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청소부 소소
노인경 글.그림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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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랄한 소녀가 '뭉글뭉글'을 머리 위에 이고, '반짝반짝'을 손에 쥐고 '말동무'를 다리에 붙이고 구부정 나를 바라본다.

'비밀'이란 책 옆에는 청소기구가 가득 실린 자동차가 지나간다.

 

책청소부 '소소'를 소개합니다!!!!

책 청소부 소소는 무척 바쁘다. 많은 사람들이 소소에게 전화를 걸어 책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지워달라고 하기 때문이다. 얼른 차를 타고 도서관으로 향하는 소소. 오늘은 또 무슨 책일까.  

빨간 머리 앤이 약장수 말에 속아서는 염색약을 쓰면 까맣고 찰진 머릿결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홀딱 넘어가 초록색 머리가 되어 버린 앤이 슬퍼하는 부분. 바로 초록 머리가 된 부분을 지워 달란다.

자, 준비 됐지?

소소는 열심히 책을 끄집어내어 청소기로 글자들을 빨아 당긴다.

 

가끔은 자신이 주인공인데 왜 이러냐며 무진장 떼어내기가 힘든 글자들도 많다.

위협하는 '조각'이라는 글자도 있었고, 징징 울어대는 '슬픔'이라는 글자도 있었다.

매달리는 것도 단어들 별로 가지각색이다.


그래도 고객이 원하면 하는 것이 소소의 의무 아닌가. 소소는 책 청소부니까.

매정하게 그 단어들을, 문장들을 떼어내고 청소기에 밀어넣는다. 미안하지만 안녕.

 


청소기의 단어들을 털어내니 방안에는 온통 단어들로 그득하다. 그들은 소소와 함께 놀자고 징징댄다. 좋아. 소소는 함께 끝말잇기도 하고, 글자를 따라 파도를 탔다가 화살을 쏘았다가 우산을 썼다가 줄넘기도 하고! 놀거리는 밤을 새도 다 모자랄 정도였다.

와, 도서관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어. 온 동네에, 온 도시에 글자들이, 문장들이, 책들이 둥둥 떠다니고,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고 뛰어가고. 가끔은 그들도 책속에 박혀있기 보다는 바깥 공기를 시원하게 맛보고 싶지 않았을까. 단 하루만이라도 자유로워지기를!

 

 

 두고두고 읽었으면 좋을만큼 내겐 좋은 그림책이었다. 작가의 말이 인상 깊었다. 어른들은 늘 전체를 봐야한다고 말하지만 문장 한 줄 한 줄, 단어 하나 하나에 답해주느라 책 읽는 게 느리다는 노인경 작가의 말. 나도 그랬다. 전체적인 건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소하게 나마 한 줄 한 줄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어느 쪽이 부족하면 다른 쪽을 개발하는 게 좋은 게 아닐까. 어쩌면 소소한 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때문에 이 소녀의 이름은 '소소'일까.

 

 나는 잠시 이 책을 읽고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알퐁스 도데의 '별'에서 '별'을 지워 버린다면 양치기는 그 아름다운 밤, 별자리에 대해 말하지도 못했을 거고 어둠 속에서 할말 없이 쭈뼛거렸겠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달빛을 없애달라고 한다면 허 생원은 크하, 하면서 첫사랑 이야기를 주구장창 하지도 못했겠지. 난 왜이리 고약한 상상만 하게 되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꼭 있어야만 이야기가 만들어지겠지만 없다고 생각하니 우스꽝스러워진다. 피식 혼자 웃었다. 그리곤 수많은 전쟁과 다툼과 슬픔과 아픔이 담겨진 책에는 아름다운 별빛과 따뜻한 햇살과 달콤한 위로와 반짝이는 평온을 넣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소소는 청소부라서 지우는 역할만 할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자신이 지운 단어가 꼭 필요한 곳이 있다면 기증하는 것도 좋은 일이 되겠지. 나에겐 쓸모없는 조각 하나가 누군가에겐 반짝 떠오르게 만들어 줄 단 하나의 희망이 될 수도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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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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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소유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애인' 혹은 '남편'이나 '아내' 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고 가끔은 서로가 상대방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소유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 그리고 발을 디뎌서는 안 되는 금기의 세계로의 욕망이 불거진다.

 

여기 한 여인이 사랑하는 한 남자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는 외국인이며 유부남이다. 사회적인 금기의 대상을 사랑하는 여인은 온통 열망으로 부풀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그 사람을 생각하고 기다리는 일에 다 써버린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채워진 가슴 속에서 그녀에게 삶이란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 된다. 그 사람과 관련된 것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 그 남자와 관련된 모든 것은 의미있는 일처럼 여겨지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쓸모없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

 

'단순한 열정'을 읽으며 내내 나의 이십대를 떠올랐다. 그 이전에도 내 생은 거의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만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십대는 그 깊이가 남달랐다. 한 남자를 아주 오랫동안 사랑한 기억은 없다. 대신 사람을 바꾸어 가며 온통 한 사람만 생각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것만이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벅찬 가슴을, 뜨거운 심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시간만 나면 편지를 쓰고, 문자를 보내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와 함께 보낼 시간을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내 열망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북의 등껍질이 분리되면 이미 거북의 생은 사라지는 것처럼 그 열정이 사라지면 내 존재가 산산조각 날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때때로 열망이 사라질 때면 그 허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얼른 다른 상대를 집어 넣어 나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했다.

 

그리고 온통 누군가로 채워져있던 이십대가 조금씩 저물어감에 따라 나는 내 삶을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고, 사회는 열망만으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나를 부추겼다. 열망이 서서히 꺼져갈 무렵 오히려 난 담담해졌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누군가에게 홀딱 빠져 그 사람의 생각만으로 하루를 채웠던 내 생활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과 사실 내가 그 열정을 늘 택했던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된 것이었다.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던 내 우울과 내 슬픔 그리고 한없이 깊은 어둠을 끌어올려 마주할 힘이 내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린 나는 에너지를 소모하기 위해 열정을 따라다녔다. 누군가에게 빠져 있는 동안, 사랑한다고 믿는 동안 더이상 그곳엔 '나'는 없었다. '나' 자신이 빠진 모든 공간에 다른 사람들로 알록달록 채색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단순한 열정'이란 책을 내려 놓으며 나 자신을 마주한다. 스스로에게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쓸 수 있었던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에게도 붙잡고 싶은 시간들이 있었다. 한껏 부풀어올라 심장이 가득가득 채워지며 온몸에 세포가 번져가는 그 느낌. 거의 중독처럼 퍼져나가던 그 온기들. 그 시간들을 붙잡을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을 아니 에르노는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자신이 겪지 않은 것은 절대로 글로 쓰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서 힘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단순한 열정'은 더욱 빛을 발한다. 마음에 다가가는 지름길은 가장 솔직한 것이 아닐까. 아무나 솔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 안에 단단한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자신과 마주할 커다란 용기 또한 있어야 한다. 그녀의 솔직함에 잠시 기대어 나 또한 이제는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 자신과 마주하고 싶다. 열정들은 잠시 내려 놓고, 담담하고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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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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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환상의 세계로 초대하는 위험한 소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

 

 

충분히 외로워할 시간

 

                              혼자만의 시간

 

                                                           자기 존재와 마주할 시간

 

                                          환상을 깨뜨릴 시간

 

                                                                               감정들을 바라볼 시간

 

            나 자신을 기다리는 시간

 

 

 

 한 아이가 울고 있다. 사랑이 끝나 버린 것이다. 그 아이는 마치 이 순간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허무한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다. 대상이 나타난다. 첫눈에 반한다. 편지를 쓴다. 그의 모든 행동에 의미를 부여한다. 행복해진다. 마음 속에 자리잡던 허허로운 벌판들이 알록달록한 빛깔의 꽃과 나무들로 채워진다. 환상 속에 그대는 환한 빛 속에서 내내 웃고만 있다. 따뜻한 공기가 피어오른다. 조금씩 한 걸음씩 그에게로 다가간다.


"당신이 무척 마음에 들어요. 정말 당신을 좋아해요!"

 

 당찬 고백이 이어지고, 뒷걸음질치는 아이 앞에 한 사람. 그렇게 멀리 멀리 떠나버린 사람 앞에서 아이는 또 울고 있다. 아이는 얼마 간 아플 것이다. 그리고 개운하게 기지개를 펴고 일어날 것이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세상을 향해 성큼 걸어나가는 날, 아이는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 아이는 바로 '사랑 중독자'인 나다. 나는 늘 이뤄지지 않을 상대를 골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희망 없는 뿌리에 꽃이 피어나길 기도하듯 고백을 했고, 결과는 늘 비참했다. 이런 나를 지켜보는 친구는 안타까워하며 좀더 어울리는 상대를 찾아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자주 충고했다. 하지만 나는 고통에서 금세 빠져나와 새로운 대상을 찾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그 대상을 찾는 순간 한껏 벅차오르는 그 감정을 사랑했다. 그랬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내 자신, 그러니까 '사랑' 그 자체에 빠져버린 것이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에도 '사랑' 그 자체에 빠져 버린 에미가 등장한다. 에미는 잡지 정기구독을 취소하기 위해 메일을 보낸다. 주소를 잘못 기입하는 바람에 레오에게 잘못된 메일이 도착한다. 거기서부터 에미와 레오는 운명처럼 자연스럽게 '메일 데이트'를 시작한다. 메일을 기다리는 시간 사이사이에서 그들의 환상과 사랑은 섬세하게 피어오른다. 기다리는 동안 실체가 없는 한 사람을 기다리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남편과 함께 잠들어야할 시각에도 살짝 빠져나와 모니터를 바라보며 메일을 기다리는 에미. 자는 동안 에미의 메일을 놓칠까봐 에미 메일 알람을 설정해 놓은 레오. 에미와 레오는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지만 단지 '글'을 통해, 행간과 행간 사이의 정적과 고요를 통해 서로를 느낀다.

 

 에미는 두 아이를 가진 남편과 결혼한 서른 넷의 여성이고, 레오는 얼마 전 헤어진 여자친구와의 아픔을 이겨내려고 노력하는 서른 여섯의 남성이다. 그들의 이메일 사랑이 위태로운 이유는 바로 가정이 가진 여자와 싱글인 남성의 환상이 불러일으킨 사랑이기 때문이다. 

 

 에미는 확신했다. "레오, 당신은 잘못된 전제에서 출발하고 있어요. 저는 당신과 사랑에 빠지지 않아요!!!! 로맨스든 불륜이든 외도든, 그런 건 생기지 않을 거예요! 그냥 만남이 있을 뿐이에요."(p.287) 하지만 모든 걸 확신하는 사람일수록 강하게 흔들린다는 걸 나는 안다. 에미와 레오의 이메일 데이트를 읽어내려가면서 나는 마치 내가 에미가 된냥 레오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나또한 한 아이의 엄마이자, 버젓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서른 살의 여성이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한 번쯤은 이렇게 위태로운 시기가 찾아올거란 생각을 한다. 그럴 때면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도 든다. 감정이라는 것은 참 우습게도 아주 사소하게 시작되어서 빠져들기 시작하면 절대로 중간에 멈추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한 번 만나고 그만 둬야지 생각했다가도, 한 번 만나면 한 번만 더,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야, 하면서도 끝나지 않는 것이 만남의 법칙이다. 거기다 사회, 문화적으로 금기시되는 금지된 사랑이라면 그 관계의 벽 사이에서 더 불타오르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점차 자신을 합리화 시키고자 머리가 그쪽으로 굴러가 버린다. 다시는 이런 사랑을 만나지 못할 거란 슬픔, 왜 하필이면 지금 나타났을까 하는 신에 대한 원망, 이 운명적인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길 것 같은 두려움까지 버무려져서는 도무지 멈출 수 없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때부터 감정의 모험이 시작된다. 그 모험은 끝장이 나고서야,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고서야 자신의 현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환상이 깨어지고 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에미와 레오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사랑이 변하면, 비밀이 폭로되면 어떻게 될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하지만 우리는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어떠한 일에 맞닥뜨리게 되면 으레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만은 다를 거야.' ,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을지도 몰라.' 그들 자신의 시간들이 실체도 없는 환상에 장악되어 현실의 생활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신경쓸 겨를도 없이, 그들은 이미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막바지로 흘러가면서 이야기는 점점 그들의 만남으로 집약된다. 메일 내용을 소중하게 인쇄하여 서류철에 묶어 보관하는 아내를 바라보는 에미의 남편 베른하르트. 현실 속에서 남편의 눈을 바라보지 않는 에미. 에미의 남편에게 꼭 한 번 자신의 아내를 만나 환상을 깨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레오.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한때는 두 아이가 있는 나이 많은 남편을 열정적으로 사랑했을 에미임을 알기에 나는 슬펐다. 식어버린 열정은 평화로운 일상을 견뎌내지 못하고 에미를 들쑤셨을 것이다. 외롭고 텅 빈 감정에게 어서 색다른 공기들로 가득 채워달라고 졸라댔을지도 모른다.

 

 아주 사소한 i 하나로 잘못 보내진 이메일을 통해 서로가 연결되었던 것처럼 그들은 a와 i 차이로 만남이 깨어진다. 늘 에마로 부르던 남편이 레오를 만나러 나가던 에미에게 레오만의 애칭인 '에미'로 부르는 순간 에미는 레오의 만남을 포기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레오의 메일 계정은 사라진다. 처음부터 몰랐던 사이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다시 원점이다. 남은 건 헝클어진 세 사람의 마음 뿐.

 

 사랑할 대상이 없었을 때는 사랑하는 관계의 이별조차도 부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진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헤어지게 되었을 때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으면 싶었다.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돌덩이가 되어버렸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지고 난 뒤의 그 허전함은 내 마음에 자리조차 없었던 외로움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 나는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시간들로 채워져 갔다. 그리고 지금 사랑하는 자신에게 빠진 에미, 환상 속에 빠진 에미와 마주했다. 그리고 알았다. 우리는 대상이 다를 뿐 모두들 뭔가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기자신과 마주하는 것을, 혼자 남겨지는 것을 잊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찾는다. 사랑에 중독되는 것도 그렇고, 스마트폰이나 술, 텔레비전 등 수많은 것들을 하며 우리는 허전함을 채우려고 애를 쓴다.

 

 새벽 세시, 차가운 바람이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시각. 나의 역사를 알고 있는 별빛들이 흐르고, 나를 더욱 환상의 세계 속으로, 그 유혹의 손길로 이끌 밝은 달도 두둥실 떠 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모험에 나선, 현실을 망각한 에미의 최후를 보고 나서야 나는 깨닫는다. 그 지독한 설렘이, 목이 타는 기다림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는가를. 지금 나에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중독될 대상이 아니라 텅빈 혼자만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어딘가에 한눈 팔려 돌아보지 못한 내 자신을 마주할 시간. 소리없이 우울을 향해 흘러가고 있는 내 감정의 소용돌이를 끝까지 쫓아가보는 일. 혼자 있는 시간을 그저 조용히 지켜보는 일. 그리고 몸서리치도록 한껏 외로워지는 일. 그래, 우리는 충분히 외로워할 시간이 필요하다. 가슴 벅찬 열정 대신 외로움을 느끼는 일. 그러면서 나 자신이 나에게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젠 잃어버린 내 자신을 찾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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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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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르르 굴러들어온 내 인생에 축배를...

 

                                                정한아의 [달의 바다] 속으로 쑤욱!

  

 

 

 가끔 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나를 위한 거대한 '트루먼 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수백, 수천 만의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는 내게 주어진 24시간을 그들에게 보여준다. 다만 나만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나를 통해 울고 웃는다. 나는 어떤 거대한 존재가 나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콧구멍을 후비거나 큰일을 보러 갈 때면 조금 망설여지긴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리고 어떤 기운에서 벗어나면 난 누군가가 지켜보는 삶이 아닌 진짜 삶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곳이 아닌 바다 건너 어디론가로 가면 분명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이 나를 현실의 세계로 이끈다. 그것이 나를 다시 일으킨다. 환상이라는 화려한 색채가 없었더라면 난 한걸음도 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지만 단 한 명도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지극한 현실주의자들도 자신의 무의식 속에 박힌 환상 하나 쯤은 가지고 있으니까. 정한아의 소설, '달의 바다'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그리고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우연한 일상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강력한 긍정을 그녀에게 선물 받았다.

 

 

 목표를 세운다. 그 목표가 인생 그 자체가 된다. 자꾸만 실패한다. 그것이 진짜 원했는지조차 헷갈린다.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희미해졌다. 필연적인 결과로 죽음을 생각한다. 그래서 기자 시험에 여러 번 떨어진 은미는 알약을 잔뜩 사다가 자살을 준비했다. 더이상 이 세계에서 자신이 의미있지도 않을 뿐더러 뭔가를 해야할 필요성이 없다는 확신이 선다. 그래, 자신을 버리기로 한다.

 

 은미와 가장 친한 친구 민이. 그는 훤칠한 키에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가진 남성이다. 하지만 육체만 그러할 뿐, 그의 이성은 그가 이미 '여성'임을 충분히 피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생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그는 섬세하고 따뜻하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단 한명쯤은 자신을 믿어주는 이가 필요하다. 괜찮다고, 정말 네가 원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고 응원해 줄이가 필요하다. 민이 뿐 아니라 모두가 그러하듯이.

 

 이야기는 은미의 자살 결심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갑작스레 할머니의 계획이 끼어들었다. 어린 시절 결혼 실패로 아이만 남겨두고 떠난 고모를 찾아가라는 임무가 은미에게 주어졌다. 왜 자신이 그 일을 해야하는지도 모른 채, 은미의 죽음은 도시락통 속에 갇힌 알약으로 보류되었다.

 

 민이와 함께 은미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렌트카를 타고 고모의 집으로 향한다. 우주 비행사가 되어 비밀 편지를 부친 고모. 딸의 삶과 꿈을 존중해주었던, 언제까지나 응원해 주었던 할머니. 민이, 은미, 고모, 할머니까지 그들은 삶의 중대한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 속에 적절하게 현실을 섞어 생을 살아내고 있었다.

 

 

 고모는 우주비행 대신 샌드위치를 만들어 알 수 없는 곳으로 보내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 또한 뜻밖에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해 후회 대신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고 있었다. 가끔은 숨을 쉴 수조차 없는 고통이 찾아오는 고모. 폐에 생긴 낭종으로 인해 쇼크를 일으키는 것이다. 고모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잘 살고 있노라고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 아름다운 거짓말로 편지를 써왔다. 자신을 응원해준 엄마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들려주고 싶었던 거다. 고모는 자신만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었다. 꼭 꿈꿔왔던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종종 꿈꾸는 일을 해야만 행복해질 거란 착각을 한다. 누군가가 인정을 해주어야만 나의 존재가 반짝거릴 거란 터무니없는 오해 속에 빠져산다. 꿈꿔온 일에 가닿는 과정 속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생각지도 못한 삶이 있다. 그것은 온전히 우리들이 받아들어야할 삶이라는 걸 이 소설에서 말해준다. 그 현실을 무작정 손사래치며 내쳐버릴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진짜 삶을 찾는 것. 우주비행사가 아닌 우주비행모형이 가득한 곳에서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더라도 그 속에 더 나은 것을 발견할 수 있도 있는 것 아닌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민이는 몸과 마음 모두 여성이 되기 위해 수술을, 은미는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남노갈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점점 호흡이 힘들어지는 고모는 할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내는 걸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차라리 공기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 속에서 더 속 시원히 숨을 쉬며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고모의 편지는 아름다웠다.

 

 언제든지 명령이 떨어지면 저는 이곳으로 완전히 정착할 준비를 시작해야 돼요. 그때가 되면 더이상 편지를 쓰지 못할 거예요. 지구와 달을 오가는 우체부는 없으니까요. 만약에 그런 날이 오더라도 엄마, 제가 있는 곳을 회색빛의 우울한 모래더미 어디쯤으로 떠올리진 말아주세요.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으로,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주셨잖아요? -p.161

 

 

책 속을 헤매다가 도망치듯 살아온 내 삶을 다시 끄집어 보았다.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가면 멋진 신세계가 나를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다른 곳으로 갔던 그 끔찍한 순간이 아니라 가기 전 상상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화려한 내 모습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나와는 별개로 트루먼은 자신의 삶을 개척했고, 늘 떠날 인사를 준비했고, 무대 밖의 자신의 삶을 찾아냈다. 과연 그는 행복했을까.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행복만으로 가득한 삶은 없을 것이다. 선택과 갈등, 고민과 아픔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어떤 세계에 발을 담그는 순간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결론은 그랬다. 내가 깨달은 삶의 긍정은 굴러들어온 인생을 모르는 척 하지 않고 다시 그곳에서 오뚜기처럼 일어나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진짜' 내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뒹구르르 지루한 내 인생에 축배를 들어본다. 부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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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4
메리 셸리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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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당신은 괴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괴물을 창조해낸 인물이었죠. 당신의 비상한 두뇌와 과학도의 천재적인 지식물로 탄생한 괴물. 추악하고 험악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토악질을 일으키고 모든 이의 얼굴을 찡그리게 만드는 그 괴물. 그것은 당신의 소산물이었습니다.

 

당신을 알기 전, 나는 자주 친구들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질 때마다 "뭐야, 프랑켄슈타인이야?" 하는 농담을 즐겨해왔습니다. 바로 당신이 괴물의 형상이라도 믿었던 거죠. 당신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창조물을 내 몰라라 했습니다. 혼자 팽겨쳐 놓고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냥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며 즐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살인이 일어났을 때...... 당신은 잊고 있었던 당신의 창조물을 떠올렸지요.

 

그랬습니다. 그 괴물은 당신의 소중한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갔습니다. 태어나자 마자 축복 속에 휩싸여 환한 빛을 두르고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몰라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영문도 모른 채 버려지고 찢겨지는 자도 있습니다. 그 괴물은 후자에 속했죠. 자신이 어디에서 온 지도 모른 채, 순수한 마음 하나로 버텨내며 사랑을 갈구했습니다. 그게 뭐 그리 잘못된 일인가요? 진심을 다해 따뜻한 마음을 원했고 남몰래 가난한 사람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게 무엇이었나요? 사랑을 배워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는 이가 자신의 모든 걸 내걸고 도와주었을 때에 그가 바란 건 많은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 모든 파괴와 고통과 잔인한 살인은 응당 당신이 받아야 할 짐이었습니다. 아, 물론 알고 있습니다. 괴물이 자신과 같은 형상을 하나만 더 만들어 달라고 했을 때, 그와 함께 멀리 멀리 도망가서 살아가겠다고 했을 때, 당신은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보다 인류의 미래를 생각했다는 것을요. 하지만 당신이라도 그 괴물을 품어 줄 수는 없었나요. 그 찢겨진 마음을 의심이 아닌 사랑으로 따스하게 감싸줄 수는 없었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앙상해진 채로 복수라는 하나의 감정만으로 버텨내며 앙 물며 생을 살아내고 있을 때, 나는 숨이 막히도록 힘겹고 당신의 여정이 아팠으나 그것보다 더 당신에게 쫓김을 당하면서도 관심 받고 싶어 하는, 마지막까지도 사랑을 바랐던 괴물 때문에 더 많이 아팠습니다.

 

마지막 장면은 어떻게 펼쳐질까 궁금해 하며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습니다. 내가 읽고 있는 프랑켄슈타인 당신이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가 모든 게 환상은 아닐까 하며 치를 떨었습니다. 그 모든 살인은 괴물이 아닌 당신이 행한 건 아닌가 의심도 했습니다. 제 예상대로 흘러가진 않았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이 상처투성이만 여기저기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 상처투성이가 어디엔가 뿌리를 내려 잘못 없는 누군가의 가슴에 생채기를 낼까 두려웠습니다. 괴물은 결국 당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의 자리 잡고 있던 당신의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아니 어쩌면 그 괴물은 나 자신일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감싸주고 싶고 아껴주고 싶었습니다.

 

 

덧붙여 이 생에 함께 머무를 수 없었던 당신의 그림자였던 P에게 :

그래도 사랑해야 할, 내 어둠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너에게 - 한때는 괴물이라 불렸던 너-

다음 생엔 꼭 추함이 아닌 아름다움으로, 찡그림이 아닌 환한 웃음으로, 따뜻한 포옹으로, 행복한 삶으로 다시 만나자. 안녕, 나의 그림자. 나의 괴물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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