실, 처음부터 강하게 독자를 몰입시킵니다. 왜냐면 한국인도 아닌 빚에 팔려온 '나'가 죽은 남편인 조직폭력배 김형관의 시체를 싣고 저수지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난데없는 크루통의 등장으로 한 번 '나'의 입장에서 진행된 이야기는, 그 사이사이의 간극을 매우며 더 풍부하고 완벽한 이야기가 되고, 그 대학원생의 조사에 응해준 대가로 아주 소정의 상품을 받게 되죠.
짧은 단편에서 같은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되는데, 그 빈틈과 이야기 구성이 좋아서 재밌게 반전을 느끼면서 읽었고요, 정말 마지막은 안 웃을 수가 없는 결말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이 소설의 따뜻하고 유쾌한 마무리가 너무 좋았어요.
네 번째 이경희 작가님의 〈서울 지하철도 수호자들〉입니다. 수도권 사는 사람만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바로 그 소설.ㅋㅋㅋㅋ
전에 경의중앙선에 갇힌 사람들을 소재로 한 단편을 봤던 거 같은데, 제목도 작가도 기억이 안 나네요.. 그 소설이 눈앞에 아른아른했습니다. 주위에 전에 경의중앙선 타고 다니던 지인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그분 생각도 나더라고요.
하여튼, 진상 민원인 이명헌 씨의 전담이 되어버린 한나 씨는 그 할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서울 지하철도에 숨겨진 비밀을 알게 되는데….
사실 이렇게 현실과 교묘히 덧씌워진 판타지 소설을 좋아해요. 진짜 완벽한 B급이자, 블랙코미디 소설이지 않았나 했습니다. 단편은 현실과 판타지를 넘나드는데 그 정말 이 이면에 이런 비밀이 숨어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쾌하게 후루루 넘겨읽는 소설이고, 전에 브릿G에서 읽은 〈세계 맥주 4캔에 만원〉이라는 단편도 생각이 나는 글이었습니다.
현실과 초밀접한 판타지. 어반 판타지라고 하나요? 제가 잘 쓴 B급 어반 판타지를 좋아하나 봐요. 굳이 뽑자면 〈서울 지하철도 수호자들〉을 제일 재밌게 읽었습니다. 있을 법한 냉택없음.
마지막 최영희 작가님의 〈시민 R〉입니다.
대박! 제가 최근에 딱 한나 아렌트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여기서 한나 아렌트 이야기가 나오다니! 일단 너무 반가웠고요.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다른 책에서 본 이야기가 나오면 마치 천생연분인 것같이 반가워요. 아주.
청소로봇 알옛이 말하는 아렌트의 철학과 코끼리를 삼킨 보아 뱀.
알옛은 주인인 강희원씨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재판에 섭니다. 이 소재만 보면, 하오 징팡의 《인간의 피안》에 수록된 〈사랑의 문제〉나 김혜진 작가님의 단편 〈TRS가 돌보고 있습니다〉 기 생각이 납니다. 아무래도 살인죄로 기소된 로봇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는 SF 시장에서 〈시민 R〉이 가지고 있는 특색이 뭘까 고민해 봤어요.
인문학 도서를 꿰뚫고 스스로를 시민이라 지칭하는 순간이 아닐까, 알옛이 법정에서 스스로를 시민이라 정의 내리는 순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했을지 피부로 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도 머리 싸매고 읽고 있는 한나 아렌트를 턱턱 인용해 내는 것부터, 같은 일을 하는 한인숙 씨와의 만남.
특히 마지막에 유유히 사라지는 알옛, 아니 시민 R의 모습을 보니 정말 어디 가서도 나보다 더한 의무를 지키는 '시민'으로 잘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마이너라는, 그러니 묶인 주제라고는 인기 있는 것과 반대편인 주제로 엔솔로지를 기획했다는 점이 신기했어요. 공통점이라고는 흔하지 않은 소재에 흔하지 않은 서사.
이 다섯 편의 단편이 펄프픽션이라는 정의를 바꿀 수 있을만큼의 힘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약 250쪽의 엔솔로지를 다 읽고 나니까, 재밌었던 책임은 분명하네요.
장르소설의 새로움을 갈망해온 분들에게 추천드립니다.
오늘 포스팅은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