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양장본)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박예진 엮음, 버지니아 울프 원작 / 센텐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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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어찌나 맘에 드는지 적어 두고 자주 보며 그녀가 글에 담고자 했던 의도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의미를 담아 보곤 했다. 내 방에 쌓여 가는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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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에도 몇 번이고 기분이 널뛰기를 하네요. 나답지 않은 날들이에요. 이전에 난 참 수다스러웠던가 봐요. 요즘같이 말수가 적어진 모습을 보고 우울해 하는 걸 보면요.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다면 내가 나쁜 사람일까요? 아이들이나 남편이라고 타박하면 기분이 나아질까요? 결국은 내 문제일텐데 자꾸만 왜 이럴까요.

끝이 안 보이는 벼랑에서 떨어지는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잠을 못 자는 이유도 무서운 꿈이 문제인 거구요. 아.. 난 자꾸만 변명 거리를 찾아 대고 있네요. 비겁해졌어요. 말보다 글이 편한 이유는 본래가 소심한 성격이었기 때문이에요.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건 별로 좋지 않은 모습일 텐데. 그 때문에 불안한 구석도 있어요. 아니에요. 생각하지 않을래요. 난 씩씩한 아줌마가 됐으니까요. 미안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아요. 누구에게도요. 그래서 미안해요. 신에게 해야 할 이야기를 이곳에 하고 있네요. 읽기 싫으면 읽지 않아도 돼요. 글의 내용을 묻는 질문은 하지 않을 거니까요.

잔다고 말했지만 책을 더 읽을 생각이예요. 읽다가 졸리면 그때 자려고요. 내일 아침엔 저희 집에서 모임이 있어요. 평소같이 이른 아침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청도에 가고 싶어요. 문학동네 시집이 책장 가득 꽂혀 있는 방으로 말이죠.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있어도 좋을 것만 같아요. 이것도 결국 꿈일 거에요. 혼자 꾸는 꿈이요. 주말엔 어떤 계획이 있으세요? 아.. 말하지 않아도 돼요. 즐겁게 지내시길 바란다는 뜻으로 물어본 거니까요. 세 번을 울컥했어요. 이 짧은 글을 쓰면서 눈물이 넘치려는 걸 세 번이나 참았어요. 다행히도 인내심은 남아 있는 모양이예요. 잘자요. ”

읽기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애정하는 작가가 미치는 영향은 얼마나 될까. 훌륭하다 평가 받는 글 뒤로 작가의 숨은 이야기를 알고 나면 독자들은 얼마나 더 그들을 이해하게 될까. 그녀가 좋아진다, 이전보다 많이. 서둘러 떠난 마지막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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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202]
나는 “유명한”,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모험을 계속할 것이고, 변화할 것이고, 내 마음과 눈을 열 것이며, 낙인이나 고정관념을 거부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며, 그것이 방해받지 않고 자신의 차원을 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 박예진 엮음 편역
**센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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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간간이 인용 문장들을 만나게 된다. 맘에 드는 문장이라면 메모를 해 두고 필요시에 문장의 주인과 속한 글을 검색해 보는 거지. 그만으로도 끌림이 있다면 내 책장에 자리를 내어 주고 읽지 못한 다른 글들에 더 욕심을 내 보기를 반복중이다.

동시대 살았고 마련된 북토크 자리가 있었더라면 버지니아 울프, 그녀가 직접 전하는 문장 소개를 들었겠지. 불합리한 사회를 미워하는 시선을 보여줬을 테고 의식의 흐름대로 이어가는 문장 쓰기 팁을 알려줬을지도 모를 일이지. 여기는 힘을 주어 읽고 저기는 구부려 읽고 이 부분은 슬펐고 저 부분은 인내하며 쓴 글이라고. 아쉽게도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답은 하나다. 이 책을 읽는 거.

그녀의 글이 처음인 이들과, 그녀의 글이 더 궁금한 이들과, 그녀의 글을 깊게 담고 싶은 이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버지니아 울프, 문장의 기억> 작가를 이해하는 동시에 각자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문장들은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일러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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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의 질문
이화열 편역 / 앤의서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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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날의 고요, 잊고 지낸 화분의 새싹, 창밖을 예쁘게 적시는 비, 새로 산 커피 향, 불쑥 배달된 책 선물, 오랜만에 미루던 만남,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들, 아직도 하고 싶은 밀린 꿈, 낯선 길 위의 혼자 여행, 폭신해 보이는 눈꽃, 유난히 붉은 석양, ..

행복은 조용하고 평범한 것.
삶은 그것들로 채우는 열심 그리고 누리는 소확행.

한 살 더 먹었으니 더 재미있게 살되 진중함을 보태고, 더 가치 있게 살되 체면을 앞세우지 말고, 가볍게 살되 소중한 것은 한껏 품어주며 살기. 매해 시작은 이런 지혜로움을 소망한다. 어느 정도는 실현되고 어느 정도는 다시 숙제로 남겠지만 이 또한 내 삶의 모양새니 어떤 결과든 받아들이며 지내는 중이고.

메모장에 실수로 적은 3024년을 보고 크게 웃었다. 그런 날은 어떨지 감히 상상도 안 되는 지금, 미지의 시간을 기대하기보다 현실에 조금 더 충실해 보기로 한다. 이번 해에,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나와 함께 할 책은 [프루스트의 질문, 감정과 취향의 보관 앨범]이다. 이 작은 책엔 100개의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 우린 100개 이상의 답을 적어 볼 수 있겠지. 왜 100개 이상이냐고? 질문을 만나는 매번 우리의 답은 달라질 테고 정답은 없는 거니까.

:

📖
마르셀 프루스트 100주기,
위대한 작가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100개의 질문들

📚 프루스트의 질문 (감정과 취향의 보관 앨범)
📚 이화열 편역
📚 앤의서재

철학적인 질문부터 위트 있는 질문까지, 위대한 작가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100개의 질문! 하루 한 번, 일상을 기록하며 내 삶을 변화시키는 다이어리북!

:

<프루스트의 질문>은 제목에서 짐작해 본 예상과 달랐다. 실제는 프루스트가 만든 질문지가 아니라 그가 답을 적은 노트라고 한다.

** 1887년 어느 날, 프루스트의 친구가 가정교사로부터 작고 빨간 가죽 앨범을 선물 받는다. 프루스트는 친구가 가져온 ‘고백’이라는 글자가 찍힌 앨범의 질문들에 조심스럽게 답을 적는다. 그리고 그 노트에 처음으로 천재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 그려진다.

이 고백 앨범은 1924년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는데, 그 뒤 프랑스의 유명한 텔레비전 문학 프로그램의 진행자 베르나르 피보에 의해 수정되었고, 세계적으로 전무후무한 인터뷰 형식으로 자리 잡는다. **

마르셀 프루스트 100주기를 맞아 프루스트가 답을 적었던 질문에 더해 인생에서 한 번쯤 자신에게 던져보면 좋은 질문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한 번 적은 답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 애초부터 정답은 없는 거니까.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는 질문은 또다른 답을 적게 할 테니 그저 편안하게 적어 보는 거다. 진솔한 기록은 자신의 감정과 취향을 발견하게 되는 방법이 되련다. 마침내는 진짜 ‘나’를 만나게 되는 걸음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프루스트가 직접 답을 했던 질문에는 연도별로 적은 작가의 답을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프랑수아즈 사강, 움베르토 에코, 카미유 클로델, 우디 앨런, 장 뤽 고다르, 이브 생 로랑, 칼 라거펠트, 스티븐 킹, 맷 데이먼, 해리슨 포드, 나파엘 나달 등 프루스트의 질문에 대한 여러 예술가와 유명인들의 답도 만날 수 있다. 추가된 질문들에 프루스트는 과연 어떤 대답을 했을까.

100가지 질문 중 쉽게 쓸 수 있는 답이 있을 거고, 고민스러울 답도 있을 거고, 내일로 미루는 답도 있을 테다. 어느 경우라도 괘념치 말자.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나를 더 들여다보는 시간은 마음의 벽이 얇아져 무너져 내리려는 순간순간들에 힘을 실어줄 진짜 내 얘기가 될 테니까.

감정과 취향의 보관 앨범 <프루스트의 질문> 나를 위한 선물, 너를 위한 선물로 추천해 본다. 새해 선물은 요렇게 뜻깊은 책으로 전해 보면 어떨까.

앤의 서재, [프루스트의 질문]
이번 해에,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래 나(너)와 함께 할 책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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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기 위해 기분전환
임효경 지음 / 전환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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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최갑수작가님의 북토크에 갔었지.
행사가 끝난 뒤에 알았지만
마주 보는 각도에 앉아 소녀같은 활짝 웃음으로
인상적이었던 여자분이 또 한 분의 작가님이셨다.
빈칸놀이터 책방에 준비되어 있던
하얗고 작은 그녀의 책.
앳돼 보이는 작가의 인상과 잘 어울린다.
흐뭇한 마음으로 내 책장에 자리 내어 주기!

[살기 위해 기분전환]
제목의 선두를 지키는 단어가 조금 무겁지만
후방을 지키는 단어가 괜찮다 말해 주고 있으니
마냥 우울한 글은 아닐 거라 기대해 본다.

그리고..
어쩌면 나와 당신의 이야기.. 라 하니
읽을 이유는 충분하잖아.


📖 175
항상 내 옆에 있어줄 무수히 많은 것들.
나는 지금 여기에서 좋아하는 걸 더 좋아할 일만 남았다.


순간/ 나/ 사랑/ 기분 전환
네 개의 주제로 적은 작가의 단상집은
조그만 책이지만 쉽게 읽어버리기엔 미안한 책.

그녀의 고민에 함께 공감해 주거나..
그녀의 희망적 발언에 응원을 보내거나..
직접 찍은 사진에 담긴 숨긴 메시지를 찾거나..

글이란 건
독자의 느낌대로 읽어 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니까.
이 마음 담은 작은 책을 보았다면
그냥 돌아서지 않기로..

글과 어우러진 사진은 작가의 솜씨.
내 지인 H의 분위기와 비슷하단 생각이 든다.
(본인도 인정ㅎㅎㅎㅎ)
그러고 보니 문장의 흐름도 어딘가 닮은 듯해.

‘어쩌면 나와 당신의 이야기’
이런 문장을 괜히 적은 게 아니구나! 역시 작가ㅎㅎㅎㅎ


<살기 위해 기분 전환>
다 읽고 나니 초록 사과가 떠오른다.
겉으로 보기엔 덜 익은 줄 알았는데
새콤달콤한 맛은 이미 사과인.

분명히 말하지만
고유의 사고 방식과 깊이는 따질 일이 아니다.

단지 임효경 작가의 지금의 글은,
지금의 그녀에게 맞는단 생각이 든다.
시간이 더해지면 그녀의 색은 조금씩 짙어질 테고
그런 후라면 임효경 작가의 책은
찾아 읽을 독자들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조용히 응원해 본다~ : )

+

길지 않은 생애지만 나에게도 살고 싶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우연치 않게 시작한 것이 ‘산책’이었다. 산책을 하면서 내 핸드폰 속에는 당연한 절차를 밟듯 ‘기분 전환’ 이라는 제목의 메모장이 생겨났다. 처음엔 콩알만 한 크기였는데 지금은 숨을 쉬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만큼 커다란 숲이 되었다. (p.4)

당신의 ’기분 전환‘은 무엇인가요?
당신의 ‘쉼’은요?
아직 모르겠다 하시는 분들은
이곳에서 조금 쉬었다 가며 고민해 보시면 어떨까요.
산책으로 기분 전환 그리고 메모라는 임효경 작가의 숲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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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 숲과 평원과 사막을 걸으며 고통에서 치유로 향해 간 55년의 여정
배리 로페즈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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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이제 나의 길이 있지만, 그가 그 길을 찾도록 도와 주었다. 우리가 글에서 기대하는 것이 늘 그런 역할이니, 어쩌면 나는 그가 그걸 해 주었다는 말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가 보다.

이 에세이들은 여러 방향으로 난 발자국들이고, 하나하나에 발자국보다 더 오래된 물질이 깊이 파묻혀 있다. 이 발자국이 닿는 데까지만 따라가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이 발자국 을 길잡이 삼아 스스로 땅과 언어의 관계를 더듬고 의미를 탐색해가는, 그렇게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 리베카 솔닛, 서문 중에서 -


배리 로페즈,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궁금해할 이들을 위해서는 어설피 제 말을 섞어 시작하기보다 명성 있는 작가가 전하는 서문을 그대로 옮기는 편이 이로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깊고 커다란 느낌. 그럴 것만 같은 책이네요.

출간 즉시 아마존 1위, 뉴욕 타임스 선정 2022년 올해의 책 그리고 묵직한 추천사들까지. 흥미 이상의 글을 만나게 될 테니 이 글을 읽고 저자가 보여주는 길까지만 가던지, 더 나아가 자신의 길을 찾아나가던지는 우리의 몫인 듯 합니다. 자, 준비되었다면 지체 말고 출발해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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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장소, 인간과 풍경에 대한 탁월한 글쓰기로, “우리 시대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우리 시대 최고의 자연 작가” 등의 찬사를 받은 배리 로페즈의 마지막 에세이 모음집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 이 책은 로페즈가 자기 죽음을 예감하며 편집했던 문학적 유산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뒤인 2022년에 미국에서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책에는 여행 중 마주한 다양한 풍광에 대한 경이로운 기록을 비롯해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담담한 회고록과 부서져 가는 세상에 보내는 간곡한 전언 등 에세이라는 장르로 아우를 수 있는 스물여섯 편의 글이 유려하게 편집되어 실려 있는데요.

특히 성적 학대를 겪은 어린 시절 회고록 부분은 읽는 내내 참담한 심정을 느끼게 했습니다.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펼친 이유는 아마도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는 범주에서 끝낼 것이 아니기에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로 여기도록 함이 아니었을까요. 도움받을 곳이 없었고 피할 곳이 없었지만, 저자는 그 시간 역시 자연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치유보다 숲과 평원, 사막을 걸으며 자연의 치유로 향한 그의 걸음입니다. 그러니 더 따라가 보기로 합니다.

‘힘의 열네 가지 양상’(226~242)을 읽을 땐 다른 페이지에 비해 크게 재미를 느꼈습니다. 이런 비유라면 이해하기가 쉬우려나요. 옴니버스 구성으로 연출된 열네 가지 단막극을 연이어 보는 겁니다. 조명이 켜지며 시작된 이야기는 진중하게 전달되다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보여 주며 페이드 아웃. 관객은 이게 무슨 상황(뜻)인지 따져 보아야 합니다. 나만 모르거나 찝찝하게 넘어가는 건 싫을 테니까 말이죠. 때론 웃음이 나기도 하고 때론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 이 연극 괜찮다 하려는 순간 다시 페이드 인. 연관성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어.. 음.. 오.. 하게 만드는 열네 가지 짧은 글. 인상 깊게 남았습니다.

‘남반구 항해’(256~282)에서는 때론 웅장하고 때론 난폭한 자연 앞에 서 있는 인간이 전하는 여정의 서사와 보고 느낀 바가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행 기록문 같은 느낌인 거죠. 후반부로 갈수록 대자연에 머물던 시선은 시대와 사회를 논하는가 싶더니 ‘어쩌면 저 아이가 있어서 그동안 줄곧 나는 두렵지 않았나 보다.’라는 식으로 마지막엔 인간에게 멈춥니다. 아주 높은 곳에서 훤히 내려다보는 듯한 저자의 시야가 부럽습니다. 그 후에 나오는 문장들은 어찌 부럽지 않겠습니까.

뉴욕과 캘리포니아에서 보낸 감동적이고 때때로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 이야기, 육지 동물과 해양 생물을 연구하기 위해 떠났던 탐험의 후기, 남극을 비롯해 지구상의 여러 특별한 장소를 찾아갔던 여행에 대한 추억, 광활하고 극적인 풍경 속에서 자신을 돌이켜보았던 명상의 시간 등 <여기 살아 있는 것들을 위하여>는 읽을 거리가 참 풍부한 글입니다. 직접 걷고 오르고 건너고 부딪쳐 만나 자연과 나눈 교감은 그의 고민으로 남겨지거나 혹은 여행의 묘사와 문학적인 문장으로 고스란히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습니다. 서두르지 않고 전하는 메시지는 느리게 가는 이 겨울, 읽어 내기에 참 좋은 책인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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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 도시소설가, 농부과학자를 만나다
김탁환 지음 / 해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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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보더라도 샘이 날만큼의 하늘빛이다. 더군다나 혼자 여행이라니. 이 좋은 날 맘에 둔 곳을 가는 이가 몇이나 될까. 고속도로를 달리며 굳이 한눈을 팔지 않아도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은 풍부한 신록이다. 때마침 큰 덩어리로 몰려드는 흰 구름은 여행길을 더 풍요롭게 하고.

국도로 빠지면서 속도를 줄인다. 급한 것 없는 길을 달리는 데 방해하는 이도 없다.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한적하다. 4차선 도로는 내 작은 애마를 위해 닦아 놓은 듯 잘 뻗어 있고 양 길가에 이름 모를 꽃나무는 저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하다. 낯선 방문객의 눈길에 더 흐드러진 모습으로.

남부럽지 않은 운전 실력으로 먼 길도 혼자 나서는 나지만 내게도 약점은 있었다. 길을 잘 못 찾는다는 거. 그런 이유로 친절한 내비녀는 내 여행에 뺄 수 없는 동행자다. 한 번씩 날 골탕 먹일 때는 땀을 좀 흘려야 하지만 대부분은 정확한 안내를 하니 오늘도 믿고 출발했다. 목적지를 불과 몇백 미터 앞둔 상황에서 우회전하란다. 다 온 길이니 거스를 이유가 없다. 잘 뻗은 도로를 놔두고 좁은 길이 나온다. 혹시나 했지만, 목적지까지 거리가 줄어들고 있으니 믿었다. 더군다나 시골 마을 책방이니 좁은 길이 당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작은 논길이다. 다행히 작은 차를 탔으니 통과할 만한 길이다. 웃음이 터졌다. 그럼 그렇지! 이 내비녀 오늘도 내 여행이 부러웠나 보군! 다 와서 엉뚱한 길을 알려 주다니. 결국엔 내 실수지만 탓을 할 그녀가 있어 웃어넘긴다. 논과 논 사이 좁은 길에 차를 멈췄다. 오! 멋지다! 그림엽서나 서정적인 영화의 한 장면에서 나올 법한 풍경이다. 쭉 뻗은 논길. (내가 달리던 길보다 훨씬 넓다) 양옆으로 벼 이삭이 가벼운 바람에 흔들린다. 하늘은 여전히 파랗고 아까 본 구름과 다른 덩어리의 구름이 유유히 지나고 있다. 보통은 사진으로 남기는 게 버릇이지만 이번엔 눈으로 먼저 충분히 담는다. 잘못 들어선 길이지만 충분히 아름다움을 보여준 여행길이다. 마음이 꽉 차게 부풀어 오른다. 사진 한 장을 남겼다.

그러고 보니 오른편에 건물이 있다. 내 목적지가 여기겠구나 싶다. 코 앞에 두고 헤매는 모습이라니 역시 나답다. 핸들을 돌리려는데 그 건물 앞에서 작은 손수레를 끌고 막 이동하려는 남자분이 보인다. 아마도 낯선 차가 헤매는 모양이 걱정스러우셨겠지. 낯선 이가 좁은 논길에서 뭐 하나 싶으셨겠지.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남자분과 나만 아는 에피소드가 생긴 셈이다. 어디 가서 소문내진 않으시겠지. 앞으로 조금 이동하니 큰 길이 보인다. 다시 우회전만 하면 책방이다.

가끔은 주차할 곳이 마땅치 않아 고민스러운데 이렇게 넓은 마당(?) 주차장이라니 이것 또한 고민스럽다. 책방 주차장인지 다른 용도의 주차장인지 결국 전화를 걸어 고민스럽게 만든 주차장의 위치와 책방의 입구를 물었다. 미실란이란 식당과 같은 건물에서 운영하고 있어 주차장을 공용으로 사용한단다. 아무 곳에 주차해도 무방하며 마당을 지나 쭉 들어 오면 건물 중앙에 책방 입구가 있다고. 안내해 주신 대로 너른 터 한쪽에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두 시간 반을 달려 온 길이니 굳은 몸엔 스트레칭이 필요했지만 눈은 이미 웃고 있다. 여행지의 첫발, 첫 시선, 첫 냄새 그리고 나머지 감각을 동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딱 이 시간이야말로 매번 혼자 여행을 종용하게 만드는 이유지. 핸드폰을 들어 파노라마를 찍는 대신 천천히 몸을 돌려 눈에 담기는 것을 모두 내 것으로 삼았다. 여행. 참 좋은 것.

책방으로 다시 태어난 폐교. 교무실 자리의 짙은 고동색의 나무 바닥을 보니 아직 쓸만한 것 같다. 초를 문질러 열심히도 걸레질했을 어린 손길들이 떠오른다. 더불어 내 어린 시절 기억까지. 허허허.. 기억은 잠시 뒤로 무르고 책방을 살핀다. 탐구한다. 구조와 구성을 눈에 담고 분위기와 온도를 느낀다. 적당한 때에 입에 맞는 책을 찾으면 더없이 행복할 테니까. 여행자로서 임무를 수행 중인데 책방지기님께서 먼저 말을 건다. 공간과 사람에 대한 깊은 (셀프) 탐구 대신 그녀와 나누는 대화 중에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익혔다. 정확도는 말할 것도 없지. 아.. 생태책방 <들녘의 마음>이 몹시 탐이 난다. 여행지로, 책방으로, 무엇보다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러니 집어 들어야 할 책은 하나로 결정 났다. 김탁환,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

📖 65
살아가며 많은 것을 잃고 잊는다.
그렇지만 되살펴 기억할 능력이 우리에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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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농부 과학자 이동현(내가 책방을 코앞에 두고 논길을 헤맬 때 손수레를 밀고 가다 멈춘 이다)이다. <들녘의 마음> 책방 입장 전 복도에서 본 사진으로 생각하자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인상 좋은 곡성 동네 농부 아저씨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곡성에서 발아현미를 연구하고 가공하는 농업회사법인 미실란을 15년째 이끌고 있는 기업가이자 미생물학 박사이며, 2019년 유엔식량기구 모범농민상을 받은 농부이다. 또한 동생물과 공존하는 생태계의 법칙과 인간다운 삶의 철학, 공동체에 흐르는 연대의 힘을 지키며 살아가며 (화려한 이력 뿐만 아니라) 순수한 고집으로 지킬 건 마땅히 지켜나가는 자기 모습을 충분히 어필하고 있다. 이렇게 삶의 겉과 속이 참된 농부 과학자 이동현을 통해 작가는 ‘아름다움은 화려한 겉모습이 아니라 지키는 태도’라는 걸 알아차림과 동시에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거기에 소설가 김탁환 작가의 폭넓은 이야기 소재들이 글을 풍성하게 만들어 읽는 재미를 더하고 곡성 지역의 색을 간간이 보여주는 문장들은 자못 여행 에세이같은 느낌마저 드니 이 책은 한 권으로 여러 분야를 만나게 하는 장점이 있다. 더불어 ‘치유 사진 작가’ 임종진 작가가 곡성과 미실란에서 찍은 사진은 깊어진 사고를 잠시 쉬었다 가게 만드는 편안함을 만들어 준다.

씨앗이 열매를 맺고 다시 씨앗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빗대어 두 사람이 지나온 삶의 궤적을 교차하며 담아낸 도시 소설가와 농부 과학자의 이야기 <아름다움은 지키는 것이다>. 이 글을 마주한 이들은 우리가 지켜 나가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공통적으로 자문하게 되겠지. 김탁환 작가의 통찰력으로 빚어낸 결이 다른 에세이. 참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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