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소녀들 -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생의 식민지 경험
히로세 레이코 지음, 서재길.송혜경 옮김 / 소명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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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집에서 티브이를 보고 있다가 문득 '아 집에 가고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곤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에 스스로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이 집이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에게 반문했다. 방금 내가 생각한 '집'은 어느 공간이었을까?

'집'이란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부모님은 내가 어려서 부터 이사를 많이 다니셨기 때문에 특정 공간에서 오래 지내본 적이 없다. 한 공간에 정 들라 치면 머물 공간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내가 그립다고 생각한 공간.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 공간이 어디였을까를 추적해보니. 사춘기를 겪었던 고등학생 시절에 내가 머물렀던 내 방의 공간이 떠올랐다. 잠들었던 시간이 무척이나 행복했던 내 침대와 앉아서 많은 것을 했던 내 책상이 있었던 내 공간이 나에게는 고향 그자체. 그리움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누구나 돌아가고 싶은 공간이 있을 것이다.
그 공간을 누군가는 '추억'이라 부를테고, 누군가는 '고향'이라 부를 테지만. 누군가는 '노스탤지어'라 부른다.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간단하게 말하면 향수인데 그 시대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에서도 쓰이고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 할때도 쓰인다.
여기에서 상당한 아이러니가 하나 있다. 이 노스탤지어를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인들이 조선을 '고향'이라 부르며 '노스탤지어'를 쓰고있는 것이다. 그들은 식민지였던 조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깜짝 놀랄 이야기이다.


'제국의 소녀들' 책은 식민지 시대에 조선에서 태어났던 일본인들의 이야기이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조선에서 태어난 일본 여자아이들. 그중에서도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에서 공부했던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식민지에서 지배자로 살았던 이들의 이야기.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실은 책이다.

책의 저자 부분에는 히로세 레이코 지음. 서재길, 송혜경 옮김 이라 되어있다. 이름만으로 누가 한국인이고 누가 일본인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 두 나라는 확연히 다르다. 그런 두 나라가 같은 땅에서 다른 공간으로 따로 또 같이 살았던 시절이 있다.
매체를 통해 늘 피해자였던 한국 입장만 봐왔던거 같다. 그러다 우연히 보았던 이 책이 큰 흥미를 끌었다. 가해자 입장을 쓴 책이라니. 더군다나 실제 식민자였던 이들을 직접 찾아다니고 인터뷰하여 살아있는 생생한 이야기들을 실었다니 이 책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인 히로세 레이코는 '전쟁과 여성'에 관한 주제를 연구하는 학자이다. 식민자의 경험이 실린 책을 접하게 된 것을 계기로 그 책의 작가를 만나서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서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의 동창회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고 한다. 300명의 회원들이 연 1회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소개받고 실제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책의 초반은 그들의 어린 시절이 나온다.
그 당시 제일고녀는 경성에서 가장 좋은 엘리트학교였다. 당연히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매우 부유했다. 하여 그들의 어린 시절은 풍족함 그자체였다.
책은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실은 부분이 많기에 읽는데 어려움이 없다. 대화체로 쓰여진 부분들이 많아 쉽게 읽을 수 있다. 조곤조곤 이야기를 듣고있는 것 같아 편하게 읽어내려갈 수 있어서 좋았던 거 같다. 내용적인 면에서도 그들의 어린시절을 담백하게 묻는 것이므로 심오하지 않다. 그저 어떻게 살아왔느냐고 간단하게 묻고 추억이야기를 소근소근 듣는 느낌이다.
다만 부유했던 어린시절을 이야기할때, 마치 좋았던 어린시절을 그리웠던듯 이야기하는 면에서 너희들의 부유함은 누군가의 눈물이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분한 마음이 들었던 것만 빼면 말이다.

실제 참여했던 사람의 경험담을 듣는 것은 여러모로 느끼는 바가 크다. 그들은 식민자로 태어났기에 처음부터 당연한 삶으로 받아들였고 죄책감은 전혀 없었다. 당시가 이들이 여고생이었던 시절이니 사춘기소녀 시절이었을 것이다. 철없던 소녀시절이 그대로 담긴듯 하다. 계층이 분리될때, 지배자의 논리를 들을 때, 제국주의 사상을 주입받을 때조차 이들의 철없음이 느껴진다.

"황국신민의 서사라는 것은 조선인을 대상으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우리도 매일 아침 복창해야 했습니다. 정말 '건성건성'으로 해서 아무런 영향도 받지 못했습니다."
-96페이지-

책이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1945년 8월15일 이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자신들이 가해자였음을 깨닫고 반성하는 부분이 나올줄 알았다. 의외였던 것은 가해자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고 끝끝내 가해자가 아니라고 하는 부분이었다. 이게 무슨이야기냐면, 이들은 일본의 패전을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미리 조선을 떠날 생각 조차 안했다. 그들에게는 조선이 고향이고 삶의 터전 그 자체였기 때문에 오히려 타국 같이 느껴지는 일본에 왜 가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이를 책에서는
"조선인이 되어도 좋으니 경성에 남고싶었다"
라고 한다. 경악할 만한 것은 "우리들이 나빴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명화와 개발에 공헌했다. 과거는 좋았다. 그리운 나의 고향,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라고 쓰고 있다.
그들은 식민자였던 삶을 그리워하고 그때를 추억하면서 조선을 돌아가고 싶은 고향이라 부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일본에 돌아가서 평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부분이 나와서였다. 식민자로 부유하게 살고 모아놓은 재산이 많으니 일본으로 돌아가서도 잘살았다고 나오면 많이 화가 날뻔했다.
다행히도 이들은 화난 조선인들에게 재산을 몰수당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끼면서 도망치듯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인양자로 돌아가서 이들이 처음 본 것은
"침략자인 너희들이 돌아와서 우리가 굶주린다"라고 쓰여진 벽보였다. 그리곤 "당신네들은 외지에서 마음껏 민폐를 끼치면서 살아왔으니, 지금부터는 고생을 해도 싸다"라는 말과 차별을 받았다고 한다.

책의 뒷부분에 가서는 예상치 못하게 놀라게 되는 부분이 많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후에 한국으로 관광을 와서 그시절의 그리움을 느끼고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들은 "패하지 않았다면"이라며 아무 생각없이 말을 내뱉는데, 본인의 삶만 평온하다면 타인은 피해자가 되든 뭐가되든 좋다는 식이 보여서 끔찍했다. 그래도 대다수의 사람이 그시절의 반성의 모습을 보이고 문학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 보여서 그들의 책도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제국의 소녀들' 책은 식민지 조선시절 경성제일공립여학교 동창생 22명의 이야기이다. 그들이 식민지를 어떻게 체험하고 어떻게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 개개인의 인터뷰 형식으로 쓰여있다. 책은 작고 얇은데다가 쉽게 쓰여져 있어 가볍게 읽어볼 수 있다.
이 책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는 식민지의 전후가 기록되어있어서 그들이 어떻게 자신들이 가해자였는지를 자각하는 장면들이 나오기때문이다.
그들 개인의 경험은 개인의 역사로 개별적이지만, 그 경험 하나하나가 모여 전체 역사가 된다고 생각한다. 이를 작가도 "개별적인 것들의 모습을 통해서 역사적 전체성을 파악한다" 고 했는데 이에 크게 동의한다.
이들의 경험을 들여다 보면서 그 당시 시대가 어떠했는지 그들의 역사와 기록된 역사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보면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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