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뒹구르르 굴러들어온 내 인생에 축배를...

 

                                                정한아의 [달의 바다] 속으로 쑤욱!

  

 

 

 가끔 난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나를 위한 거대한 '트루먼 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수백, 수천 만의 사람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고, 나는 내게 주어진 24시간을 그들에게 보여준다. 다만 나만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나를 통해 울고 웃는다. 나는 어떤 거대한 존재가 나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에 휩싸여 콧구멍을 후비거나 큰일을 보러 갈 때면 조금 망설여지긴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살아간다. 그리고 어떤 기운에서 벗어나면 난 누군가가 지켜보는 삶이 아닌 진짜 삶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곳이 아닌 바다 건너 어디론가로 가면 분명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이 나를 현실의 세계로 이끈다. 그것이 나를 다시 일으킨다. 환상이라는 화려한 색채가 없었더라면 난 한걸음도 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 우리는 이렇게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있지만 단 한 명도 같은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지극한 현실주의자들도 자신의 무의식 속에 박힌 환상 하나 쯤은 가지고 있으니까. 정한아의 소설, '달의 바다'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그리고 문장과 문장, 단어와 단어 사이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우연한 일상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한 강력한 긍정을 그녀에게 선물 받았다.

 

 

 목표를 세운다. 그 목표가 인생 그 자체가 된다. 자꾸만 실패한다. 그것이 진짜 원했는지조차 헷갈린다. 정말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희미해졌다. 필연적인 결과로 죽음을 생각한다. 그래서 기자 시험에 여러 번 떨어진 은미는 알약을 잔뜩 사다가 자살을 준비했다. 더이상 이 세계에서 자신이 의미있지도 않을 뿐더러 뭔가를 해야할 필요성이 없다는 확신이 선다. 그래, 자신을 버리기로 한다.

 

 은미와 가장 친한 친구 민이. 그는 훤칠한 키에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가진 남성이다. 하지만 육체만 그러할 뿐, 그의 이성은 그가 이미 '여성'임을 충분히 피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생과 죽음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그는 섬세하고 따뜻하다. 진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만 단 한명쯤은 자신을 믿어주는 이가 필요하다. 괜찮다고, 정말 네가 원하는 삶을 살길 바란다고 응원해 줄이가 필요하다. 민이 뿐 아니라 모두가 그러하듯이.

 

 이야기는 은미의 자살 결심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갑작스레 할머니의 계획이 끼어들었다. 어린 시절 결혼 실패로 아이만 남겨두고 떠난 고모를 찾아가라는 임무가 은미에게 주어졌다. 왜 자신이 그 일을 해야하는지도 모른 채, 은미의 죽음은 도시락통 속에 갇힌 알약으로 보류되었다.

 

 민이와 함께 은미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렌트카를 타고 고모의 집으로 향한다. 우주 비행사가 되어 비밀 편지를 부친 고모. 딸의 삶과 꿈을 존중해주었던, 언제까지나 응원해 주었던 할머니. 민이, 은미, 고모, 할머니까지 그들은 삶의 중대한 선택을 해야만 했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 속에 적절하게 현실을 섞어 생을 살아내고 있었다.

 

 

 고모는 우주비행 대신 샌드위치를 만들어 알 수 없는 곳으로 보내는 일을 하루도 빠짐없이 하고 있었다. 또한 뜻밖에도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해 후회 대신 자신의 선택을 존중하고 있었다. 가끔은 숨을 쉴 수조차 없는 고통이 찾아오는 고모. 폐에 생긴 낭종으로 인해 쇼크를 일으키는 것이다. 고모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잘 살고 있노라고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 아름다운 거짓말로 편지를 써왔다. 자신을 응원해준 엄마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들려주고 싶었던 거다. 고모는 자신만의 삶을 잘 살아내고 있었다. 꼭 꿈꿔왔던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종종 꿈꾸는 일을 해야만 행복해질 거란 착각을 한다. 누군가가 인정을 해주어야만 나의 존재가 반짝거릴 거란 터무니없는 오해 속에 빠져산다. 꿈꿔온 일에 가닿는 과정 속에 우리에게 찾아오는 생각지도 못한 삶이 있다. 그것은 온전히 우리들이 받아들어야할 삶이라는 걸 이 소설에서 말해준다. 그 현실을 무작정 손사래치며 내쳐버릴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진짜 삶을 찾는 것. 우주비행사가 아닌 우주비행모형이 가득한 곳에서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더라도 그 속에 더 나은 것을 발견할 수 있도 있는 것 아닌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와 민이는 몸과 마음 모두 여성이 되기 위해 수술을, 은미는 할아버지가 경영하는 남노갈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점점 호흡이 힘들어지는 고모는 할머니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내는 걸로 이 소설은 끝이 난다. 차라리 공기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 속에서 더 속 시원히 숨을 쉬며 훨훨 날아다닐 수 있는 고모의 편지는 아름다웠다.

 

 언제든지 명령이 떨어지면 저는 이곳으로 완전히 정착할 준비를 시작해야 돼요. 그때가 되면 더이상 편지를 쓰지 못할 거예요. 지구와 달을 오가는 우체부는 없으니까요. 만약에 그런 날이 오더라도 엄마, 제가 있는 곳을 회색빛의 우울한 모래더미 어디쯤으로 떠올리진 말아주세요. 생각하면 엄마의 마음이 즐거워지는 곳으로, 아, 그래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달의 바닷가에 제가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밤하늘의 저 먼 데를 쳐다보면 아름답고 둥근 행성 한구석에서 엄마의 딸이 반짝, 하고 빛나는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주셨잖아요? -p.161

 

 

책 속을 헤매다가 도망치듯 살아온 내 삶을 다시 끄집어 보았다.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가면 멋진 신세계가 나를 두 팔 벌려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나 다른 곳으로 갔던 그 끔찍한 순간이 아니라 가기 전 상상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화려한 내 모습을 그리고 있을 때였다. 나와는 별개로 트루먼은 자신의 삶을 개척했고, 늘 떠날 인사를 준비했고, 무대 밖의 자신의 삶을 찾아냈다. 과연 그는 행복했을까.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행복만으로 가득한 삶은 없을 것이다. 선택과 갈등, 고민과 아픔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어떤 세계에 발을 담그는 순간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그러나 나의 결론은 그랬다. 내가 깨달은 삶의 긍정은 굴러들어온 인생을 모르는 척 하지 않고 다시 그곳에서 오뚜기처럼 일어나 꿋꿋하게 살아내는 것. 그것이 '진짜' 내 자신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다. 뒹구르르 지루한 내 인생에 축배를 들어본다. 부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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