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스리랑카주의자입니다 - 보리수, 바다거북 그리고 실론티 나의 스리랑카 견문록
고선정 지음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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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리랑카주의자 입니다>는 스리랑카와 사랑에 빠진 한 여행자의 스리랑카 애찬론이 가득 담긴 책이다. 스리랑카는 인도의 동남쪽 인도양에 있는 남한의 3분의 2 크기 되는 섬나라로 지도로 보면 꼭 물방울처럼 예쁘게 생겼다. 저자는 스리랑카를 소개하는 '사진 한 장'을 보고는 첫 눈에 반해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고 여행을 떠났다. 책을 읽다보면 대놓고 드러내진 않았지만 중간중간 세계여행에 대한 그녀만의 내공이 느껴지는 부분들이 나온다. 이미 여행이란 다녀볼 만큼 다녀본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고 25년간 하던 일도 그만두고 여행지를 주거지로 바꿔버린 스리랑카의 매력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책은 가이드북이 아닌 에세이로 스리랑카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길라잡이라고 저자는 말했다. 그녀의 좌충우돌 리얼 로컬 여행기에는 스리랑카의 사회, 문화, 종교, 정치와 함께 그 속에서 살아가는 밝고 따뜻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도 들어있어 스리랑카를 곧 갈 사람에게도 혹은 스리랑카에 갈 계획이 없는 사람에게도 유익한 책이었다. 이 책은 물방울처럼 생긴 섬나라 스리랑카를 '북부 지역', '동부 내륙 지역', '중서부 지역', '중남부 고산 지대', '남부 해안과 콜롬보'로 5개 장으로 나누어 다루고 있다.


 

잠깐 책의 디자인을 이야기하고 가야겠다. 요즘 책들은 내용 뿐아니라 디자인도 예쁘게 나오는데, 이 책에서도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쓴 흔적들이 보였다. 책을 보면 녹색 바탕에 스리랑카의 여행지를 대표하는 상징물들이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고 오랜지 색 'Sri-Lanka'라는 영문에는 붉은 금박이 부분적으로 입혀져 있어 번쩍번쩍 인도양의 진주라 불리는 스리랑카의 '보물섬'의 이미지를 나타내고 있다. 참고로 신밧드가 발견한 보물섬이 스리랑카다. 표지 재질도 '큐리어스 스킨'이라는 촉촉하고 부드러우며 지문이 생기질 않는 종이로 되어있어 고급스러움까지 더한다. 크기는 보통 책보다 살짝 작으면서도 두깨가 500페이지에 달해 아담하고 귀여우면서도 묵직한 느낌을 주어 손에 꼭 쥐고 있으면 뭔가 알수없는 만족감이 밀려오는 듯하다. 책 내부에 스리랑카 지도나 큰 지역을 나누는 장과 여행지를 나누는 절의 도입부 마다 일러스트레이터가 오밀조밀 그려놓은 예쁜 그림은 책에 애착을 가게 만든다.


 

스리랑카는 기본적으로 불교의 나라이지만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 천주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한다. 종교에 따라 종족이 구분되는데 불교를 믿는 토착 세력인 싱할라족과 힌두교를 믿는 인도에서 이주해 온 타밀족이 있다. 타밀족은 인도 남부에 살았던 사람들인데 지리적으로 인도 남동부에 있는 스리랑카가 가까워 역사적으로 침략과 이주가 이어졌고 그 인연의 시작은 무려 2천 5년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 연유로 스리랑카는 싱할라어가 표준어이지만 타밀어도 공용으로 쓰이고 있다.



 

 

두 종족은 사는 지역이 구분되어져 있으며 서로 다른 종족의 지방으로 가는 것을 꺼려한다. 실제로 타 종족의 지역에 갔다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책에 언급된다. 두 종족의 갈등으로 발생했던 내전은 27년간 지속되었고 2009년에 종식되었다. 10만명의 사상자와 백만명 이상의 난민을 발생시킨 끔찍한 내전은 표면적으로는 끝이 났지만 아직도 사람들 마음 속에 두려움과 증오의 상처로 남아있는 듯하다.


 

마치 오랜 옛적부터 왜구가 한반도를 수시로 침략해 왔듯, 인도 남부 타밀족들은 스리랑카를 숱하게 침략해왔다. 그러다 16세기부터 포르투칼, 네덜란드, 영국에게 식민지배를 받게된다. 그 과정 속에서 수많은 자원과 문화유산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 중 대표적인 유산은 <트리피타카야>로 팔리어로 된 '삼장'이며 이는 불교 역사상 최초로 성문화된 경전이자 인류 역사상으로도 가장 오래된 문헌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팔만대장경>의 원류가 바로 이 경전이다.


 

1948년 스리랑카는 제국주의의 지배에 독립하지만 정치적 혼란을 겪었고 식민지 이후에도 영국은 타밀족과 싱할라족 사이의 감정을 조장하여 싱할라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이런 감정의 갈등이 심화되어 1983년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고 그것이 27년이나 이어진 것이다. 일제 독립 이후 강대국의 이념에 조종당해 발발했던 3년의 한국 전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제국주의 잔재가 종교 갈등을 조장하여 발발시킨 27년의 스리랑카 내전의 처참했을 비극이 더욱 공감되었다. 스리랑카의 역사에 묘하게 우리의 역사가 오버랩되어 동병상련의 아픔이 느껴졌다.


 

무거운 이야기는 그만하고 주제를 조금 돌려보자. 책의 표지에 스리랑카를 '보리수', '바다거북', '실론티'의 나라라 소개했다. 앞서 스리랑카의 토착민인 싱할라족은 불교를 종교로 하며 전국민의 70%정도가 된다. 불교에서 '보리수' 나무는 깨달음을 상징하는데, 부처님이 불교 4대 성지로 잘 알려진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셨기 때문이다. 과거 보드가야의 부처님이 성도하신 곳에 세워졌다는 마하보디사원에 갔을 때 그 보리수 나무를 실제로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부처님 당시의 보리수 나무는 아니었다. 스리랑카의 보리수를 옮겨 심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된 영문일까?



 

불교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전륜성왕으로 추앙받는 인도의 아쇼카 대왕의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그는 폭군이면서 인도 역사상 최고의 성군의 평가를 받는 정말 다이나믹한 인물이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99명의 형제를 죽인 악명을 남겼고 한편으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여 최초로 인도 전국을 통일한 위대한 업적도 남겼다. 여기서는 그의 불교에 대한 인연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데, 무시무시했던 그는 불교 탄압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후에 잔혹했던 삶에 회의를 느껴 오히려 불교에 귀의하였고 반대로 불교 부흥에 힘써 역사상 불교를 가장 번성시킨 왕이 되었으니 정말 다이나믹의 끝판왕이라 할 만하다.


 

현존하는 불교의 유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아쇼카 대왕이 세운 '아쇼카 석주' 덕분이었다. 막강한 위세를 자랑했던 그는 인도 뿐 아니라 주변 국가들에도 영향력을 미쳤는데 그 힘은 불교 전법에도 사용된다. 이는 우리의 역사와도 이어지는데 아쇼카왕이 신라에 불상을 만들 금과 철을 보냈다는 기록도 있다 한다. 아쇼카 대왕은 보드가야의 보리수 묘목을 전법사와 함께 스리랑카로 보낸다. 그 이후 인도 역사에서 불교는 완전히 쇠퇴하고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도 죽게되는데 지금의 보드가야의 보리수 나무는 스리랑카로 가져갔던 보리수를 다시 가지고와 심은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가모니의 보리수 나무는 인도가 아닌 스리랑카에 있다.


 

불교에 관심이 있는 나에게는 더 보이는 것이 있었다. 부처님께 뿌자(의식)를 하는 장면에서 사람들이 쟁반을 가지고 왔는데 그 안에 '키리바스'라고 하는 밀크라이스가 있었다 했다. 저자는 왜 밀크라이스를 진상하냐고 묻자 들고 있던 여인은 이른 아침이라 부처님께 부드러운 밥을 올리는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부처님이 성도하시기 직전 받았던 공양이 수자타의 우미죽, 즉 우유(牛)와 쌀(米)로 만든 죽인 것을 안다면 왜 밀크라이스를 뿌자에 가져왔는지 충분히 설명이 될 것이다.


 

'아담스브리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는데, 앞서 스리랑카는 섬나라라고 했다. 그런데 위성사진으로 확대해보면 인도의 동남부와 스리랑카가 실같은 열도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아담스브리지'인데, 역사에 부처님이 스리랑카에 법문을 하러 3번 방문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때 이 길로 전법의 길을 떠나셨다 한다. 과거에는 인도와 스리랑카가 이 길을 통해 육로로도 왕래가 가능했지만 지금은 수심이 깊어져 흔적만이 남아있다. 관련해서 인터넷에 찾아봤는데, 일부 남아있는 바닷길 위로 버스가 다니는 장면은 충격적이기까지했다. 아참, 버스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우리나라 버스는 앞쪽에 노약자석이 있는데 스리랑카 버스에는 앞 좌석이 스님 전용석이라 한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좀 해볼까. 저자는 여자 혼자 단신으로 다니다 보니 늘 위험이 도사리기도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위험으로 그녀에게 동정을 느껴 쉽게 마음을 열어주고 도와주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다. 재밌는 부분 중 하나는 그녀가 스리랑카 친구들에게 밥을 사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닭고기 세 조각을 담은 외소한 그녀와 다르게 덩치 큰 스리랑카의 남자 사람 친구들은 고작 한 조각씩 올린다. 스리랑카의 불교 신자들은 소고기나 돼지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육식을 해도 닭고기나 생선을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육식을 할 때도 한 조각 정도만 먹는데, 오계 중 불살생의 계율을 통해 가능한한 살생을 줄이고 인간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소비만 하겠다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비롯된 것이다. 종교의 가르침이 사람들의 식습관에도 영향을 끼치는 사례라 하겠다. 인간의 맛에 대한 탐착으로 좁은 사육장, 열악한 환경에서 길러져 그 끝에는 도축장의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불쌍한 가축들이 떠올랐다. 육식을 즐겨하는 나이기에 마음 한편으로는 불편한 마음만 마음 한켠에 있을 뿐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식문화로서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레 실천하고 있는 스리랑카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5, 6살 아이들이 벌이는 마라톤 대회도 인상적이었다. 땡볕에서 그것도 맨발로 하는 마라톤을 아이들은 자진해서 참가하고 있었다. 나도 5살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부모에게 한참 떼쓰고 보챌 그 아이들이 어른스럽게 완주를 마치고 어른들은 걱정도 말리지도 않고 응원으로 자랑스럽게 지켜본다. 그리곤 완주한 아이들에게 다가가 가득한 축하와 다리를 마사지를 해주는 모습이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저자는 요즘 한국에서 과연 땡볕에서 맨발로 장거리 경주를 하려는 어린 아들딸을 그냥 두고보는 엄마는 없을 것이라 말한다. 공감한다. 하지만 스리랑카에서 그것은 크게 이상한 것이 아니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마음가짐을 길러가는 것이 성장이라면 생물학적으로 같은 나이의 우리나라 아이들보다 스리랑카의 아이들이 더 어른스럽다 할 수 있으리라. 마음이 아프더라도 아이의 고통과 도전을 묵묵히 응원하는 마음으로 지켜봐 줄 수 있는 부모와 그것에 기꺼이 도전하여 자신감 성취하는 아이, 그런 건강한 모습이 요즘의 우리나라에서는 희귀한 것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말한 "한국의 1980년대쯤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라는 말처럼 과거에는 우리는 그랬는데 어째서 요즘은 그렇지 않게 된 것일까. 선진국에 걸맞게 육아환경도, 교육환경도 분명 대체로 좋아졌지만 모든 것이 과거보다 좋아진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저자는 스리랑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스리랑카를 소개할 때 '실론티'를 말해준다 한다. '실론티'는 홍차의 대명사로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실제 지금도 그 이름의 음료도 팔고 있다. 여기서 '실론'이란 스리랑카의 옛 이름이다. 스리랑카는 현재 전 세계의 홍차 소비량의 50%에 해당하는 30만톤 이상을 매년 생산하고 있다. 홍차하면 인도의 다즐링도 유명한데, 인도와 스리랑카에서 생산되는 차의 상당량은 영국에서 소비된다. 여기서 홍차의 유래가 나오는데 흥미로워 소개해본다. 원래 유럽으로 처음 차가 넘어갈 때는 녹차가 넘어갔다한다. 하지만 과거 뱃길이 시간이 올래 걸리다 보니 배안에서 차들이 발효가 되어 시커멓게 변해버린 것이다. 워낙 차 값이 비쌌기에 무역상들은 색이 변해버린 검은 녹차라도 울며 겨자먹기로 우려마셨는데, 그 맛이 쌉쌀하면서도 깊은 풍미를 냈기에 의외로 괜찮았던 것이다. 그런 우연한 해프닝으로 홍차의 기원이 시작되었다. 실제 홍차를 우려보면 붉은 빛을 띄기에 왜 영어로 '블랙티'라고 할까 생각할 수 있는데, 발효된 녹차의 색이 검었기 때문에 그리 불리게 된 것이다.



 

 

저자가 만난 동물 중 바다거북이와 흰긴수염고래는 내가 스리랑카를 가야할 이유를 더해주었다. 아이들은 참 고래를 좋아한다. 아이가 졸라서 다양한 종류의 고래 피규어를 사주게 되었는데,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그렇게 많은 종류의 고래가 있는지 알게 되었다. 고래 중 으뜸은 단연코 '흰긴수염고래'이다. 흰긴수염고래 한 마리의 무게는 코끼리 스물다섯 배의 무게와 맞먹으며, 몸 길이가 무려 28미터(아파트 9층 높이)로 지구 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 아이가 고래를 너무 좋아해서 어떻게 보여줄까 하다가 세부에 고래상어가 있다해서 아쉬운대로 그거라도 언젠가 보여줘야지 했는데, 스리랑카에서는 그 '흰긴수염고래'를 볼수 있다고 하니 아이만큼이나 나도 설레였다.


 

저자가 스노클링을 하며 바다거북이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스킨스쿠버 하는 사람들이 바다거북을 보면 운이 좋았다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는 아예 이름이 '터틀 비치'인 곳이 있어 매일 매일 거북이들을 만날수가 있다 한다. 스리랑카어로 '캐스바'라 불리는 바다거북은 이미 사람들과 많이 친해져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먼저 사람에게 다가오는 친밀함마저 보였다. 스리랑카의 히카두와에는 거북이 보호소가 여러 곳 있어서 멸종 위기에 처해진 거북이의 개체 보존에 힘쓰고 있다고 한다.


 

저자는 여행하다가 한국말이 유창한 한국에서 일했었다는 이력의 스리랑카인을 만나면 살짝 긴장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나쁜 처우를 받지 않았나 내심 걱정이 되어서였다. 그 대목을 읽었을 때 나도 한 가지 떠오른 기억이 있었다. 과거 몽골에서 여행할 때였다. 우연히 한 프랑스 가족의 벤을 얻어 타게 되었는데 그 차의 몽골인 기사가 내가 한국인 것을 알고는 우리말로 인사를 했다. 거기에 덧붙여 과거 한국에서 일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그가 할 줄 아는 한국어는 몇 문장에 그치는듯 했고 의사소통을 하기엔 부족해 보였지만 한국어를 아는 것이 뭔가 그를 우쭐하게 만들고 있는 듯 보였다. 어쨌든 타지에서 우리말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 반가운 마음이 들어 몇 마디 받아줬는데 곧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그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데 내 말을 가로막더니 나중에는 '가! 가!'라며 개를 쫒는 손짓으로 불쾌한 행동을 남발했다. 그때 그가 왜 나에게 그랬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저자가 걱정했던 상황과 연관되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200만명을 넘는다고 하는데 한때 "사장님 나빠요"라는 개그맨의 유행어가 있었듯 그들에 대한 차별과 같은 부당한 대우, 회사의 임금체불, 사장의 갑질과 같은 여러 문제들은 여전히 사회면에 보도되고 있다. 관련 기사를 읽을 때마다 안타까워만 했던 그 일이 돌고돌아 내가 그들의 나라에 갔을 때 그 과보를 돌려받게 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주노동의 아픈 역사가 있다. 멀게는 일제시대 지구 반대편의 미주까지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자로 갔었고 가까이는 60, 70년대 파독 광부나 간호사로 남의 나라 궂은 일을 하러 우리 국민들이 갔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도 과거 그런 처지로 힘들었으면서 어째서 그들의 처지를 이해하기는커녕 차별과 멸시로 대하고 있는가. 개도국을 갔을 때 한국말 잘하는 현지인이 혹시나 한국에 대한 악감정이 있을까 걱정할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에도 사회적 관심을 충분히 기울여야하지 않을까.



 

스리랑카의 교육제도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하면, 입시제도가 인상적이었다. 대학을 진학하고 싶은 아이들은 세 과목을 선택해서 심화학습을 시키고 시험에 합격하면 대학입학은 물론 교육비 전액 국가가 부담한다. 단 불합격하면 대학에 들어갈 기회가 없다고 한다. 한번의 기회만 주어진다는 것이 조금 불합리해 보일 수 있지만 학비를 국가가 전액 부담한다는 것은 선진적으로 느껴졌다. 한번의 기회를 주고 합격하면 국가가 다 책임져주고 떨어지면 다른 길을 찾아가는 제도가 한편으로는 나쁘지 않게 여겨지기도 한다. 학생들 입장에서도 사실 대학에 가고 싶지 않은데 남들 다 가니까, 혹은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진학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극심한 학력 인플레로 전공과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그런 장농 학위라면 뭐하러 재수, 삼수해서 대학갔으며 그 사이 학비로 얼마나 부모님의 등꼴과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허비했던가. 그런 걸 생각해볼 땐 차라리 저런 제도로 일찌감치 아니다 싶을 땐 다른 길을 찾게 하는 것도 괜찮아 보이기도 했다.


 

작가의 문장 중에 마음에 꽂히는 말이 있어 소개한다. "편한 방법을 마다하고 굳이 난감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데도 버스나 기차 여정을 고집한 이유는, 그때는 그 과정을 통과의례처럼 생각해서였던 것 같다." 스리랑카의 물가는 싸다. 여행사의 밴이나 전용 택시를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 기사가 딸린 차를 전세내도 그렇게 비싸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그 편한 길을 놔두고 덜컹거리는 버스와 연착되는 기차를 타며 굳이 사서 고생을 한다. 나도 인도여행을 할 때 그랬다.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사서 고생하는 마음을 뭐라고 표현할지 몰랐는데 저자가 그 심리를 '통과의례'라는 네 글자로 너무 잘 표현해 주었다. 국문학과 출신이라 이렇게 글을 잘 쓸까. 저자의 글은 참 세련되고 감성적이면서 전문적인 느낌이 난다. 처음 책을 낸 사람 같지가 않다. 분명 개인적으로라도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일 것이다.


 

25년간 일을 했다면 적어도 40대는 될 것으로 추정되는 저자는 평생을 쌓아온 한국에서의 커리어도 포기하고 혈혈단신 낯설은 땅과 사랑에 빠져 그곳에 정착했다.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지금 스리랑카에서 지낼 땅을 사고 집도 짓고 있다 했다. 나는 도대체 스리랑카의 무엇이 중년의 여성으로 하여금 그런 인생의 경로를 틀어버릴 용기를 내게 했을까 하는 의문으로 책을 읽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이제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이 책은 누구라도 스리랑카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할 그녀의 마음이 가득 담겨 있다. 보리수와 실론티, 바다거북이와 흰긴수염고래가 있는 나라, 인도양의 진주, 알리바바의 보물섬, 스리랑카. 이 책은 기꺼이 새로운 세계로 독자를 초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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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이끄는 입보리행론
산티데바 지음, 하도겸 엮음 / 시간여행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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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1300년 전 남인도의 한 승려가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설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 승려의 이름은 바로 산티데바, 한자로는 적천(寂天, 고요한 하늘)이고 이 책의 원제는 그 유명한 <입보리행론>이다. <입보리행론>은 엄밀하게는 산티데바가 쓴 책이 아니라 그가 한 법문을 들은 대중들이 후에 모여 결집한 것이고 구전된 것이기에 다른 초기경전들처럼 운문체이지만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에서는 번역할 때 산문체로 바꾸었다. 이유인 즉슨, 운율이라는 것이 언어적 특성에 기인하기에 번역하면 본래의 느낌을 살리기가 어렵다. 거기다 시구들은 그 내용을 함축하고 있어 10장 971송으로 된 원전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난해하다는 문제점이 있다. 요기들이 많이 보는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도 운문체의 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보더라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입보리행론>을 번역한 하도겸 역자는 문체와 같은 부분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바꾸었기에 단순히 '옮김'이 아니라 '편저'라고 했다.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책의 원전인 <입보리행론>의 제목부터 생소할 것이다. 한자를 직역하면 '보리행에 입문하는 방법을 논한 책'이라는 뜻이다. 역자는 보리행에 대해 '대승의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육바라밀'이라 했다. 육바라밀이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6가지 방법이라는 뜻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6가지 수행법을 뜻한다. 혹, 생소한 종교적 용어에 너무 머리 아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본질은 어려운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보리행을 하는 사람이 곧 보살인데, 그래서 역자는 이 책을 '보살 따라하기 지침서'라고 했다. 금강경에 보살의 정의가 나오는데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고자 마음 낸 선(善) 남자, 선 여인'라고 했다. 보살이라는 말은 대승불교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소승불교가 자신의 해탈, 열반이 최우선인 것에 비해 대승의 보살에게는 자신의 해탈, 열반 못지않게 중생의 해탈, 열반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소승, 대승이라는 용어도 나만 탈 수 있는 작은 배(小乘),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타는 큰 배(大乘)라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대승의 지장보살은 당장 해탈열반을 할 수 있는 경지임에도 지옥중생을 내버려두고서 자신만 괴로움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며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나서 제일 마지막으로 해탈열반하겠다 서원한 보살로 대승의 사상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불교서적이기에 불교용어나 윤회 같은 종교적 세계관, 개념들이 나온다. 불교서적이라 불교도들에게만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면 나는 이 책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역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보라 했다. 1300년 전 인도에서 쓰여진 이 책은 현대 문화와 인식의 잣대로 보면 불편하거나 허황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부처님과 보살들에 대한 신격화된 표현이나 남성수행자 중심으로 언급된 부분을 예로 들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도, 신화를 읽을 때도 우리는 가려서 읽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 문헌에는 비유와 은유가 많이 사용되어 있고 그 시대의 문학적 표현들이 담겨있기에 곧이 곧대로 믿거나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고 있는 유익한 지혜를 잘 찾아내야 한다. 이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관점으로 읽는다면 얻어가는 것이 많을 것이다.


보리심은 깨달음의 지혜(Bodhi)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산티데바는 보리심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기를 원하는 마음(원보리심)과 다른 하나는 보리심을 실천하는 마음(행보리심)이다. 신라시대 원효와 더불어 최고의 승려고 꼽히는 의상조사가 방대한 화엄경을 짧은 시구로 압축해서 표현한 법성게에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보리행을 실천하며 살아야겠다는 그 첫 마음(초발심)만 내도 부처의 깨달음(정각)을 이룬 것이라 했다. 결론적으로는 실천이 중요하겠지만 그 실천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기에, 원보리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서술방식에서 조금 독특한 점은 의문문이 많다는 것이다. 심할 때는 페이지 문장의 반은 마침표고 반은 물음표로 끝나기도 한다. 대부분 수사의문문의 형식으로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는 물음인데, 서술이 진행될 만하면 연이어 나오는 질문공세에 처음에는 살짝 어색하기도 했는데 간화선이 떠올랐다. 스승에게 받은 화두로 자나 깨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간화선의 수행자처럼 독자들에게 계속 질문과 의심을 던져 스스로 참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책에서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라는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연기사상은 불교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사상이다. 연기란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모든 현상에는 다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앞부분을 공간에 대한 연기라면 뒷부분은 시간에 대한 연기로 말할 수 있다. 공간에 대한 연기는 결국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 즉 '모든 것은 하나'라는 동체대비의 개념으로 연결되어 불교의 이타심과 자비심의 뿌리가 된다. 그리고 나와 당신이, 나와 우주가 하나라는 생각은 나라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와 공(空)사상과도 연관된다. 시간에 대한 연기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고 결과가 있다면 분명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인연과보(因緣果報)와 이어지고 나쁜 원인을 차단하여 해로운 결과를 막는 계율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공간적 연기의 자비심과 시간적 연기의 인연과보는 불교사상의 근간이며 보살 수행법에 녹아들어 있다.


"모기나 쇠파리 등 해충에 물리거나, 굶주리거나 목마르거나, 옴 같은 가려운 피부병이 걸리는 등을 인내의 기회로 보지 못하고, 아무 의미 없는 하찮은 고통으로만 여긴단 말입니까?" 굶고 목마르고 아픈 것은 분명 큰 고통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을 피하고 싶은 기피 대상이 아니라 나의 인내를 키울 기회로 볼 것을 제안한다. 불교의 묘미는 저런데 있는 것이 아닐까. 부처님과 이름있는 보살님들에게 나를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고통스러운 일들 속에서도 나에게 이로운 점을 찾아 삶의 기회로 삼아버리는 '관점의 전환'이 핵심인 것이다.


이런 관점은 다음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염리심(厭離心)'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행복은 씨앗조차 좀처럼 쉽게 생기지 않지만, 고통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세속이 싫어져 멀리하는 마음인 염리심도 생기지 않아 해탈할 수가 없게 됩니다." 건강할 때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을 잘 지켜나가면 제일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다 작은 병이 찾아오면 그에 따른 고통과 불편으로 경각심을 느껴 더욱 건강에 힘쓰게 되고 큰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된다. 염리심은 '싫어하여 떠나는 마음'인데, 이 책에서는 닥친 불행이 너무도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그 염리심을 고통이 아닌 오히려 해탈로 나아가는 변곡점으로 보면서 최악의 불행마저도 축복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법과도 같은 관점 전환의 힘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에 대해서 재밌는 표현이 있었다. "우리는 몽둥이에 맞았더라도 몽둥이가 아닌 때린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분노에 휘둘린 것이니 분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몽둥이가 나를 때렸지만 그것은 사람이 휘둘렀기에 사람을 탓하는데 까지만 생각이 미친다. 하지만 산티데바는 '휘둘린' 몽둥이가 아닌 '휘두른' 사람에게 화내듯, '휘둘린' 사람이 아닌 '휘두른' 분노에게 화내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다. 발상이 재밌지 않는가. 그리고 이 말은 뒤집어 보면 분노에 '휘둘린' 사람에게 화를 낸다면 사람에 '휘둘린' 몽둥이에 화를 낸 것과 같다는 말이되어 사람에게 화내면 몽둥이에게 화내고 있는 바보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화를 내는 것은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산티데바의 재치를 엿볼수 있었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용서의 가르침이 있듯 불교에서도 같은 내용이 있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강조하기에 그런 공통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으나 그 당위성을 말하는 논리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표현이 있었다. "원수를 통해서 제가 인욕을 성취했다면 인내의 결과를 원수에게 먼저 보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큰 분노를 통해 인욕(인내)를 기를 수 있으므로 인욕을 가르쳐 준 원수에게 복수가 아닌 보답을 하라는 것이다. 죽일 놈의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애시당초 그는 나에게 인욕의 가르침을 준 스승이기에 용서할 것도 없고 오히려 내가 존경하고 감사해야한다는 논리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정법'과 동일하게 공양해야 마땅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산티데바는 '남에게 이것을 주면 무엇을 먹어야 하나?'라는 우리의 질문을 '내가 이것을 먹으면 남에게는 무엇을 주지?'라는 보살의 질문으로 바꾸라고 말했다. 그것은 나가 아닌 남을 위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인데, 얼핏 들으면 너무 손해보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 두려움, 고통은 모두 '나'라는 집착에서 오는 것인데, 나를 온전히 버리는 이타행을 통해서 괴로움, 두려움, 고통도 함께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 행복은 남에게 주고 남의 고통은 내가 받고" 라는 표현은 이타행의 끝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는 보통 세상 살이의 상식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 같고 그런 것은 책에서나 가능한 소리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우리가 삶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이런 것을 동떨어진 소리로 여기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그 병에 대한 약입니다" 하고 이미 약을 받아 손에 지녔음에도 먹지 않고 '누가 이런 약을 먹겠어' 하며 계속 병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리는 몰라서 길을 못가는 것이 아니라, 알지만 길을 안가서 못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영화 <두 교황>을 봤었다. 거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인류적인 문제에 대해 기가막힌 대사를 날리는데, 너무도 인상적이라 따로 적어놓았었다.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면 그것은 모두의 책임입니다.(When no one is to blame, Everyone is to blame.)" 진리에 가까이 간 사람들은 그 과정과 경로만 다를 뿐 결국은 한 곳으로 수렴하는 것일까. 한 종교의 최고 지도자가 했던 저 명언은 1300년 전의 다른 종교 수행자의 법문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그 고통이 누구의 것이라 할 수 없다면, 우리 모두의 고통과 다르지 않습니다." 산티데바는 자비심과 연민을 이야기하며 저런 명언을 남겼다. 앞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어록과 산테데바의 경구가 묘하게 서로 닮아있지 않은가. 진리에 가까이 간 사람들은 너와 내가 따로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데 종교의 구분이란 그저 방법론의 차이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종교적 배타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얼마나 비종교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산티데바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 해보자면 그의 삶은 부처님의 삶과 묘하게 닮아있다. 그도 부처님처럼 고대 인도의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다. 왕위에 오르기 전날 밤 꿈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고는 홀연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훌륭한 수행자가 된다. 산티데바의 어머니는 바즈라요기니로 소개되어 있는데. 바즈라는 한역하면 금강을 뜻하며 요기니는 요가수행자를 의미한다. 이 책의 중간에 요가나 요기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나오는데, 아무래도 불교든, 요가든 결국 인도 고대 철학인 베다의 사상적 풍토 위에서 탄생한 것이니 상호간 연관성이 있기에 책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책의 중간중간에는 인물사진, 풍경사진들이 담겨있는데 '나마스떼코리아'가 주최한 히말라야사진공모전 수상자들이 재능기부를 해준 것이라 한다. 네팔의 히말라야 산의 장엄함과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이 담겨있어 책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사진 중에는 들판에서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있는데, 이 책의 인세는 전액 NGO로 기부되어 네팔 안나푸르나 산골 오지마을 어린이들을 지원하는데 쓰인다 하니, 이 책 자체가 보리행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나도 과거 네팔에 갔을 때 아이들이 그곳에서 얼마나 열악하게 공부하고 있는지 직접 보았던 경험이 있어 역자의 기부가 더 따뜻하고 훌륭하게 느껴졌다.


이 책의 제목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표현은 윤회사상과 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윤회론에서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려면 과거에 엄청나게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선업을 쌓아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게 전생의 인연으로 어렵게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괴로움의 윤회를 끊어버릴 지혜를 얻기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여기고,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불행하게 살며 나와 남을 해치고 있지 않은가 하고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의 무상함을 통해서 늘 지금 여기서 만족하고 행복할 것을 가르쳐주려 하는 것 같다.


달라이라마도 이 책의 원전인 <입보리행론>에 대해 언급하길 "일체중생을 위해 깨닫겠다는 마음인 보리심에 대해 설한 책 중 이보다 더 뛰어난 논서는 없다"고 했다한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이끄는 1300년 전의 지혜 <입보리행론>의 우리말 번역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책의 내용도, 책으로 인한 수입도 보리행, 보살행으로 가득 차있는 이 책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보면 어떨까.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결심한 그 첫 마음만으로도 이미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던 '초발심시변정각'을 다시한번 떠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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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방정식 오일러 공식
데이비드 스팁 지음, 김수환 옮김 / 동아엠앤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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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방정식 오일러 공식>은 5개의 숫자로 이루어진 간단한 수식 하나가 한편의 불후의 명작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는 책이다. 제목에서 처럼 이 책의 주인공인 오일러 공식은 스위스의 수학자 레온하르트 오일러가 발견한 수식, 'e^(iπ)+1=0'를 말한다. 컴퓨터 자판으로 쓰다보니 지수표현을 삿갓(^)으로 쓸수 밖에 없어 본래 수식의 아름다움이 줄어 아쉽지만 책 표지에 딱 하고 자리잡고 있으니 그걸 보고 음미하면 되겠다.


전기전공자인 나에게 이 수식은 굉장히 익숙하다. 하지만 수학 관련된 전공이 아닌 일반인이라면 분명 생소할 수 밖에 없다. 수학이라면 치가 떨려 일찍부터 소위 '수포(수학포기자)'를 선언한 사람들 수가 적지 않아서 일 수 있지만 고등학교 때 수학 좀 했다하더라도 이 식은 알기 어렵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수학책에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수식을 알 수도 있는 것은 이 식으로 소설과 영화가 나온 적 있기 때문이다. 2004년에 발표된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은 그 뜨거운 인기에 2006년 영화로도 개봉되었다. 물론 나도 그 영화를 봤었다. 당시 학부생이었던 나는 너무나 친숙한 저 수식에 끌려 영화를 보게 되었고 이번 책도 그런 반가움에 끌려 읽게 되었다.


불필요한 사족을 잠깐 달자면, 위의 식은 일반형이 아니다. 원래 일반형은 'e^(iθ)=cosθ+isin(θ)'이고 위의 식은 θ가 π인 경우에 한 한다. 나는 저 공식을 'Euler's identity(오일러 항등식)'로 배웠는데, 오일러 공식, 오일러 방정식, 오일러 항등식으로 다양하게 부르지만 저자도 책에서 밝히듯 엄밀히 수학적으로 따지면 의미가 구분되어야 하나 교양서적이기에 스무스하게 넘어가자.


저자는 서두에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쓴 것은 수학이 최고의 수면제라고 여기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오일러의 공식에서 느꼈던 그 엄청난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이며, 위대한 수학이 위대한 문학이나 예술처럼 흥미롭고 아름다운 것임을 공감하고 싶어서라했다. 하지만 뒤에 유명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책에 방정식을 하나 쓸 때마다 독자가 반으로 준다"던 말을 인용하며 수십 개의 식이 담긴 이 책을 읽을 독자는 아마 100만분의 1만큼 귀한 사람들이 아닐까하며 작은 우려도 내비쳤다.



나는 저자의 용기와 포부에 정말 큰 찬사를 보내면서도 내심 걱정이 되었다. 특히 7장에서는 sin, cos의 삼각함수나 좌표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나마 용기내서 이 책을 잡은 독자들마저 좌절의 늪에 빠지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인내심을 갖고 끝까지 읽어낸다면 분명 얻어가는 게 많을 것이라는 것과 생소하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새롭게 배울 것이 많다는 신호라는 크게 도움 안되는 소리뿐. 한 가지 위안이 되는 말을 해준다면, 저자는 이 책의 독자층을 수학은 오래도록 잊고 산(어쩌면 애시당초 배운적 없는) 일반인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썼다고 '분명히' 밝혔고 그의 초등학교 6학년 딸을 대상으로 한 마루타 실험에 성공했다 하니 너무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가지 더 첨언하면 이 책을 읽고 "사람이 숫자 다섯 개 달랑 들어 간 짧은 수식 하나로 이렇게 책 한권 쓸 만큼 수학과 사랑에 빠질 수도 있구나, 수학이란 게 생각했던 것 만큼 소름돋게 징그러운 학문은 아닌가봐"하는 정도의 독자들의 인식변화만 있어도 저자의 용기 있는 도전은 성공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용을 조금 살펴보자. 우전 책은 공식에 들어가기 앞서 이 공식을 만든(아니, 발견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지 모르겠다.) '오일러'라는 수학자에 대해 조명한다. 오일러가 살았던 18세기 유럽은 소위 계몽주의 시대라 불리던 시기로 모든 분야가 가릴 것 없이 폭발적으로 인류의 지성이 꽃피우던 시기였다. 당대 인물들의 이름을 열거해보자면 모짜르트, 하이든, 헨델, 볼테르, 디드로, 몽테스키외, 임마누엘 칸트, 루소, 라부아지에, 애덤 스미스, 제레미 벤담 등 자세히는 몰라도 이름만 들으면 '아~'하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다. 저자는 그런 쟁쟁한 천재들 가운데 유명세로 치면 볼테르와 함께 1, 2위를 다투던 '오일러'였지만 당대 그의 뛰어난 업적과 명성에 비해 후대에 상대적으로 알려진 것이 적다며 아쉬워한다.


우리에게 와닿는 오일러의 업적으로는 원주율을 π로 쓰는 것이나 삼각함수의 sin, cos 표기, 자연상수라 불리는 e의 표기도 오일러가 한 일이다. 특히 e는 그의 이름 'Euler'의 첫자를 딴 것으로 '오일러의 수'로도 불리며 오일러가 사랑했던 숫자라 전해진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쓰고 있는 표기들 속에는 우리도 모르게 오일러의 흔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는 오일러가 수학자로 등장하지만 그는 물리학, 천문학, 공학 분야에서도 놀라운 직감과 함께 뛰어난 천재성을 드러냈으며 18세기 출간된 모든 수학, 과학분야 연구의 4분의 1은 오일러가 집필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많은 연구를 했다 한다. 또한 역사상 가장 다작한 수학자로 무려 2만 5000페이지에 달하는 80여 권의 책을 집필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덧붙이자면 그는 언어능력도 탁월했는데 무려 5개 국어를 구사했다 한다.


개인사적으로 그는 특별한 이력이 있었는데, 너무도 연구에 몰두했기 때문일까 28세에 우측 눈 시력을 잃고 59세에는 좌측 눈 시력마저 잃는다. 천재 작곡가 베토벤도 청각을 잃었음에도 그의 작곡은 계속되었듯, 오일러도 시력을 완전히 잃고 죽기 전까지 17년의 세월동안 평생의 업적 절반을 이뤄낸다. 그래서 이 책의 새로운 장마다 그의 초상화가 나오는데 잘 보면 실명한 오른 쪽 눈을 가리려 왼쪽 얼굴이 보이도록 고개를 돌린 것을 알수 있다. 앞이 보이지 않자 그는 연구실에 있던 커다란 둥근 탁자의 모서리를 잡고 돌면서 운동을 했다고 하며 시력을 잃은 후 "마음을 산만하게 하는 것이 하나 줄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긍정적 마인드의 소유자였다. 그는 머리뿐 아니라 가슴도 훌륭했던 사람이었다.



드디어 본론으로 들어가서 오일러의 공식을 살펴보자. 'e^(iπ)+1=0'라는 식이 신의 방정식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무것도 관계없는 5개의 숫자들이 너무도 간단한 식으로 묶여진다는 것이다. e는 자연상수로 무리수이자 초월수이다. 이것 외에도 자연계에서나 통계학에서 e는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전기공학에서는 이상적 배터리와 저항이 연결된 회로의 시간에 대한 배터리 방전 전압 그래프가 e를 밑으로 하는 지수의 형태로 나타난다.우리에게 친숙한 π는 원주율을 나타내며 원의 반지름만 알면 둘레는 물론 넓이를 구할 수 있는 원과 깊은 관련이 있는 숫자다. π도 무리수이자 초월수이다. 궁금해 할 것 같아 짧게 이야기하면 무리수는 분수로 표현할 수 없는 수를 말하며, 소수로 표현하면 끝이 나지 않는 수이다. 초월수는 정수를 계수로 하는 다항식의 해가 될 수 없는 수이다. 잘 몰라도 괜찮다. '아, 그렇구나'하고 넘어가도 책을 읽는 데 문제가 없다.


i는 '-1'의 제곱근을 의미하며 허수를 만들어 주는 수이다. 허수는 과거 많은 수학자들에게 외면과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미적분을 발명한 천재 수학자 라이프니츠가 허수를 보고 "존재와 비존재 사이에 존재하는 양서류"라고 표현한 것이 유명하다. 이런 허수는 19세기나 가서야 제대로 이해가 되기 시작했기에 오랜 세월 미지의 영역에 감춰져 있었던 숫자다. 1도 특별한 숫자인데, 모든 숫자에 곱해도 값이 변하지 않는 유일무이한 특징을 가지며 덧셈을 통해 모든 자연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0은 비어있음(空), 없음(無), 시작을 의미하고 좌표계에서는 양과 음을 가르는 기준이 되며, 곱셈으로 어떤 숫자든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마법같은 숫자이다. 특히 0과 1은 2진법으로 모든 수를 나타낼 수 있어 이 숫자들로 디지털 세상이 만들어졌다. 출신 성분상 아무 관련 없는 이런 숫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아름다운 꽃과 같은 식을 피워낸 것이다.


이 식에는 두 가지 무한의 의미가 들어있는데, 첫 번째는 위에서 e, π는 끝없이 이어지는 무리수인 것에 무한의 의미가 있고, 두 번째는 오일리 공식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무한급수(무한한 수열의 합)에 무한의 의미가 들어 있다. 또 오일러의 공식의 일반형을 보면 허수를 포함한 지수함수가 복소수 형태의 삼각함수의 합으로 나타나는데 여기서도 무관할 것 같은 지수와 삼각함수가 하나의 등식으로 그려진다. 무한의 상상력에 존재와 존재 아님의 허수가 붙고 서로 관계없는 개념들이 한데 어우러져 놀라움과 신비함을 자아내는 것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순히 작은 숫자들이 깔끔하게 배치되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념들을 간결하고 단순하게 나타내면서도 속의 숨겨진 복잡성을 매력적으로 혼합하고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잇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이 수식은 단순히 심미적 형태와 심오한 수학적 의미뿐 아니라 실용성까지도 갖췄는데, 이는 내가 이 수식에 익숙한 것과 연관있다. 오일러 공식은 그 자체로 훌륭한 교류전기회로 해석모델링의 도구가 된다. 이는 미분을 해도 적분을 해도 형태가 같은 e의 지수함수 특징과 연관되며 복소평면에서 오일러 공식의 기하학적 의미와도 연관된다. 오일러 공식의 'e^(iπ)'는 기하학적으로 복소평면에서 180도 반시계 방향의 벡터회전을 의미하는데, 저자가 이것을 두고 여명부터 황혼까지의 태양의 움직임, 계절의 변화, 인생 역전같은 이미지를 연상하여 오일러 공식에 문학적 의미를 더해주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책은 오일러와 오일러의 공식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수학적인 지식에 대해서도 습득할 수 있도록 한다. 마지막에는 오일러 공식의 유도과정과 i^i가 실수임을 보이는 증명을 부록으로 담고 있어 책을 읽으며 자신감을 기른 독자들에게는 좋은 도전거리가 될 것 같다. 끝으로 앞에서 소개한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서 나온 대사가 나의 감정과 저자의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아 그것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밤하늘에 빛나는 별 하나의 아름다움, 들에 핀 한 송이 꽃의 아름다움, 그런 것들을 설명하기 어려운 것처럼 이 수식의 아름다움을 설명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이 아름다움은 반드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수학에 애정을 가지고 함께 노력해 주시길 바랍니다."

-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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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인원 - 끝없는 진화를 향한 인간의 욕심, 그 종착지는 소멸이다
니컬러스 머니 지음, 김주희 옮김 / 한빛비즈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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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기적 유인원>은 아프리카 유인원의 한 종에 속하는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가 어떻게 생겨나서 어떻게 망해가는가에 대한 우리 인간 종의 일대기를 통찰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기적 '유인원'>의 제목은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쓴 과학계 고전이자 걸작 <이기적 '유전자'>의 패러디이자 오마주를 의미한다. 1962년 왓슨과 크릭은 DNA의 구조를 밝힌 공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는다. 나선형 DNA의 구조의 발견은 유전자의 비밀을 밝히는 연구에 상당한 탄력을 가했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14년 뒤인 1976년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가 세상에 나온다. 진화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유전자이며 인간은 단순히 유전자가 타고 있는 자동차나 그릇 정도에 불과하다는 그 책은 나왔을 당시 생물학계를 넘어 많은 대중들에게 폭발적 반향을 일으킨다. 더 강력해진 유전자 이론과 진화론을 바탕으로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통해 무신론을 주장하여 다시 한번 종교계를 비롯해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든다. 그런 배경을 알면 이 책 <이기적 유인원>의 표지 한 가운데 '리처드 도킨스'의 한줄평이 왜 그렇게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지 이해가 된다.


이 책의 구성은 '지구', '발생', '몸', '유전자', '임신', '지성', '무덤', '위대함', '지구온난화', '우아함' 총 10장으로 이뤄진다. 앞서 이 책이 인간 종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그려내고 있다 했다. 목차를 가지고 말짓기를 해서 책의 내용을 표현해 보면, 인간의 종이 있기 위해서는 '지구'가 전제되어야 하고 종이 '발생'되어 '몸'을 갖추고 '유전자'에 의해 진화되어간다. '임신'을 통해 종이 이어지며 '지성'을 무기로 살아남았고 때가 되면 죽어 '무덤'으로 간다. 문명을 발전시킨 '위대함'이 있으나 이면에는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여러 반지구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있으며 우리에게 남은 것은 '우아함'의 종말 뿐이다.


어떤가, 시작도 과정도 좋은 데 끝이 너무 암울한가? 저자 니컬러스 머니는 균류 생물학 교수로 생물학자이다. "인간이 멸종하면 나머지 자연계는 환호할 것이다."라는 문장이나 "21세기에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은 명예의 상징이 아니라 환경 테러 행위이다."에서 처럼 나는 그의 문체에서 비관적이고 비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점차 나는 그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인간으로서 인간의 입장에서 이 글을 읽었기에 불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머니는 우리 종에 대해 완벽한 객관화가 되어 있었다. 비록 자신은 인간이지만 인간 아닌 존재의 입장에서 서술해 나간다. 서술의 대상과는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3인칭 관찰자 시점같은 것이랄까. 외계인이 지구의 인간을 분석하듯 전개해나가는 그의 비관적이고 비꼬는 듯한 문체는 그가 떠미는 자료나 근거를 보면 그럴만도 하다고 쉽게 수긍이 된다. 인간에 의해 죽은 생명과 멸종된 종, 지구온난화, 대기와 해양의 환경오염, 삼림벌채, 사막화, 토양 침식, 사막화, 빙하 해빙 등의 문제와 마주한다면 파렴치한 전지구적 가해자로서 우리는 비판과 조롱을 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니까.



나는 공대생 출신으로 과학분야 교양서적을 읽는 데 거부감이나 어려움을 적게 느끼는 편이지만 이번 책은 만만치는 않았다. 그것은 내 전공이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중에서 생물과는 제일 거리가 있는 개인적인 이유도 한 몫했을 것이다. 그래서 중간에 스마트폰으로 검색도 많이 해보았다. 생명공학, 분자의학, 미생물학, 진화생물학, 분자생물학 등의 전문용어들이 등장하는데 그냥 읽고 넘어가도 흐름을 이해하는 데는 어려움은 없지만 독서를 통해 지적 놀라움과 승리감을 맛보는 것 또한 독서의 이유가 되기도 하니 찾아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리고 읽기 어렵게 느껴지는 생경함이야 말로 우리의 무지한 부분을 알려주는 고마운 신호임을 생각해볼 때 이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다.


양장에다 마지막 페이지가 220페이지인 이 책은 그리 두꺼운 편은 아니다. 그리고 그 중 무려 47페이지가 주석이 차지하고 있어 실제 본문은 172페이지에서 끝이 난다. 1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한 장에 보통 15페이지가 할애되어 있는데 47페이지인 주석을 장으로 환산해보면 3장으로 전체 본문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다. 나는 책을 읽으며 앞뒤로 왔다 갔다를 수없이 반복했다. 본문을 계속해서 읽어 나가도 좋지만 저자가 주석에 신경을 많이 써놓은 만큼 그때그때 주석과 함께 읽으면 책을 더 깊이 음미할 수 있다. 이는 한번 더 생각해보면 저자가 그만큼 본문의 주장이 객관적이며 근거가 충분한 것임을 뜻하며 전체가 참이면 결론도 참이라는 연역적 추론의 특징을 떠올려보면 저자의 주장이 충분히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책을 읽다보면 콩고물처럼 부수적으로 알게되는 여러 상식들도 이 책을 읽을 이유가 된다. 지구, 몸, 유전자, 지성과 같은 다양한 주제들은 여러 분야의 내용을 아우르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라는 학명의 유래나 목욕용 천연 스펀지인 해면동물이 우리의 친척이라는 이야기나 인체에 대한 내용 중 입에서 항문에 이르는 내장의 길이가 평균 5미터, 이 중 3분의 2가 소장이라는 것,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가 무려 40조 개, 심장의 하루 박동수가 10만 번, 모든 혈관을 합친 길이가 10만 킬로미터, 뇌가 약 20와트의 전력을 소모하고, 뇌 반구 표면을 펴서 원으로 만들면 지름 39cm의 라지 피자 한판 크기가 된다는 내용들은 시시콜콜하다 할 수 있으나 굳이 찾아보지 않는 한 우리가 접하지 못하는 내용들이기에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 머니가 태어나고 5년 후 영국에서는 낙태가 합법화 되었는데 그는 5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자신은 낙태되었을 거라 이야기하며 낙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그가 낙태에 대해 어떤 의견이든 사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낙태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감각을 지닌 수 많은 동물을 해부하고 학대하며 전례 없는 동물 학대를 저지르는 인간이 한편으로는 아무런 의심 없이 태아의 신성함을 주장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꼬집는다. 과연 인간의 생명은 존귀하고 신성하다고 주장하면서 타 생명은 함부로 해칠 수 있는 권한은 누구로부터 부여받았는가를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노화에 대한 이야기 중 나이가 들어가면서 세포를 구성하는 단백질 분자에 불량품이 섞여 들어가는 비율이 높아져 가는 것을 열역학 제 2법칙인 엔트로피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이는 주로 기계공학에서 기계현상인 열기관이나 냉동기에 사용되는 법칙인데 생명현상인 세포의 노화에 사용한 것이다. 또 해파리가 벌레로 치면 유충에 해당하는 유생일 때 군집에서 떨어져 나와 촉수를 지닌 종 모양의 성체가 되는데 어떤 해파리는 촉수를 몸통으로 다시 넣고 유생 군집에 재합류한 사례를 소개한다. 유생인 해파리가 성체가 되었다가 다시 유생이 되는 것은 흡사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떠올린다. 저자의 비유를 빌리면 실버타운의 노인이 어린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재생의학자들이 영생의 비밀을 풀기 위해 해파리의 회춘능력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아무튼 이 책은 여러 정보와 지식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에 따라 다양하게 채득되고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이 책을 한마디로 표현해 달라고 한다면 '반성'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갑자기 반성이라고 말해서 뭔가 싶을 수 있으나, 이 책을 읽어보면 인간이 자연에게 끼친 악영향에 대해 잘 기술되어 있다. 저자 머니는 과학자로서 이기와 욕망을 가진 인간이 과학과 기술로 어떤 일을 해왔는지 잘 알고 있다. 이제 인간의 종은 중환자실의 시한부 환자처럼 그 '종말'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지금이라도 과거로 회귀하려는 작고 미세한 노력들은 있지만 대세를 바꿀 수는 없으며 인류의 멸망은 얼마나 빨리라는 속도의 문제일 뿐 이미 기정 사실화 된 것으로 진단한다.



인류의 멸종의 다룬 마지막 장의 이름이 '우아함'이라는 것이 의아할 수 있겠다. 부제는 '우리는 어떻게 사라질까?'이다. 그는 죽음을 앞둔 인류에게 어떻게 사라져줘야 하는지 알려준다. '의식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고 잠시나마 자연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지니'는 것이 그가 말하는 '우아함'이며 이를 통해 멸종 앞에 최소한의 정신적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그간 망쳐온 존재들'과 '인간에게 피해 입은 자연의 모든 희생자'를 생각하며 '인간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면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다'고 하면서 '하늘이 무너지기 전까지 모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와 함께 고통받는 다른 존재에게 더 친절하고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이'고 '우리가 잘해 나간다면 이 모든 것이 기대보다 오랫동안 지속될지 누가 알겠'나.


조금 섬뜩한 결론이다. 충분히 전달되었겠지만 앞에 따옴표로 책의 글을 따오다보니 매끄럽지 못해 내 식대로 표현해보자면, '우리 종은 머지 않아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잠시나마 의식을 지녔던 존재로서 이 땅에 살았다는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우아한 태도를 보이자. 그래도 죽음이 겁나고 억울하다면 그동안 우리가 멸종시킨 수많은 종들과 우리가 파괴한 광대한 자연을 떠올린다면 그나마 좀 덜 억울할 것이다. 죽기 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이제라도 속죄하는 길이 있다면 다른 존재에게 지금 보다 친절하고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게 잘되고 운이 좋으면 조금 더 살지도 모른다.' 어떤가, 내가 이 책을 인류 '반성'의 책이라 말했던 것이 공감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 책에서 충분히 자연에 대한 인간의 오만과 자만에 대해 비판했기에 여기에 나까지 첨언하지는 않겠지만 지구온난화 같은 환경문제, 플라스틱 같은 쓰레기 문제 같이 전지구적인 문제에 인류가 함께 반성하고 공감하여 변화해 나갈수 있으면 좋겠다. 이번 코로나 사태 또한 어쩌면 인류가 이미 뿌려놓은 것이 나비효과처럼 불어나 되돌려 받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트럼프가 파리기후협약을 탈퇴한 것을 떠올려보자. 트럼프만 탓할 수 없다. 지난 한주 우리가 마시고 버린 아이스 카페라떼의 일회용 용기와 빨대는 몇 개이던가. 아직도 인류는 정신을 못차렸고 갈 길은 멀다. '다른 사람' 탓하기 전에 우선 '나부터' 돌아보고, '나하나 쯤' 말고 '나라도' 작은 환경실천을 해보면 어떨까. 이 책은 지구 종말 불감증에 걸린 인류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협박도 하고 겁도 주면서 짙은 호소로 자기성찰을 애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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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 숲에서의 일 년 인생그림책 1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지오반니 만나 그림, 정회성 옮김 / 길벗어린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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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월든>은 한 엘리트 젊은이가 남들이 추구하는 삶이 아닌 오직 자신만의 삶을 살아보고자 물질문명을 등지고 호숫가 근처에 오두막을 지어 2년 2개월간 자급자족하며 살았던 이야기가 담긴 책이다. 이번 책 <월든>은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이지만 이것은 원작이 있다. 저 '한 엘리트 젊은이'가 바로 그 유명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이고 저기 나오는 '호수'가 미국 메사추세츠의 작은 마을 콩코드 근처에 있는 '월든 호수'다. 소로의 <월든>은 1854년 처음 세상에 나왔으며 당시에는 유명하지 않았으나, 두 차례 세계 대전을 거치며 참다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중의 목마름 때문일까, 20세기 들어 폭발적으로 읽히면서 '19세기의 성서'라고도 불리는 책이다.


내가 처음 '소로'와 <월든>을 알게 된 것은 두 작가의 책에서였다. 한 사람은 '류시화' 시인이다. 그의 책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에서는 그가 소로를 생각하며 월든 호수를 찾아갔던 이야기가 나온다. <월든>의 월든 호수는 미사추세츠 주의 콩고드라는 작은 마을 근처에 있다. 하지만 류시화 시인은 뉴햄프셔 주의 콩고드 시로 잘못 찾아가게 된다. 결국 다시 '진짜' 콩고드를 갔지만 늦은 밤이되고, 우연히 거기서 소로에 영감을 받아 40년 동안 월든 호숫가에서 살고 있는 한 백인 남성과의 만남이 소개되어 있다. 이를 읽고 언젠가 '소로'의 <월든>을 읽어 봐야겠다고 적어 두고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다른 한 사람, '법정' 스님의 책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다시 '소로'의 <월든>을 만나게 된다. 법정 스님도 소로의 흔적을 찾아 월든을 찾아갔었다. 소로는 간소화한 삶, 최소화하는 삶을 살았고, 세속의 가치가 아닌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였다. 자연을 사랑하고 자급자족하였으며 채식을 하고 독신으로 혼자 살았다 한다. 어떤가, 뭔가 수행승의 느낌이 나지 않는가. 특히 <무소유>로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시대의 스승이었던 법정 스님의 삶과 소로의 삶은 보면 볼수록 어딘가 서로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법정 스님도 앞서 살았던 '서양의 현자'를 찾아 미국까지 가셨던 게 아니었을까.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하버드를 졸업하고 동기들이 모두 성공과 돈을 위해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자신은 물질주의와 자신 아닌 삶을 등지고 자연속으로 들어와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그때 그의 나이 고작 28세였다. 그가 월든에 맨 몸으로 들어갈 때만 해도 그는 책 한권 저술한적 없었으며 지금처럼 저명한 철학가나 사상가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었다. 생태주의, 자연주의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그는 평생을 간소하고 소박하고 도덕적인 삶을 실천하였고 그 모든 철학과 영감의 바탕은 월든 호숫가에서 살던 시절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책을 펼쳐보면 책소개가 나오는데, 두 구절이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함의하고 있는 것 같다. 첫 번째 구절은 "많은 것을 줄이고 간소한 생활을 추구한 그의 철학"이라는 부분이다. 이것은 최근 유행하는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떠올린다. 집 안을 둘러보자. 우리는 얼마나 필요하지 않은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가. 견물생심이라, 홈쇼핑이나 핸드폰의 광고에서, 마트나 백화점의 물건을 보며 우리는 습관처럼 구매를 한다. 버리는 것은 어떤가. 부엌의 찬장, 방의 붙박이장에는 몇년째 손도 대지 않고 이사올 때부터 지금까지 고스란히 모셔져 있는 물건들이 상당히 쌓여있다. 남을 주려니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것 같고 버리자니 또 아깝게 느껴지는 먼지 뿌옇게 쌓인 물건들. 하지만 좀 솔직해져 볼까. 우리집의 그 많은 물건들 중 지난 일주일을 돌아봤을 때 우리가 실제로 사용한 물건이 얼마나 되는지.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있는 것은 줄이고 구매도 최소화하며 간소하고 소박하게 살자는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우리에게 잘 알려지게 된 것도 그런 사회적 필요성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두 번째 구절은 "사람들이 자연을 비롯한 자기 주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들과 관계를 맺으며 생활하게 되기를"이란 부분이다. 집에서도, 직장에서도, 거리에서도, 모니터와 스마트폰에 시선을 빼앗겨 자연과 주변에 관심을 가질 여유조차 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또한 떳떳하지 못하다. 이 책을 읽히고 있을 아이들에게도 우리는 얼마나 자연을 느끼게 해주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한다. 푸른 자연의 식물들과 경이로운 곤충들을 관찰하며 호기심을 마음껏 분출할 아이들이 유튜브나 플라스틱 장난감에 사로잡혀 있도록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하게 된다.


소로는 자기 나름대로의 삶을 살고 싶어 숲에 들어갔다고 했다. 남들이 정해놓은 이정표에 나의 삶을 맡기지 않고 한 순간이라도 깊이 있게 살면서 삶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삶에 대한 강인한 의지와 자신의 삶을 오롯히 신념에 따라 던져버릴수 있는 용기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가 살았던 월든의 오두막은 가장 가까운 인적과도 1.6km 떨어져 있다. 스스로 지은 가로 3m, 세로 4.6m, 높이 2.4m의 4평 남짓한 오두막에서 2번의 무더운 여름과 혹독한 겨울을 보낸다. 식량도 자급자족 했기에 열심히 밭을 일구고 목욕은 호숫가에서 해결한다. 책에서 나오는 문구처럼 "빛나는 시간과 여름날을 마음껏 누렸"으니 비록 돈은 없었지만 그는 부자였다고 했다. 부자라는 말을 생각해보게 된다. 어느 글에서 많이 가진 것이 부자가 아니라 만족하는 것이 부자라고 읽었던 것이 떠올랐다.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에서도 '욕심'의 반댓말은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라 했다. 자린고비처럼 인색하고 나눌줄 모르는 삶은 물질은 있을지 모르나 마음은 늘 허전할 것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삶이 진정으로 마음의 곶간이 가득찬 부자의 삶일 것이다.



이 책에서 나오는 문장 중 마음을 울리는 문장이 있다. '월든 호수가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 '현삼, 민들레, 콩잎, 괭이밥, 말파리, 호박벌이 외롭지 않듯이 나도 외롭지 않다.'는 문장이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갈 수도 있지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 문장을 음미해보자.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형체도 없고 흔적도 없이 우리 삶에 잠식해 들어와 이성적인 판단을 흐리게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만든다. 스트레스를 야기하는가 하면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만나 외로움을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것은 바깥의 어떤 것으로 채울수 있는 것은 아닌듯 하다. 왜냐하면 외로움은 홀로있을 때 뿐만 아니라 '군중 속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느끼기 때문이다. 나의 외로움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내 안에 있다. 외로움의 열쇠는 오직 내가 쥐고 있는 것이다. 다시 소로의 말로 돌아가서, 길가에 홀로 핀 민들레나 호박벌이 외로움에 괴로워 할까? 과거 법륜 스님이 다람쥐나 토끼가 괴롭지 않은데 왜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괴로워하냐고 하셨던 법문을 떠올려본다. 외로울 땐 소로처럼 호수와 나무와 꽃과 벌레와 다른 동물들을 떠올려보자. 그들이 외롭지 않듯, 나도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때, 더 이상 외로움은 나를 괴롭힐 수 없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소로는 결핵으로 45세라는 짧은 생애를 끝으로 삶을 마감한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살았던 고향 콩고드와 청춘시절 그가 2년 2개월을 보냈던 월든 호수는 매년 60만명이 찾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으며, 그의 철학과 사상은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있다. 나는 그림책 제목이 <월든>인 것을 발견했을 때 깜짝 놀랬다. 내가 알던 그 <월든>인 것을 확인했을 때는 기쁘기도 했다. 소로의 대표적인 저서 <월든>이 그림책 판으로 나와 꿈 많고 호기심 많은 어린 아이들도 읽어볼 수 있게 나온 것이 반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부모도, 아이도 <월든>을 통해 소박하면서도 충만히 누리며 사는 삶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를 가져보면 어떨까. 특히 이전에 <월든>을 읽어본 적 없는 부모님이라면, 이 책을 인연으로 원본 <월든>을 만나 새로운 인생관을 경험하게 되는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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