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화차 ㅣ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평점 :
지옥으로 가는 불수레란 뜻을 지닌 '화차'.
읽는 내내 무엇 때문에 이런 제목을 쓰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중간 지점을 넘어 거의 끝 무렵에 다가갈 때, 난 소름 돋도록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지닌다는 것, 그 굴레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때론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결혼을 앞두고 갑작스레 약혼자가 사라졌다. 그녀 이름은 세키네 쇼코.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약혼자를 찾으러 나선 은행원인 가즈야는 먼 친척뻘인 형사 '혼마'에게 염치불구하고 그녀의 행방을 부탁하게 된다.
혼마는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세키네 쇼코가 아닌 세키네 쇼코로 위장한 '신조 교코'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가즈야는 분노하고 더이상 책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과연 안다, 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갑자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사라지고 만다면
이제까지의 일상처럼 녹아 있던 이 삶이 모두 거짓처럼 꿈처럼 여겨지지 않을까.
과연 내가 이제까지 제대로 살아온 걸까, 하며 자신의 존재마저도 흔들리게 될 것 같은 기분.
아마 가즈야도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저버리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결혼을 결심한 사람에게까지 속여가며 자신의 신분을 감춰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언젠가 신조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혼마가 신조 교코를 수사해 나가면서 내면적 변화를 겪는 것들을 함께 느끼며 나 또한 동화되어 갔던 것이리라.
신조 교코는 첫눈에 봐도 미인이라 불릴 수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어떤 일을 하든 꼼꼼하고 야무지게 하는 성격이었고,
누구보다도 이 사회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보고 싶은 사람이었으며,
사소한 것들을 보면서 감탄하며 아름답게 여기는 존재였다.
그런 신조 교코가 세키네 쇼코를 죽이고, 세키네의 이름을 훔치고 어쩌면 다른 누군가를 죽였을 가능성까지
충분히 염두해 두면서도 형사 혼마가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 사회의 슬픈 한 단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최고봉이 이 사회에서 카드빚이라는 것을 아주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하는 현실.
아버지의 카드빚이 대물림되어 가족들은 흩어지고, 도망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신조 교코.
그저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가끔은 맛있는 밥을 지어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살아가는 것.
그게 신조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아마 그녀 자신도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물었을 것이다.
이 사소한 것이 내겐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한 번쯤은 나도 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새로운 삶을 살고자 훔친 세키네 쇼코.
피하고자 했던 운명의 수레 앞에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만난 신조 교코.
그 둘은 이상하게도 닮아 있었다. 벗어나려고 했던 카드빚, 그 대물림을 막고 싶어 아버지가 제발 죽었기만을 바랐던 그녀.
신조 교코가 훔친 세키네 쇼코의 삶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치 오이디푸스왕의 운명처럼. 피하고자 했던 운명은 결국엔 그렇게 찾아오고야 만다는 것.
이름과 삶을 훔쳤지만 끝내 자신을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절대로 삶을 포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신조 교코는 그런 면에서는 아주 강하고, 단단한 뿌리를 가진 여성이었다.
이혼 경력이 있는 신조 교코는 자신 때문에 남편의 부동산으로 매일같이 찾아오는 빚쟁이들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리자 급기야 전남편과 도서관에서 예전 신문들을 뒤지며 그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혈안이 되어 찾게 되는데... 남편은 아버지가 죽길 바라는 신조 교코의 모습을 보며 '악마' 같다는 말을 뱉는다.
그 일 이후, 그들은 이혼하게 된다.
이 장면을 읽는데,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느 순간 변해있다. 나를 사람이 아닌 벌레로 보는 느낌이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졸음이 가득찬 누군가, 공부를 하고 있는 누군가, 책을 찾고 있는 누군가, 시원한 공기를 만끽하고 있는
누군가. 그렇게 많은 누군가는 알지 못한다. 신조 교코의 삶을. 한 발짝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그렇게 멀고 먼 삶을 살아간다.
너무도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생각했다. 그 슬픔 속에서, 그 버림 속에서 신조 교코는 강해져야 했다.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감상에 젖어 있으면 안되었다. 그것이 자신을 이끄는 힘이었다. 처절하게 혼자라는 느낌. 그 느낌 속에 빠져 있기 보다는 혼자 우뚝 서야만 했다. 새로운 삶을 향해 두손을 쫙 뻗고 힘차게 나아가야만 했다.
신조 교코의 첫 번째 대상 세키네 쇼코의 삶을 훔친 건 실패였다.
이제 다음 대상이 필요했다.
즉시 실행에 옮긴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슬픔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계획대로 나아간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혼마가 있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마 더 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질 것이다.
신조 교코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
침묵을 지킬까, 울게 될까.
아니면 부정하게 될까.
어쩌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말을 하여 우리를 놀라게 할 지도 모르겠다.
무서운 장면이 딱, 집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밤에 읽는 내내 혼자 무서움에 떨었던 책, 화차.
인간이 지닌 운명 앞에 소름 돋고, 극단적인 방법을 이용하면서도 자신의 단단한 내부는 지켜가는 신조 교코에게 놀랐고,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속살을 낱낱이 밝혀놓아 씁쓸했고, 겉으로 보이는 치장과 치명적인 자극, 지독한 유혹의 구렁텅이 그리고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의 나락... 을 순차적으로 지켜보며 가슴 아팠던 책, 화차.
어쨌든 굉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