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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이끄는 입보리행론
산티데바 지음, 하도겸 엮음 / 시간여행 / 202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1300년 전 남인도의 한 승려가 어떻게 하면 괴로움이 없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 설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그 승려의 이름은 바로 산티데바, 한자로는 적천(寂天, 고요한 하늘)이고 이 책의 원제는 그 유명한 <입보리행론>이다. <입보리행론>은 엄밀하게는 산티데바가 쓴 책이 아니라 그가 한 법문을 들은 대중들이 후에 모여 결집한 것이고 구전된 것이기에 다른 초기경전들처럼 운문체이지만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에서는 번역할 때 산문체로 바꾸었다. 이유인 즉슨, 운율이라는 것이 언어적 특성에 기인하기에 번역하면 본래의 느낌을 살리기가 어렵다. 거기다 시구들은 그 내용을 함축하고 있어 10장 971송으로 된 원전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난해하다는 문제점이 있다. 요기들이 많이 보는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도 운문체의 시로 이루어져 있는데, 우리말로 번역된 것을 보더라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입보리행론>을 번역한 하도겸 역자는 문체와 같은 부분을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바꾸었기에 단순히 '옮김'이 아니라 '편저'라고 했다.
불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책의 원전인 <입보리행론>의 제목부터 생소할 것이다. 한자를 직역하면 '보리행에 입문하는 방법을 논한 책'이라는 뜻이다. 역자는 보리행에 대해 '대승의 깨달음을 구하는 이들에게 교훈을 주는 육바라밀'이라 했다. 육바라밀이란 괴로움의 바다를 건너는 6가지 방법이라는 뜻으로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의 6가지 수행법을 뜻한다. 혹, 생소한 종교적 용어에 너무 머리 아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본질은 어려운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니까.
보리행을 하는 사람이 곧 보살인데, 그래서 역자는 이 책을 '보살 따라하기 지침서'라고 했다. 금강경에 보살의 정의가 나오는데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고자 마음 낸 선(善) 남자, 선 여인'라고 했다. 보살이라는 말은 대승불교에서 나오는 개념으로, 소승불교가 자신의 해탈, 열반이 최우선인 것에 비해 대승의 보살에게는 자신의 해탈, 열반 못지않게 중생의 해탈, 열반도 중요하다. 그렇기에 소승, 대승이라는 용어도 나만 탈 수 있는 작은 배(小乘),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타는 큰 배(大乘)라는 의미로 만들어졌다. 대승의 지장보살은 당장 해탈열반을 할 수 있는 경지임에도 지옥중생을 내버려두고서 자신만 괴로움의 바다를 건널 수 없다며 모든 중생을 구제하고 나서 제일 마지막으로 해탈열반하겠다 서원한 보살로 대승의 사상을 극명하게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불교서적이기에 불교용어나 윤회 같은 종교적 세계관, 개념들이 나온다. 불교서적이라 불교도들에게만 유의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면 나는 이 책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역자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보라 했다. 1300년 전 인도에서 쓰여진 이 책은 현대 문화와 인식의 잣대로 보면 불편하거나 허황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부처님과 보살들에 대한 신격화된 표현이나 남성수행자 중심으로 언급된 부분을 예로 들수 있다. 그러나 성경을 읽을 때도, 신화를 읽을 때도 우리는 가려서 읽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 문헌에는 비유와 은유가 많이 사용되어 있고 그 시대의 문학적 표현들이 담겨있기에 곧이 곧대로 믿거나 따질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고 있는 유익한 지혜를 잘 찾아내야 한다. 이 책을 읽을 때에도 그런 관점으로 읽는다면 얻어가는 것이 많을 것이다.
보리심은 깨달음의 지혜(Bodhi)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산티데바는 보리심을 두 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기를 원하는 마음(원보리심)과 다른 하나는 보리심을 실천하는 마음(행보리심)이다. 신라시대 원효와 더불어 최고의 승려고 꼽히는 의상조사가 방대한 화엄경을 짧은 시구로 압축해서 표현한 법성게에는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是便正覺)'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보리행을 실천하며 살아야겠다는 그 첫 마음(초발심)만 내도 부처의 깨달음(정각)을 이룬 것이라 했다. 결론적으로는 실천이 중요하겠지만 그 실천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기에, 원보리심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의 서술방식에서 조금 독특한 점은 의문문이 많다는 것이다. 심할 때는 페이지 문장의 반은 마침표고 반은 물음표로 끝나기도 한다. 대부분 수사의문문의 형식으로 '이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는 물음인데, 서술이 진행될 만하면 연이어 나오는 질문공세에 처음에는 살짝 어색하기도 했는데 간화선이 떠올랐다. 스승에게 받은 화두로 자나 깨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간화선의 수행자처럼 독자들에게 계속 질문과 의심을 던져 스스로 참구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이 책에서도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도 없다'라는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연기사상은 불교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사상이다. 연기란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렇기에 모든 현상에는 다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앞부분을 공간에 대한 연기라면 뒷부분은 시간에 대한 연기로 말할 수 있다. 공간에 대한 연기는 결국 너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 즉 '모든 것은 하나'라는 동체대비의 개념으로 연결되어 불교의 이타심과 자비심의 뿌리가 된다. 그리고 나와 당신이, 나와 우주가 하나라는 생각은 나라할 것이 없는 무아(無我)와 공(空)사상과도 연관된다. 시간에 대한 연기는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고 결과가 있다면 분명 원인이 있을 것이라는 인연과보(因緣果報)와 이어지고 나쁜 원인을 차단하여 해로운 결과를 막는 계율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공간적 연기의 자비심과 시간적 연기의 인연과보는 불교사상의 근간이며 보살 수행법에 녹아들어 있다.
"모기나 쇠파리 등 해충에 물리거나, 굶주리거나 목마르거나, 옴 같은 가려운 피부병이 걸리는 등을 인내의 기회로 보지 못하고, 아무 의미 없는 하찮은 고통으로만 여긴단 말입니까?" 굶고 목마르고 아픈 것은 분명 큰 고통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을 피하고 싶은 기피 대상이 아니라 나의 인내를 키울 기회로 볼 것을 제안한다. 불교의 묘미는 저런데 있는 것이 아닐까. 부처님과 이름있는 보살님들에게 나를 구해달라고 애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고통스러운 일들 속에서도 나에게 이로운 점을 찾아 삶의 기회로 삼아버리는 '관점의 전환'이 핵심인 것이다.
이런 관점은 다음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나는 이 책에서 '염리심(厭離心)'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행복은 씨앗조차 좀처럼 쉽게 생기지 않지만, 고통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고통이 없으면 세속이 싫어져 멀리하는 마음인 염리심도 생기지 않아 해탈할 수가 없게 됩니다." 건강할 때 꾸준한 운동으로 건강을 잘 지켜나가면 제일 좋겠지만 그러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다 작은 병이 찾아오면 그에 따른 고통과 불편으로 경각심을 느껴 더욱 건강에 힘쓰게 되고 큰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된다. 염리심은 '싫어하여 떠나는 마음'인데, 이 책에서는 닥친 불행이 너무도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그 염리심을 고통이 아닌 오히려 해탈로 나아가는 변곡점으로 보면서 최악의 불행마저도 축복으로 만들어버리는 마법과도 같은 관점 전환의 힘을 이야기하고 있다.
화에 대해서 재밌는 표현이 있었다. "우리는 몽둥이에 맞았더라도 몽둥이가 아닌 때린 사람에게 화를 냅니다. 하지만 그 사람 역시 분노에 휘둘린 것이니 분노에게 화를 내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몽둥이가 나를 때렸지만 그것은 사람이 휘둘렀기에 사람을 탓하는데 까지만 생각이 미친다. 하지만 산티데바는 '휘둘린' 몽둥이가 아닌 '휘두른' 사람에게 화내듯, '휘둘린' 사람이 아닌 '휘두른' 분노에게 화내는 것이 옳다고 말하고 있다. 발상이 재밌지 않는가. 그리고 이 말은 뒤집어 보면 분노에 '휘둘린' 사람에게 화를 낸다면 사람에 '휘둘린' 몽둥이에 화를 낸 것과 같다는 말이되어 사람에게 화내면 몽둥이에게 화내고 있는 바보와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가 된다. 화를 내는 것은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어리석은 행동임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산티데바의 재치를 엿볼수 있었다.
성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용서의 가르침이 있듯 불교에서도 같은 내용이 있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강조하기에 그런 공통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 자체는 그다지 새로울 것 없으나 그 당위성을 말하는 논리에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그와 관련된 재미있는 표현이 있었다. "원수를 통해서 제가 인욕을 성취했다면 인내의 결과를 원수에게 먼저 보답해야 합니다." 우리는 큰 분노를 통해 인욕(인내)를 기를 수 있으므로 인욕을 가르쳐 준 원수에게 복수가 아닌 보답을 하라는 것이다. 죽일 놈의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애시당초 그는 나에게 인욕의 가르침을 준 스승이기에 용서할 것도 없고 오히려 내가 존경하고 감사해야한다는 논리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정법'과 동일하게 공양해야 마땅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산티데바는 '남에게 이것을 주면 무엇을 먹어야 하나?'라는 우리의 질문을 '내가 이것을 먹으면 남에게는 무엇을 주지?'라는 보살의 질문으로 바꾸라고 말했다. 그것은 나가 아닌 남을 위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인데, 얼핏 들으면 너무 손해보고 사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여기에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괴로움, 두려움, 고통은 모두 '나'라는 집착에서 오는 것인데, 나를 온전히 버리는 이타행을 통해서 괴로움, 두려움, 고통도 함께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내 행복은 남에게 주고 남의 고통은 내가 받고" 라는 표현은 이타행의 끝을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는 보통 세상 살이의 상식과는 좀 동떨어진 이야기 같고 그런 것은 책에서나 가능한 소리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쩌면 우리가 삶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이런 것을 동떨어진 소리로 여기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그 병에 대한 약입니다" 하고 이미 약을 받아 손에 지녔음에도 먹지 않고 '누가 이런 약을 먹겠어' 하며 계속 병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우리는 몰라서 길을 못가는 것이 아니라, 알지만 길을 안가서 못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영화 <두 교황>을 봤었다. 거기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인류적인 문제에 대해 기가막힌 대사를 날리는데, 너무도 인상적이라 따로 적어놓았었다.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면 그것은 모두의 책임입니다.(When no one is to blame, Everyone is to blame.)" 진리에 가까이 간 사람들은 그 과정과 경로만 다를 뿐 결국은 한 곳으로 수렴하는 것일까. 한 종교의 최고 지도자가 했던 저 명언은 1300년 전의 다른 종교 수행자의 법문에서도 그대로 나온다. "그 고통이 누구의 것이라 할 수 없다면, 우리 모두의 고통과 다르지 않습니다." 산티데바는 자비심과 연민을 이야기하며 저런 명언을 남겼다. 앞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어록과 산테데바의 경구가 묘하게 서로 닮아있지 않은가. 진리에 가까이 간 사람들은 너와 내가 따로 없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진리에 이르는데 종교의 구분이란 그저 방법론의 차이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하게 된다. 더불어 종교적 배타성을 주장하는 이들이 얼마나 비종교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산티데바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조금 해보자면 그의 삶은 부처님의 삶과 묘하게 닮아있다. 그도 부처님처럼 고대 인도의 한 나라의 왕자로 태어난다. 왕위에 오르기 전날 밤 꿈에서 문수보살을 만나고는 홀연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여 훌륭한 수행자가 된다. 산티데바의 어머니는 바즈라요기니로 소개되어 있는데. 바즈라는 한역하면 금강을 뜻하며 요기니는 요가수행자를 의미한다. 이 책의 중간에 요가나 요기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나오는데, 아무래도 불교든, 요가든 결국 인도 고대 철학인 베다의 사상적 풍토 위에서 탄생한 것이니 상호간 연관성이 있기에 책에서도 드러나는 것 같다.
책의 중간중간에는 인물사진, 풍경사진들이 담겨있는데 '나마스떼코리아'가 주최한 히말라야사진공모전 수상자들이 재능기부를 해준 것이라 한다. 네팔의 히말라야 산의 장엄함과 소박하지만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이 담겨있어 책의 완성도를 높여준다. 사진 중에는 들판에서 아이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도 있는데, 이 책의 인세는 전액 NGO로 기부되어 네팔 안나푸르나 산골 오지마을 어린이들을 지원하는데 쓰인다 하니, 이 책 자체가 보리행의 실천을 몸소 보여주는 것 같다. 나도 과거 네팔에 갔을 때 아이들이 그곳에서 얼마나 열악하게 공부하고 있는지 직접 보았던 경험이 있어 역자의 기부가 더 따뜻하고 훌륭하게 느껴졌다.
이 책의 제목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는 표현은 윤회사상과 무상을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교의 윤회론에서는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려면 과거에 엄청나게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선업을 쌓아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게 전생의 인연으로 어렵게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괴로움의 윤회를 끊어버릴 지혜를 얻기위해 노력하기는커녕 소중한 목숨을 함부로 여기고,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으로 불행하게 살며 나와 남을 해치고 있지 않은가 하고 경종을 울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삶의 무상함을 통해서 늘 지금 여기서 만족하고 행복할 것을 가르쳐주려 하는 것 같다.
달라이라마도 이 책의 원전인 <입보리행론>에 대해 언급하길 "일체중생을 위해 깨닫겠다는 마음인 보리심에 대해 설한 책 중 이보다 더 뛰어난 논서는 없다"고 했다한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을 이끄는 1300년 전의 지혜 <입보리행론>의 우리말 번역 <다시 돌아가 만나기가 어렵다>. 책의 내용도, 책으로 인한 수입도 보리행, 보살행으로 가득 차있는 이 책에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보면 어떨까. 지혜로운 삶을 살고자 결심한 그 첫 마음만으로도 이미 부처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던 '초발심시변정각'을 다시한번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