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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로 가니 - 식민지 교실에 울려퍼지던 풍금 소리 ㅣ 한국인 이야기
이어령 지음 / 파람북 / 2022년 8월
평점 :
이어령 선생님의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중에서 3권으로 나온 '너 어떻게 살래' 책을 읽으면서 이어령 선생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어령 선생님의 첫 이미지는 상상했던 이미지와 책 속에서 만나는 이미지가 달랐었다. 좀 더 날카롭고 신랄한 이야기를 펼칠 거라 예상하고 읽었으나 글 속에서는 너무나도 친근한 할아버지 한 분이 서 계셨었다. 좀 더 이어령 선생님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참여하고 있던 독서모임에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책이 선정되었다.
인터뷰 형식이고 책을 써낸 작가가 따로 있어서 이어령 선생님 본인의 목소리가 많이 덮인다는 평이 많아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책이다. 우리는 그때 당시 너무 신격화하는 건 아니냐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었다. 분명한 건 플라톤이 죽어서 자신의 글을 유지로 남긴 것처럼, 이어령 선생님도 본인은 없어질지언정 자신의 글은 살아남아서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모두가 느꼈다는 것이다.
책의 들어가기 전 코너에서는 겨울밤 꼬부랑 할머니가 화롯불을 피워놓고 손주들을 불러 모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처럼 본인도 독자들을 상대로 두런두런 느린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다고 느낀다.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느리고도 느리게.
몸을 가누기가 힘겨워진 한 노인이 이불 위에 누워 온 식구들을 모아놓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이야기해 주는 것만 같이.
이어령 선생님은 그 당시에 국문학과를 공부하시고 문학평론가, 논설위원, 문화부 장관, 한중일 비교 문화연구소 이사장 등을 역임하셨다.
그래서 이어령 선생님의 글에는 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나온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뜻과 유래,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상징성과 혼에 대한 이야기.
학교 다닐 때 제법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이었다고 기억하는데, 이어령 선생님이 해주시는 우리말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보거나 놀라워서 신기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진정 할아버지의 지혜 보따리를 듣는 듯이.
"다음은 말과 문자가 얼마나 힘이 셌는가를 생생히 증언하는 내 어린 시절 기억이다. 110p"
이번 이어령 선생님의 책 제목은 '너 어디로 가니'로 이어령 선생님이 갓 학교에 다니기 시작할 무렵의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 당시는 우리나라가 일본에 탄압받던 시절이다. 일제는 어떻게 어린이들을 교육하고자 했을까가 주 이야기로 나온다.
'온양 명륜 심상소학교'로 입학하셨으나 '국민학교'가 되어버린 슬픈 이야기가. 한국인이면서 한국말 대신 일본어를 써야만 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나온다.
왜 '심상소학교'가 '국민학교'로 바뀌는지,
왜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바뀌었는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해줄 어른들이 몇이나 될까.
이어령 선생님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보따리를 풀면서 그 당시 일제 사회의 잘못된 억압과 잘못된 교육관에 대한 호통을 하신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잔재들에 관해서도.
"국민을 위해, 나라를 위해 가르치는 것이 교육일까? 아니다.
한 사람의 인격체로 성장해 꿈꿀 수 있는 주인공이 되고, 가장이 되며, 국민이 될 토대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교육이다. 붕어빵처럼 국가가 요구하는 인간을 만드는 의무교육이어선 안된다. 83p"
이어령 선생님의 어린 시절 별명은 '질문 대장'이었다고 한다. 늘 호기심이 많았고 늘 궁금한 게 많아서 늘 주변 어른들께 질문을 했지만 아무도 제대로 된 답을 들려주지 못했더란다.
그래서 선생님 스스로가 자신의 궁금증에 대한 공부를 스스로 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남겨주셨다. 자신과 같은 질문 대장들을 위해서. 그들의 지적 호기심에 대한 지혜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그리고 질문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어른들을 위해서.
"창생이라는 말, 백성이라는 말, 국민, 신민이라는 말, 공민과 시민이라는 말, 그리고 인민과 민중이라는 말.....
말이 바뀔 때마다 찢기고 피투성이가 되고 가위에 눌리면서 살아야 했다. 66p"
책의 첫 부분에서는 이어령 선생님이 입춘방을 처음 써보셨던 추억 이야기와 함께 한자에 대한 뜻풀이들이 잠시 나온다.
고대 사람들에게 조개와 양이 어떤 의미를 가졌었는지. 그 뜻이 글자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두런두런 설명해 주신다. 이 부분은 예전에 아이들을 상대로 한자를 가르쳤던 적이 있었던지라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나와서 추억여행하듯이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의 첫 부분의 즐거움과 그 뒤에 이어 나오는 이어령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진정 할아버지의 옛이야기를 듣는 듯이 즐겁게 흘러가서 좋았다. 다만, 중학생 자녀를 두고 있는 터라 항상 책을 읽을 때에 아이한테 읽어보라고 추천해 줄 요량으로 추천도를 생각하곤 하는데, 이 책은 안타깝게도 추천도가 많이 떨어진다. 나에게는 즐거웠던 한자와 언어 이야기, 모국의 언어를 잃어버린 자들의 이야기, 전쟁과 탄압에 대한 슬픔. 이런 것들을 지금의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아이가 어른이 되어 세상 보는 눈이 좀 더 넓어졌을 때에 꼭 한번 읽어줬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어떻게 탄압받았는지 역사의 산증인의 이야기들을.
그리곤 생각해 본다. 난 아이에게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줄 수 있을까. 에어컨이 없었던 시절과 집집마다 집 전화기가 놓여 있었고 손으로 직접 쓴 편지를 주고받았던 시절이 있었노라고. 일기 쓰듯 동화를 들려주듯 그렇게 한번 내 보따리를 풀어내보고 싶다.
그러고 보니 그립다. 지금은 집안의 티브이는 대형 전시품이 되어버렸다. 모두 각자 자신의 폰만 들여다본다. 거실 티브이 앞에 밥상을 차려서 온 식구가 모여 티브이를 틀어놓고 다 같이 예능을 보면서 다 같이 서로의 안부를 물으면서 한솥밥을 먹던 그런 어린 시절이 있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줬을 뿐인데 그 이야기 자체가 역사적으로 기록 유산이 된다는 것이 슬픈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멋지다고 생각된다. 안네의 일기를 지금 사람들이 역사를 잊지 말자며 읽어보는 것 같이 이어령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많은 이들이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