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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피안
하오징팡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최근 중국 작품들이 자주 눈에 띈다. 과거 해외 문학이라면 미국이나 일본 문학이 중심이었는데, 중국 문학들도 대중화되고 있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 <인간의 피안>은 SF소설로 하오징팡이라는 중국 작가가 쓴 소설이다. 나는 처음 제목을 보았을 때 '피안'이라는 단어에서 '유토피아'를 떠올렸다. 불교의 '반야심경' 마지막 구절에서 '가자, 가자, 피안(저 언덕)으로 가자'하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피안은 깨달음의 세계, 더 이상 괴로움이 없는 이상향의 세계를 뜻한다. 피안의 상대말로는 차안(이 언덕)이 있는데, 괴로움의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뜻한다. 불교에서 가져온 이상향적인 의미에 따라 작가가 궁극적으로 가키는 것이 '피안'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작가는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차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피안'을 잠깐 빌렸을 뿐이라 말하며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차안'임을 말한다. 차차 나오겠지만 작가가 말하는 '차안'은 인간이고 '피안'은 인공지능이다. 작가가 인공지능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공지능을 통해 인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인간의 피안>은 하오징팡이 쓴 6가지 단편소설이 실린 단편소설집이다. 모든 소설은 인공지능이 일반화 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이 소설들 하나하나가 참 정교하게 쓰여진 SF소설로 인공지능이라는 최점단의 영역에서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었던 것은 작가인 하오징팡의 놀라운 이력도 한 몫한다. 하오징팡은 아시아 랭크 2위 칭화대학에서 물리학 학사와, 천체물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또 중국발전연구재단에서 국가정책 연구원으로 일하며 '인공지능'과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과학을 전공하고 AI 분야에서 일을 한 그녀의 경험이 소설의 현실성과 사실성에 밑바탕이 되었다.
6편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흥미로우면서도 던지는 메세지는 강력했다. '당신은 어디에 있지'에서는 인공지능을 탑재한 사이보그가 아바타처럼 자신을 대신하여 여러 곳에서 동시에 등장하고 일을 처리한다. 나의 분신같은 사이보그가 나를 대신하는 것은 효율성으로 보면 훌륭하지만 과연 그런 시대에 진정한 나는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재밌는 물건이 나온다. 최첨단 치마라는 게 있어서 입고 있는 사람의 기분을 감지해 위로가 필요하면 온도를 올리고 몸을 부드럽게 압박해주어 마치 다른 사람이 허깅으로 나를 위로해주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사람의 체온과 사람의 몸이 아니라 사람은 멀리에 있고 최종적으로 기계가 대신 위로해주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마주보고 있으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지적했던 기사가 떠올랐다.
'사랑의 문제'에서는 인간의 말과 인공지능의 말이 서로 다를 경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AI도 복수를 할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전차 안 인간'에서는 기계와 인간이 싸우게 되고 다행이 당신은 강력한 기계로부터 선택을 받아 안위를 보장받지만 대신 선택받지 못한 인간들을 억압하도록 강요된다면 당신은 기계의 편에 서겠는가, 인간의 편에 서겠는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마치 일제시대에 배부르고 등 따신 배신자가 될 것인가 풍찬노숙의 독립군이 될 것인가 하는 그 시대 사람들의 고뇌를 떠올리게 한다.
'건곤과 알렉'에서는 초고도화 슈퍼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3살 아이를 분석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아이의 순수하고 즉흥적인 행동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슈퍼 인공지능은 어떻게 분석했는가를 엿볼 수 있다. 나는 5살 아이를 키우고 있는데 아이는 꼭 뭐든 자기가 직접 하려고 한다. 엘리베이터 버튼도 내가 먼저 누르면 난리가 난다. 자기가 누르지 않았다고 울고 소리질러 기어이 내가 누른 것을 취소하고 자기가 다시 눌러야 울음을 멈춘다. 여기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인공지능은 그 모습을 이렇게 분석했다. "아이는 직접 목표에 도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이 그 과정을 완성하길 고집함으로써 효율을 끌어올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작가에게 딸아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 부분은 분명 양육하면서 영감 받아 쓴 것이라 추측해본다. 아이의 행동을 인공지능의 관점을 빌려 색다르게 표현한 것이 재밌다. 한편으로는 아이라는 근원적인 인간의 모습에서는 효율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말에서 인간은 효율과 거리가 멀 때 더 인간답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 같다. 효율이라면 양잿물도 마실 것 같은 요즘 시대에 곱씹어 볼 만한 지적이다.
양으로 보나 제목의 연관성으로 보나 '인간의 섬'을 작가는 이 책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했을 것 같다. '인간의 섬'에서는 불완전하고 불확실하고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비효율적인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옳은가, 완전하고 확실하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면서 효율적이까지한 인공지능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우리는 두려움, 분노, 슬픔을 느낀다. 이런 감정적인 요소들이 실제로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하는 것은 사실이다. 사람이 싸울 때를 생각해보면 더 잘 이해가 된다. 대게 감정 싸움이 말 싸움이 되고 주먹 싸움이 된다. 최악에는 이성을 잃고 살인도 저지른다. 과연 이렇게 감정적인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옳은가. 오히려 완전하고 이성적인 존재에게 통제되는 것이 전 지구를 생각해 볼 때 유익하지는 않을까. '인간의 섬'을 읽으며 단순한 옳고 그름의 문제로 결론 짓기는 어렵게 느껴졌다.
내가 꼽는 이 책의 가장 최고의 소설은 '영생 병원'이다. 6개의 소설 중 이 소설이 유일하게 인공지능이 메인이 아니다. 여기서는 인간복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죽어가던 사람도 살려낼 만큼 잘하는 병원이 있다. 그런데 알고보니 죽어가던 사람은 사실 이미 죽었고, 살아 나온 사람은 죽어가던 사람의 몸과 두뇌를 그대로 복사한 복제인간이다. 가족들은 그것을 모른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우연히 그것을 알게되면서 생기는 갈등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결코 만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진실을 밝히려는 주인공과 그 병원의 원장 사이의 대화 중 내 머리를 치는 문장이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위로이지 진실이 아닙니다. 아시겠습니까?" 단순히 본다면 이는 분명한 범죄다.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 옳은 것이고 병원은 잘못한 것이다. 가족들을 속였으니 사기죄이고, 사람을 복제했으니 의료윤리적인 문제도 있다. 환자는 병원에서 죽었고 살아있는 것은 복제인간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병원에서는 할만큼 다 했다. 환자는 어차피 죽게 된다. 자신이 죽고난 후 가족이 상처받고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자신을 대신할 존재로 인해서 환자는 마음 편히 마지막을 맞을 수 있고 그들의 가족들의 행복도 지켜진다. 그렇다면 과연 병원으로부터 피해 본 사람이 있는가, 병원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 그리고 내 기억과 내 몸이 그대로 똑같이 복제된다면 과연 진짜 나와 가짜 나라는 것이 타인들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함께 한 추억도 기억도 모두 같은데 둘 모두가 진짜가 아닐까. 내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쓰라린 진실이 중요한가, 달콤한 거짓이 중요한가. 행복하지 않은 진실이 진실한 것인가, 행복한 거짓이 진실한 것인가. 행복한 꿈을 꾸는 이를 괴로운 현실로 굳이 깨워야 하는가.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 참으로 난감하고 어려운 주제였다.
소설의 시사하는 하나하나가 결코 가볍지 않다. 최근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과 함께 딥러닝의 등장으로 AI기술은 날로 발전하고 있다. 알파고로 더 이상 바둑에서는 인간이 기계를 이길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바둑에서 끝나지 않는다. 많은 해외의 권위있는 논문과 보고서가 십수년 내에 상당한 일자리리가 인공지능으로 대체 된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이 소설이 결코 먼 미래의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미 인류는 인공지능의 심지에 불을 붙었다. 이제 '얼마나 빨리' 되느냐만 남은 것이다.
이 책은 빠르게 도래하고 있는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인공지능이 과연 넘볼 수 없는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생각하게 한다. 소설을 읽고 나니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공지능에 관심을 가진다는 작가의 말을 알 것도 같다. 이런 엄청난 세상을 SF소설로 구현해내는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부단히 자신의 답을 독자들에게 암시했다. 하오징팡의 답이 잘 담긴 부분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만약 우리가 더는 눈빛을 통해 소통하지 않고, 더는 데이터 이외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며, 인생에는 이익의 최적화 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여기지 않고, 위대한 예술가가 전해주는 전율을 느끼지 못한다면, 마찬가지로 우리도 만물의 영장으로 불릴 자격을 박탈당한 채 그 자리를 다른 존재들에게 넘겨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정신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그 어떤 종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미래와 관련해서 내가 유일하게 우려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