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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의 열매를 매단 나무는 뿌리로 꿈을 꾼다
박상륭 지음 / 문학동네 / 2002년 7월
평점 :
두 집 사이
제4의 늙은 아해(이야기)는, '이제 고만 좀 들어갔으면' 싶은 늙은네가, 들어가면 나와지고, 나오면 들어가지는, 뫼비우스 띄 끊기를 도모해, 벌어지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야기 끝에 붙여 놓은 작가의 '*'이 퍽 핵심적으로 보이는데도, 그 핵심과, 이야기를 이어놓지 못하는 짧은 '이해'가 안타까울 뿐이다. 제5의 늙은 아해(이야기)는 방 안에서 방위를 잃게 된 늙은네가 맞이하게 된 방위 잃은 죽음(세모꼴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사각과 삼각, 정사각과 직사각에 대한, 실로 아름다운 사유에 감탄이 나왔다. 제6의 늙은 아해(이야기)는 칠조어론에서 살짝 언급했던 '갈마 분열'론(은 생물학의 세포분열에 착안한, 갈마-업業-의 분열에 관한 가설)에 대한 자세한 주석이다. (티벳 사자의 서를 읽으며 떠올렸던 의문 하나가 여기에서 매듭을 풀었다.) 갈마론, 윤회와 환생론이 답변하지 못하고 있는 인구 증가에 대한, 작가의 가설적인 답변인 셈이다. 제7의 늙은 아해(이야기)는, '오호 통재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무신론자들이 세운 나름의 무신론적 유토피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무신론적 세계관에 대한 풍자/비판을 하고 있는 것도 같은데. '오호 통재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 다만 여기에서, 잘못 된 눈 하나(는 물론 이걸 쓰고 있는 독자 하나)는, 칠조어론 1권에서 보았던 '따님'네 돌아가는 사정에 대한 이해(랍시고 하고 있는 오해)를 조금 얻게 되었다고만 덧붙여둔다. '오호 통재라', 무슨 말씀이신지 하나도 모르겠다,지만, 처음에는 '구원'처럼 보이던 것이, 어떻게해서 '왼마을을 잡아먹는 무엇'이 되는가를, 여기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추측과 억측)
혼방된 상상력의 한 형태
1. 동화(童話)에서 신화(神話)를, vice versa - 문드룸과 붉은 새 이야기를 시작으로, 문드룸 왕자가 비화현에서 화현의 세계로, 화현의 세계에서 다시 몸의 세계로, 말씀의 세계로, 마음의 세계로 치러내는 변신을 통해서, 세상의 '화리(化理)'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화에서 시작된 표절, 변용이 매우 흥미롭고, 재미도 있다. 표면에서는 동화다운 맛이 나면서도, 일단 입안에 들어가면, 삼세(몸의 우주, 말씀의 우주, 마음의 우주)에 관한 맛, 다시 말해 신화적인 맛이 난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쓸데 없는 재간)
2. 풍문(風聞)에서 현실(現實)을, vice versa - 아도니스 제의는 봄의 제전, 그러니까 거듭 태어나기(환생)로서, 몸의 우주를 나타낸다. 아도니스의 사당에서 곡비가 일러준 말, ("그러나 모든 향초들이 그이를 맞으려 꽃등을 밝혀 기다리면, 그이가 태양의 모습을 꾸며, 흰 양을 타고 오실 걸요.")을 통해, 당나귀에 올라 타고 온/오는 말씀의 우주를 드러내 보인다. 말씀의 우주가 개벽한 곳은 골고다 언덕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속이다. 자기 부정이다. 대속의 소리가 멈춘 곳에서 사람들은 환생을 거듭한다. : 몸의 우주로부터 말씀의 우주, 그리고 다시 우리 현실이 놓여 있는 곳(은 결국 세 개의 우주가 겹쳐져 있는 곳, 마음의 우주로의 길은, 거기 어디 있다는데도, 여기에서는 드러나 보이지가 않는다, 내게는 안타깝게도, 마음의 우주가 풍문이다, 어쨌거나 그런 곳)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
3. 상(相)에서 성(性)을, vice versa - 송장의 자궁과 그 속에 임신되어 있던(혹은 태임 받았던) 여아(혹은 남아)와 그를 돌보기로 한 연화존자(혹은 암호랑이)의 (변용된 몇 개의) 이야기를 통해서, 현자의 돌(혼) 구워내기 이야기가 한 마당 벌어진다. 비교적 짧지만 비교적 명쾌하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여서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相4에 담겨 있는 이야기는 바로 앞에서 얘기됐던 "옴 바즈라파니 훙! 안쪽으로 터뜨려내려 핀 이 꽃을, 일시에 뒤집기로 한다면, 다시 말하면, 즉슨 밖이 되게 한다면, 옴 마니팟메 훙(연 속에 담긴 보석)의 형상을 취할 것은 자명하다."에 대한 주석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구렁이와 양파를 통해 옴 바즈라파니 훙!과 옴 마니팟메 훙!을 형상화 하고 있는 듯하다는 말이다. : 이 챕터에서 나는 융의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간결하게 이해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남성 속의 여성, 여성 속의 남성, 많은 얘기는 그저 번잡할 뿐이었는지도 모른다.
4. 우화(寓話)에서 천기(天機)를, vice versa - 이솝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이렇다."제우스의 명을 받들어, 프로메테우스가 사람과 짐승을 지었더니, 제우스가 본즉, 사람보다 짐승의 수가 지나치게 많은지라, 다시 명하여 이 짐승 중의 많은 것을 사람으로 바꾸라고 했겠다. 좇아 프로메테우스가 그렇게 하였더니, 전에 짐승이었던 것들은, 비록 형체는 사람이라도, 여전히 짐승의 마음을 갖고 있는 바였댔다." 이 이야기는 짐승 같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작가는, 이 이야기는 사람에 대한 것이며, 이야기 속에는 금수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의 짐승스러움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 짐승스러운 사람(vice versa)은 지구 위에 창궐해 어머니 가이아를 죽이고 있다. 히기누스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이렇다. 우수의 여신 쿠라가 흙을 빚었는데 어쩌다보니 어여쁜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보고 감탄하며 이것에 정(情)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했다. 지나던 (오지랖쟁이) 쥬피터가 그 말을 듣고, 그 코에 숨을 불어넣어준다. 얼씨구 그래놓고 봤더니, 더 아름다웠더라는 것. 쿠라와 쥬피터 사이에, 빚어 생령된 것을 두고, 소유권 분쟁이 일었다. 거기에 참여한 것이 있었으니, 흙의 여신 텔루스. 그녀 역시 그가 흙으로 빚어졌음을 들어, 소유권을 주장했다. 지나던 사투르누스(시간)이, 솔로몬이 되어 판결하기를, '이것이 죽으면 쥬피터는 정을 취하고, 텔루스는 흙을 취하라고,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쿠라가 소유하라고 했다. 이어지는 후덕한 장자의 이야기에서, 장자는 지나는 라마의 조언에 따라, 해탈하기 위해 출가 입산한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해탈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십여 년 후 다시 그 라마가 지나기에, 사정을 고했더니, 자기가 잘못 알려주었고 딱히 해줄 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장자는 다시 자기의 굴로 들어가 연좌를 꾸몄고, 성불이나 해탈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렇게 성불과 해탈을 성취한다. : 이솝의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짐승다움이, 히기누스의 이야기에서는 인간의 이성(이 작가는 그 기반을 우수에 두고 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것)이 담겨 있는 것이 보인다. 장자의 이야기에서는, '오호 통재라', 무슨 말씀이신지 잘도 모르겠다.
영합(迎合)이냐, 순제(殉祭)냐는 바다에 사는 독룡에게 공주를 바쳐야 하는 바닷가 어느 동네의 사정을 전하며 시작된다. 그런데 그 독룡이라는 놈의 반은 보드라운 털을 갖고 있어 정온 동물스럽고, 나머지 반은 금강석도 깰 만큼 단단한 비늘로 되어 냉혹하기가 이를 데 없다 한다. 어떤 공주는 독룡이 펼쳐 보이는 보드라운 편에 안기어 한 해를 짝꿍(영합)으로 지내다 시녀가 되어버리고, 다른 어떤 공주는 혐오감을 드러내 냉혹한 비늘에 여지 없이 희생(순제)당하고 만다 한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작가는 얼굴을 바꾸어, 이와 같은 사정이, 우리 소설에게도 일어나 있다고 말한다. 왕자가 오기 전까지는 저러한 공주들이 무수히 바쳐져야 할 터인데, 오늘의 공주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대해, 작가는,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지고 있다.
순제(殉祭)냐, 순난(殉難)이냐는 앞선 이야기에서 결말을 바꿔낸 이야기이다. 영합-순제가 소설 밖의 이야기였다면, 순제-순난은 소설 안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왕자이면서 독룡인 창조력-파괴력의 '쏘고듦'에 당면한 공주가, 가져야 하는 어떤 태도(?)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하다. 왕자는 왔다, 그런데 왕자는 독룡이기도 하다, 순백의 존재인 공주는, 그 자신을 (여성에서 어미로서) 완성시키기 위해서, 저 왕자이기도 하고 독룡이기도 한 것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큰 고통이겠냐마는) 하나의 아들을 낳아야 했던 것이다. 공주는 회임했고, 독룡은 힘을 잃었다. 공주는 어지자지를 나았고, 이제 사람들은 독룡의 뼈를 모아다, 생식과 번식을 빈다. : 어지자지나 생식, 번식(은 '일남이녀'이다. 한 자궁에 두 수컷, 그것이 바로) 인구 포화에 대한 진단이고, 처방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소설가의 소설이라는, 이 이야기는, 시대에 대한 진단이고, 시대에 대한 처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작가가 말하는, 소설가의 소설일 듯?
- 다음에 다시 읽거들랑, 이것보다는 조금 더 잘, 읽어내고, 더 잘, 풀어낼 수 있기를.
- 시간의 Acteaon 복합증에 쫓겨, 지금 다시 읽을 수 없다는 게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