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뇌 문학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문학적 성찰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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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히는 , 사유하는 , 시동 거는 문학





<눈 뇌 문학>은

눈으로 시작해 '보는 것'에 대한 작가의 풍부한 문학적 통찰을 다양한 방식으로 조우해 볼 수 있다.

책 서두는 '눈으로 모든 것'을 담는다...이다. 앎이 깃드는 첫 단계가 몸의 언어를 통해서 체득이 되고 나면 위대한 계시로 바뀌는 점화의 순간이 온다. 위대한 계시란 이런 것이다. 보이는 것의 통로인 눈을 통해 사유를 시작하면 이는 뇌의 언어로 전환된다. 이 접점은 상상을 더하는데 보이는 것들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들 마저 정교하게 시각화 시키는 눈과 뇌의 교감이다. 바로 마음이다. <눈 뇌 문학>은 바로 이 마음에 이르는 시선을 통해 인간의 보이지 않는 서사를 조명하는 작품 분석 이야기다. 그리고 그 끝은 우리가 '뇌를 넘어서 본다'로 마무리한다.

인간은 〈뇌로 본다〉는 사실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이 책의 종착점은 인간은 〈뇌를 넘어서 본다〉이다.

p.9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 저무는 육체적 시간들을 따라 물욕을 키워가며 사는 일은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통해 추상적인 신의 영역까지 욕망을 드리우며 파고들어간다. 이때 우리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눈', 마음의 심미안은 러시아 문학뿐만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을 연구하는 작가의 <눈 뇌 문학> 전체를 상쇄하는 개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 순수와 미혹함 사이에서 수많은 눈들의 보이지 않는 죄악과 사투는 우리가 대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물음을 되풀이하게 한다. 그리고 이 반복적 물음 속에서 신을 향한 끊임없는 눈물의 회개와 구원을 갈망하는 도덕적 회심을 소원하게 한다.

우리의 눈들이 그렇다. 선과 악의 넘나듦 속에서 어떤 것들은 추하나 빛이 되고, 아름다우나 어둠이 되어 있는 끊임없는 인간의 자기 합리화.

인간은 보이는 것을 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인간에게 본다는 것은 실질적인 지각(시각) 행위를 의미하는 동시에 감각과 긴밀하게 얽힌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보기, 모종의 〈깨달음〉, 통찰, 심리적이고 영적인 의미에서의 〈개안〉을 의미한다. 인간의 모든 감각 중 시각만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물질적 영역과 비물질적 영역을,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을 촘촘하게 엮어 짜는 감각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p.95~96

타인을 사랑하는 깊은 마음은 도스토옙스키의 타자를 바라봄에서 연민을 타고 온다. 그의 작품 속 시선을 따라 마음이 머무는 심연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차원의 숭고한 사랑을 완성하는 세계를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고 통하고 원하는 한 가지 감정은 사랑이다. 최고의 윤리고 선이자 아름다움..... 신들이 인간에게 베푸는 향연.

사랑은 인간다움을 뿌리내리고 인지하는 모든 감각을 살아있게 만든다. 도스토옙스키의 문학 세계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이 바라봄. 눈을 통해 세상에 닿았다가 인간들 사이에 녹아든 타인의 의식을 의식하고 다시 문학으로 승화되어 궁극적으로 신을 부르는 속죄의 구속적 사랑... 참회의 눈물이 연민으로 그리고 다시 신들로...

이 모든 윤회적 연결고리를 저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바라봄으로 시작하여 끝을 맺는다.

<신의 눈>을 <다 보기>라는 양적 개념으로 환산하는 것은 근대적 발상이라고 (193.) 저자는 말했다.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놓친 것을 다시 잡기 위해. 사랑을 마주보기 위해.

삶의 무게를 가늠하기 위해.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기 위해.

고결한 죽음을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보고 어떤 선택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톨스토이가 묻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처럼... 그 어떤 미사여구도 필요 없다.

가장 단순하게 직관적으로 솔직하게 묻고 답하면 된다.

그 물음이 그대로 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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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 전체주의라는 악몽 오늘을 비추는 사색 3
마키노 마사히코 지음, 전경아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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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없는 사유>

-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 볼 때 왜 우리가 이미 전개된 개념이나 그 어떤 사견에도 휘둘리지 말고 깊은 통찰을 해야 하는지 길을 안내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뇌하며,

온 몸으로 깨어 있기를 우선해야 하는 이유가 전제되어야 한나 아렌트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모두 국가에 속해 있어 국민국가라는 기본 권위를 갖습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속성의 자유를 누리는 듯 하면서도 각각 범주에 속해져 통제를 받는데 익숙합니다. 모든 경우가 다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손해도 보며 이익도 보며 살아갑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완성된 국민국가는 계급과 계층에 따라 구분된 국민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일컫는다. 국민국가는 균일하고 단일한 "국민"에 의해서 설립된 국가가 아니다.

p.20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가진다라고 생각하지만 이또한 차별되고 구별된 층으로 나뉘어 누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아렌트는 이 계층과 계급의 구분이 민족과 종교, 종파의 구별과 겹쳐진다고 (p.20) 말합니다.


이 인간의 조건과 유별되게 달랐던 민족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 국민국가 밖에 서 있는 '아웃사이더'


식민지 수탈이 국가간 쟁점이었던 19세기, 제국주의의 팽창이 가져온 부작용은 국적이 아닌 신진자본에 의해 부의 집중, 빈부의 격차로 계급이 재조정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지만 이를 회유하려는 사고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계급과 계층을 해체시키고, 중산계급을 몰락시킵니다.

여기서 '군중' - 혹은 대중, 탈계급 분자(몹) 소외된 자들이 출현합니다.

몹은 모든 민중 운동의 주체자가 되며 이들로 인해 새로운 사상이 속출하거나 반기를 드는 시위를 확대해 나가는 주체자들의 모임이 됩니다.


전체주의는 국민국가 체제가 본격적으로 해체된 1차 세계대전 이후 눈이 띄게 나타난 대중 현상, 지곤의 법과 집단에 의해서 보장된 권리를 잃고 무방비한 존재가 된 대중의 등장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 p.41 대중의 등장


아렌트는 전체주의 등장의 핵심을 운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몹과 엘리트의 졀묘한 역할이 만나서 이루어집니다.

특히 홀로 남은 개체의 몹집단은 자신들의 보고싶고 바라고 듣고 싶은 말에만 휩쓸리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지도자는 몹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적입니다.

이들의 사상체계나 사회운동의 핵심을 미혹하고 선동하는 단서나 실마리 즉 아렌트가 말하는 난간들이 너무나 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잃고 주변인으로 밀려난다는 정체성의 상실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결국 전체주의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집단선동된 유대인 학살 사건을 통해 인간다움의 조건이 무엇인지 반성하게 만듭니다. 과연 전체주의는 우리의 무엇을 파괴하는 것일까요.

전체주의를 파고들며 한나 아렌트는 특히 인간의 조건에 대해 깊이 사유합니다.

노동, 일, 행위로 분류하며 인간 삶의 터전인 '세계'를 재구성해봅니다.

특히, <예측 불가능하다>라는 점에 방점이 찍힙니다.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며 이타적으로 생각하기에 압박을 느끼며 일상을 살아가지만, 한편으로 사생홀을 보호받고 국가와 사회로부터 안정과 안전을 추구하며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야 행복합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그러므로 언제나 '공통' - Common Sense - 이라는 단어는 우리와 함께 합니다. 

이것이 딜레마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렌트가 말하는 것처럼 전체주의 기원을 파헤치고 인간의 조건을 사유하는 동안 우리 삶에서 무엇을 경계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과정은 굉장히 의미가 있습니다.


전체주의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전체주의가 파괴한 사람들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자유로운 "운동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 p.154 끊임없이 희망을 말하는 것


<전체주의라는 악몽>을 통해 가장 공감이 되는 문장이었습니다.

아렌트가 오랜동안 사유했던 우리의 일상을 통해 나온 말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무게있게 다가옵니다. 결국 인간의 책임과 판단은 인간 테두리 안에서 인간을 향한 우리의 공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판사 지원도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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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뇌 문학 -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문학적 성찰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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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책다운 책을 보고자 하는 욕구를 채울듯 합니다.
석영중교수님 팬으로서 필독코스이지요.
읽고 리뷰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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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 전체주의라는 악몽 오늘을 비추는 사색 3
마키노 마사히코 지음, 전경아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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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을 경계하라 말하는 작가에 크게 공감하며 한나 아렌트를 한번 더 강조할 수 있어 좋다. 지금 시대에
밀도있는 집단층의 균열을 간절히 원하는 한방의 훅을 한나 아렌트가 날려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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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지 않을 권리 다시 쓰기 - 자본주의를 가로지르는 인문학 로드맵
강신주 지음 / 오월의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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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본주의를 가로지르는 인문학 로드맵
부제를 보고 나면 왜 필자가 절판한 이 책을 다시 출간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태어나 노동자의 삶에 뼈를 묻다시피 살아낸 부모님을 여의고 독기뿜던 치열한 난타전을
치루고 보니 내 아이들에겐 이런 세상의 대물림을 해선 안된다는 생각이 확고해 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개인적 입장에선 자본주의를 빠져나갈 출구가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필자의 한결같은 깨우침처럼 자본주의 시대 우리는 끊임없이 자각하고 사유하며 가는 길 위 이정표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각 구성의 장마다 우리는 필자가 추천하는 짐멜, 벤야민, 부르디외, 보드리야르, 그리고 페라리스 다섯명의 지성인을 만난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로드맵을 따라 나란 존재를 검증해 나가면 된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중산층의 내가 나를 테스트하는 일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알면 알수록 생산자와 소비자의 정체성 구별짓기에 엄청난 시간을 마구마구 낭비하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다.

문제의 핵심은 구별짓기에 있지 않았다.
1부에서 짐멜과 더불어 살펴보는 자본주의 구조는 화폐경제가 활성화될 수 밖에 없도록 고안된 도시 문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다. 타인으로부터 나를 구별하고 나의 욕망을 아름답게 포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나에게 필요한 삶의 무기는 돈. 바로 나의 물욕을 채워줄 수 있는 돈.
자본주의 아래 나는 노동하고 소비한다. 노력한 댓가로 기본 레벨이 업글되면 돈은 나의 가치가 되고 더 나은 모던한 소비로 변모하기 위한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
나를 위한 보상 심리는 발동된다. 불이 꺼지지 않는다. 소비 업그레이드를 위해 여러 문화적 이벤트와 다이나믹한 엔터테인먼트들이 공허한 일상에 나의 욕구를 채워주다 보니 유혹과 중독에 빠지기 쉽상이다.
벤야민이 2부에서 다루는 욕망이란 키워드가 나와 결부되는 순간이다. 소비 트렌드의 유행은 내 취향과 연결된다.
아직은 가질 수 없는 버킷 리스트로 간직되는 목록들도 상당하다.
파리의 대유행 시작덤이던 프랑스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매번 리뉴얼되는 새로운 상품인 것이다. 이건 끊을 수 없는 나의 욕망덩어리들이다.
이제는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생산, 노동과 소비라는 삼각경기를 정신적 방전인 상태로 계속 달리다 보니 아비투스라는 개념이 3부 부르디외의 사유에서 튀어나온다.
우리가 정말 자각해햐 할 개념으로 물욕에 둔감해 지면 오히려 자기 검열에 굉장히 민감해 지므로 자신의 발현을 누르는 억압의 기능이 아비투스처럼 된다는 것이다. 돈으로 부터 진정한 해방을 누리고 미래 지향적인 아비투스를 최적화할 것으로 우리는 로드맵을 그려야 한다.
그런데 4부에서 보드리야르를 통해 나는 새로운 사회에 눈을 뜨게 된다. 산업자본주의의 동력이 그것이다.
노동자과 소비자가 같은 영역인으로 생산 후 소비되는 형태의 제로썸이 유지된다면 문제없겠지만 반드시 잉여 생산이 산업 자본 흐름에 제동을 걸게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상품은 교환가치의 소비를 뛰어넘어 교환불가능한 의미 부여의 가치 소비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은밀히 우리의 사치와 허영이 드러나지 않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의식은 아주 우월하고 세련되게 나타나야 한다.

"이제 인간은 노동에서 소비로, 그리고 소비에서 노동으로 이어지는 다람쥐 쳇바퀴에 제대로 갇힌 겁니다. 자본이 원하는 것을 생산하고 자본이 만드는 상품만 욕망하면서,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자본에 바쳐진 불행한 제물이 되고 만 겁니다." p.363

그래서 마지막으로 필자는 이렇게 정리해준다.
우리는 전자본주의 시대의 화폐경제와 상품구매로 정의되는 이분법적 논리 시장 안에서 살고 있지만, 이런 전자본주의를 초월한 다큐미디어자본 시대를 걸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웹자본주의의 거대 시장 논리를 간과할 수 없다.
기록을 통해 무상으로 빅데이터를 제공하는 우리는 동원된다고 본다.
이 논리가 5부 페라리스에서 펼쳐진다.
명확한 현시점을 보여주는 페라리스의 정리는 불안과 두려움을 언제나 내 탓으로 끌어앉고 사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우리는 동원된다, 그리고 자본에 종속된다."

상업자본, 산업자본, 금융자본.. 지금은 다큐미디어자본으로 공론을 옮겨 온다.
우리가 개미떼처럼 웹상에 제공하는 정보의 꿀들로 그들은 거대 다큐미디어자본의 몸집을 키운다.
그래서 개개인의 활동가치를 아무 계약조건도 없이 제공하는 노동을 댓가없는 봉사활동으로 여겨도 될 것이다.
유감스럽지만 우리가 기록으로 남긴 활동가치는 다큐미디어자본의 목적대로 이용된다.
그것은 '소비를 조종하고, 소비를 이해하고, 소비를 포획하는' 것으로 말이다.
나의 금지된 것들을 소망한다고 일상기록을 남기면 이것을 익명의 알고리즘으로 탈바꿈시켜 내게 위로 처방으로 광고를 띄워준다, 그럼 난 조제된 이 처방전으로 물욕을 해소하는 금융치료를 받는 것이다.

사회가 돈을 굴리는 시스템을 알고 나면 나는 예, 아니오를 적절하게 선택하며 삶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느끼고 표현하는 모든 감정을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다움을 향해 가는 그 길이 한 곳에 너무 오래도록 멈춰있어 필요 이상의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은 없길 바랄 뿐이다.

#상처받지않을권리 #강신주 #오월의봄 #리딩투데이 #독서카페 #자본주의 #다큐미디어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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