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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겨진 눈 아래에 - 브릿G 단편 프로젝트
정도경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8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여성 서사를 찾아다니는 인간으로서, 이런 단편집이 종이책으로 출간된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이 단편집 안의 글들은 소외된 여성을 글 안으로 데려와 그들의 인생을 조명하는 형식으로 진행이 됩니다. 비파 연주를 잘한다는 이유로 물에 빠진 여자. 어린 시절 갇힌 화장실에서 나오는 순간 엄마의 무릉도원을 무너트린 나. 사고로 기억을 잃은 엄마를 납치하듯 데려와 결혼한 아빠, 그 과거 기억을 찾고 싶어 하는 엄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강. 딸과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죽였다는 이유로 사형당하는 백작부인. 탈북한 후 온 곳을 돌아다니며 도망치듯 살아온 '너'. 그리고 여성들의 디스토피아가 된 한국으로 여행을 와, 강제로 군 복무를 수행하게 된 세실.
그들은 어느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 우리의 곁인 현재에, 다가올지도 모르는 미래에 각자 자신의 삶을 견디어 내며 담담하게 우리에게 자신들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과거는 어쩌면 우리가 겪었던 일일 수도, 앞으로 우리가 걸어야 할 길 안 일 수도 있습니다. 홀몸의 여인이라는 이유로 물길을 잠잠하게 하기 위해 호수에 던져진 여자의 이야기가 허구의 이야기임에도 깊이 공감하며 읽어나가는 이유는 그 이야기의 본질이 나에게, 혹은 나의 자매들의 경험담을 토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남성'의 잘못으로 인한 엄마와 딸의 관계의 불완전함, '남자'를 피해 홀로 도망쳤다는 죄책감을 가진 채 엄마를 마주하는 딸, 탈북자의 신세로 홀로 딸을 키우며 살아가던 너, 이 글 속 주인공들의 마음속의 짐은 한 주제를 관통해서 이어집니다.
어떤 이들에겐 강을 건너다 사살당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당장의 생존에서부터, 딸을 낳음으로써 자신의 무릉도원이 끝났다 믿은 엄마의 시선을 받았던 아이, 딸을 죽이려 들던 남편을 죽임으로써 사형을 선고받은 백작부인까지의 모든 일을 아우릅니다. 이들은 눈을 뜨면 명백한 단 한 가지의 이유로 1에서 100까지의 고난을 가지고, 담담하게 혹은 반항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런 주제를 극대화하여 보여준 것이 이 단편집의 표제작인 전혜진 작가님의 「감겨진 눈 아래에」입니다. 근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지금까지의 방향대로 움직인다면 정말 미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섬뜩한 예감으로 책장을 넘기게 만듭니다.
인공 출산이 가능해진 미래임에도, 대한민국은 문명국이었던 과거가 거짓이었던 듯 과거로 역행합니다. 출산하지 않은 여성들의 대학원 진학과 외국의 유학을 막으며 압박하고,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의 권리를 조금씩 앗아갑니다. 그들은 가축처럼 등급으로 나누어져 병역 의무를 지게 되는데, 병역 의무라는 것은 곧 출산입니다. 그들은 원하지 않은 출산을 하며, 단지 남성의 소유물로, 나라의 소유물로써 살아갑니다.
세실은 이러한 한국의 상황을 보다 못해 프랑스로 망명한 부모를 둔 프랑스인입니다. 그는 인권단체에서 인턴을 하다, 궁금증과 패기로 한국 여행을 가지만, 공항에서 붙잡혀 '성병검사'라는 명목으로 시행되는 강간을 당하고, 3등급 판정을 받고는 끌려가게 됩니다. 1등급 판정을 받은 여성들조차, 가능한 일이라고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자신이 키울 수 있다는 것뿐, 그들의 자유의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에서 나고 교육받은 세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그곳에서 페미니즘을 공부한 재경을 만납니다. 외부와의 교류도 단절된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라며 전단지를 돌리다 잡혀 온 재경, 그는 자신을 불가능하지만 세실에게 나가서 이곳의 상황을 알려달라고 말합니다.
세실은 재경을 생각하며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습니다. 그러다 자신을 찾으러 온 인권단체 사람들에 의해 간신히 프랑스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세실은 숨지 않은 채, 세상에 폐쇄적인 한국의 세태를 고발하는 책을 내게 됩니다.
전국 가임기 여성지도를 공개하고,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고학력 여성의 취업 기회를 제한하자는 제안을 내며, 자신의 성을 파는 10대에게 일정한 법적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인사가 있는 정부에서 살아가는 여성으로서, 디스토피아 소설이 저 먼 별나라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사이사이 서늘한 현실감이 독자에게 다가옵니다. 마지막 한 발자국을 나온 세실을 마음속으로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읽으며 아쉬웠던 점도 있는데요.
이 단편집의 뒤면에는, "혹독한 가부장적 세계의 속박에서 자유를 갈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여성 서사 작품집"이라는 소개 글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가부장적 세계를 전복하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이 단편집은 현재 가부장제에서 피해자가 돼버린 여성, 그리고 그 피해로 인하여 자신보다 약자인 여성에게 가해자가 되어버린 여성들의 이야기가 주로 다뤄졌습니다. 가부장제의 전복,보단 현재 여성들의 고난을 가시화시켜, 공론화하기에 적합한 소설들이 주로 수록되어 있어서,, 사실 기대의 방향성과 삐끗했습니다.
여성 서사의 중요성은 백번 천 번을 말해도 부족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의 고난을 '성폭력, 가정폭력'으로만 일축하는 경향을 많이 봐왔습니다. 물론 현실의 여성들을 위협하는 현실적인 범죄라는 것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 고난의 전복이 이뤄지지 않고, 그 여성의 희생과 다른 여성의 공감만을 강조하면 끝나는 이야기들. 이제는 그보다 더 나아가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이야기 물론 옳습니다. 백작부인이 왜 사형을 당해야 하는가, 왜 엄마는 '나'를 화장실에 가둘 수밖에 없었는가.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면 그 이야기가 내포하는 현실에 목이 막히고 숨이 답답해집니다. 독자에게 의미를 반추시키는 이야기들의 필요성 또한 절감합니다.
하지만 저는 "더없이 참담한 세계를 살아가는, 자유를 갈망한" 여성들 그리고 "쟁취에 완벽히 성공한" 다양한 여성들의 이야기도 함께 가시화되기를 바랍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색색별로 너무나도 다른 이야기들이 차례대로 다가옵니다. 몇몇은 책장을 덮고 숨을 골라야 할 만큼 아프고, 몇몇은 손이 땀이 날 만큼 긴장되지만 우리는 그 어떤 이야기에게도 눈을 떼서는 안 됩니다. 그들과 함께 끝까지 달리는 길에, 어쩌면 우리들의 발자국이 먼저 찍혀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 여성들이 우리의 발자국을 이정표 삼아 글의 완결을 향해 달려갈 지도, 또 모르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