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양 ㅣ 에디터스 컬렉션 13
다자이 오사무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2월
평점 :
'사양'이라는 책의 작가가 '다자이 오사무'라는 것을 본순간. '아! 이건 읽어야 해!' 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정말이지 작가만 보고 책을 선택한 것이다.
책의 표지에 앉아있는 여자가 기모노를 입고 있고 다자이 오사무는 원래 자전적인 순수문학을 쓰는 자이니 딱 그시대의 시대상을 반영해줄거라는 예상을 가지고 책을 기다렸다.
도착한 책은 사이즈가 조금 작았으나 아담하니 손에 잡고 펼쳐보기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책의 사이즈가 작았던 탓일까.
책의 페이지가 착착 펼쳐지지 않아 종이책을 손에 잡고있기가 불편한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수없이 전자책으로 넘어가려고 전자도서관과 밀리의서재에 사양을 검색해보았더니 밀리의서재에 이 책이 전자책으로 떡하니 있는게 아닌가.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전자책을 다운받고 편하게 읽어보았다.
'사양'은 29살의 가즈코의 이야기이다.
그녀의 집안은 귀족 가문이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조금씩 몰락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저 아름답고 고고함 그 자체로만 묘사되는 아픈 어머니와 자존심이 센 마약중독자 남동생, 그리고 그녀의 사랑이 나온다.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라고 불린다. 소설에 자신의 이야기를 지나치게 많이 실기 때문이다.
그냥 다 실제 자신의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왜 사양에서는 주인공이 여자이냐?
그건 다자이가 애인이었던 오타 시스코의 일기를 보고서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의 일기를 보고서 소설을 쓴 건 사양이 처음이 아니다. 여학생이라는 소설도 타인의 일기를 보고 쓴 소설인데, 소설과 실제 일기의 내용이 90%나 같다고 한다.
참 꾸며낼 줄 모르고 있는 그대로 쓰는 게 참으로 다자이 상 답다. 이번 사양은 실제 시스코의 일기와 얼마나 같을까? 거의 대부분이 일기의 내용을 그대로 쓴 것일 테다.
소설 속 가즈코가 만나고자 했던 선생님 우에하라 씨가 다자이상으로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닐 거다.
그래서 소설 속에서 가즈코가 우에하라의 외모를 흉하게 표현한 게 많이 씁쓸했다.
"저 사람이 나의 무지개 M.C, 내 삶의 이유였던 그 사람이란 말인가. 6년. 헝클어진 긴 머리는 옛날 그대로인데 안타깝게도 적갈색으로 바래고 얼굴은 누렇게 떴다. 눈 주위는 벌겋게 짓무르고 앞니가 빠져 계속해서 입을 오물거리는 게 꼭 늙은 원숭이 한 마리가 꾸부정하게 구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남동생인 나오지가 죽는다.
아니... 어쩌면 나오지의 죽음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유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다. 진짜 다자이상은 나오지였구나.
나오지의 유서를 읽기 전까지는 "에휴..다자이상은 뭐가 문제였을까.. 어휴.." 이런 느낌이었다. 꼭 한숨을 같이 넣어주어야 한다.
하지만 나오지의 유서를 읽으면 "그랬구나..." 하게 된다.
실제 다자이상. 인간실격에서의 다자이상. 사양에서의 우에하라와 나오지로 나오는 다자이상. 모두를 보면 그가 보인다. 그의 죽음이 조금은 보인다.
자신의 이상과 돈 앞에서 꺾이는 자기혐오. 원래도 인간 불신이 있었던 듯한데. 병원 입원 도중 치료를 위해 진통제로 사용되던 마약에 중독되어 지인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한다. 그런데 입원시키는 과정이 지인들이 그냥 요양원으로 속이고 강제 입원시켰던 듯하다.
"나를 인간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라고 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인간실격을 읽을 때만 해도 그저 풍요로운 집안에서 고귀하게 태어나서 지나치게 둥가 둥가 해주니 애가 삐딱선 타는 거 아니냐며 혀를 쯧쯧 찼더랬다.
그는 귀족으로 태어났다. 귀족으로 자랐다. 하지만 그는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믿었다. 그래서 민중에 속하고 싶어 했고 사람들 속에 녹아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민중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귀족이라는 시선을 받아야 했고 철저하게 이방인의 시선을 견뎌야 했다.
"나는 그저 귀족이란 나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발광하고 시시덕거리고 타락한 거야. ....
귀족으로 태어난 것이 우리의 죄일까. 그저 그 집에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우리는 영원히, 예를 들어 유다 집안의 자식처럼, 민중에게 죄스러워하고, 끝없이 사죄하고, 부끄러워하며 살아가야만 해."
인간실격은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라고 시작한다. 그는 부끄러웠던 거다. 그의 태생이. 그의 나약함이. 그의 인생이.
귀족으로 태어나서 자라난 고향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테다. 하지만 그의 필명은 자신의 본명인 쓰시마 슈지를 고향 사투리로 읽을 때의 다자이 오사무로 택했다. 고향 사람들이 자신을 다자이 오사무로 불러줬던 게 좋았던 것일 테지.
사양 소설 속에는 성경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으로 보는 죽음. 비난받으며 죽는 구원자.
그는 스스로를 구원하고 싶어 했던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