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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사랑은 소유할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애인' 혹은 '남편'이나 '아내' 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구속하고 가끔은 서로가 상대방을 소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소유하지 못하는 다른 세계 그리고 발을 디뎌서는 안 되는 금기의 세계로의 욕망이 불거진다.
여기 한 여인이 사랑하는 한 남자를 기다린다. 기다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여인이 사랑하는 남자는 외국인이며 유부남이다. 사회적인 금기의 대상을 사랑하는 여인은 온통 열망으로 부풀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을 그 사람을 생각하고 기다리는 일에 다 써버린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채워진 가슴 속에서 그녀에게 삶이란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 된다. 그 사람과 관련된 것 아니면 그렇지 않은 것. 그 남자와 관련된 모든 것은 의미있는 일처럼 여겨지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쓸모없는 일처럼 느껴지는 것.
'단순한 열정'을 읽으며 내내 나의 이십대를 떠올랐다. 그 이전에도 내 생은 거의 '사랑에 대한 열망'으로만 채워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십대는 그 깊이가 남달랐다. 한 남자를 아주 오랫동안 사랑한 기억은 없다. 대신 사람을 바꾸어 가며 온통 한 사람만 생각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것만이 부풀어오르는 마음을, 벅찬 가슴을, 뜨거운 심장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시간만 나면 편지를 쓰고, 문자를 보내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와 함께 보낼 시간을 상상하며 행복해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내 열망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거북의 등껍질이 분리되면 이미 거북의 생은 사라지는 것처럼 그 열정이 사라지면 내 존재가 산산조각 날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때때로 열망이 사라질 때면 그 허한 공간을 채우기 위해 얼른 다른 상대를 집어 넣어 나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했다.
그리고 온통 누군가로 채워져있던 이십대가 조금씩 저물어감에 따라 나는 내 삶을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고, 사회는 열망만으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나를 부추겼다. 열망이 서서히 꺼져갈 무렵 오히려 난 담담해졌고,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그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 누군가에게 홀딱 빠져 그 사람의 생각만으로 하루를 채웠던 내 생활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과 사실 내가 그 열정을 늘 택했던 것은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된 것이었다.
깊은 내면에 자리하고 있던 내 우울과 내 슬픔 그리고 한없이 깊은 어둠을 끌어올려 마주할 힘이 내게는 없다고 생각했다.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돌린 나는 에너지를 소모하기 위해 열정을 따라다녔다. 누군가에게 빠져 있는 동안, 사랑한다고 믿는 동안 더이상 그곳엔 '나'는 없었다. '나' 자신이 빠진 모든 공간에 다른 사람들로 알록달록 채색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단순한 열정'이란 책을 내려 놓으며 나 자신을 마주한다. 스스로에게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쓸 수 있었던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나에게도 붙잡고 싶은 시간들이 있었다. 한껏 부풀어올라 심장이 가득가득 채워지며 온몸에 세포가 번져가는 그 느낌. 거의 중독처럼 퍼져나가던 그 온기들. 그 시간들을 붙잡을 수 있다면 내 목숨을 내 놓을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을 아니 에르노는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풀어냈다. 자신이 겪지 않은 것은 절대로 글로 쓰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에서 힘이 느껴진다. 그렇기에 '단순한 열정'은 더욱 빛을 발한다. 마음에 다가가는 지름길은 가장 솔직한 것이 아닐까. 아무나 솔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 안에 단단한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자신과 마주할 커다란 용기 또한 있어야 한다. 그녀의 솔직함에 잠시 기대어 나 또한 이제는 내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내 자신과 마주하고 싶다. 열정들은 잠시 내려 놓고, 담담하고 솔직하게 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