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 전체주의라는 악몽 오늘을 비추는 사색 3
마키노 마사히코 지음, 전경아 옮김 / 까치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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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없는 사유>

- 한나 아렌트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합니다.


인간의 본질을 들여다 볼 때 왜 우리가 이미 전개된 개념이나 그 어떤 사견에도 휘둘리지 말고 깊은 통찰을 해야 하는지 길을 안내해 주는 것 같습니다.

인간에게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뇌하며,

온 몸으로 깨어 있기를 우선해야 하는 이유가 전제되어야 한나 아렌트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모두 국가에 속해 있어 국민국가라는 기본 권위를 갖습니다. 그래서인지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속성의 자유를 누리는 듯 하면서도 각각 범주에 속해져 통제를 받는데 익숙합니다. 모든 경우가 다 납득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손해도 보며 이익도 보며 살아갑니다.


19세기 유럽에서 완성된 국민국가는 계급과 계층에 따라 구분된 국민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일컫는다. 국민국가는 균일하고 단일한 "국민"에 의해서 설립된 국가가 아니다.

p.20


우리는 자유와 평등을 가진다라고 생각하지만 이또한 차별되고 구별된 층으로 나뉘어 누리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만드는 말입니다. 좀 더 깊이 파고들면, 아렌트는 이 계층과 계급의 구분이 민족과 종교, 종파의 구별과 겹쳐진다고 (p.20) 말합니다.


이 인간의 조건과 유별되게 달랐던 민족이 바로 유대인입니다.

- 국민국가 밖에 서 있는 '아웃사이더'


식민지 수탈이 국가간 쟁점이었던 19세기, 제국주의의 팽창이 가져온 부작용은 국적이 아닌 신진자본에 의해 부의 집중, 빈부의 격차로 계급이 재조정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지만 이를 회유하려는 사고는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계급과 계층을 해체시키고, 중산계급을 몰락시킵니다.

여기서 '군중' - 혹은 대중, 탈계급 분자(몹) 소외된 자들이 출현합니다.

몹은 모든 민중 운동의 주체자가 되며 이들로 인해 새로운 사상이 속출하거나 반기를 드는 시위를 확대해 나가는 주체자들의 모임이 됩니다.


전체주의는 국민국가 체제가 본격적으로 해체된 1차 세계대전 이후 눈이 띄게 나타난 대중 현상, 지곤의 법과 집단에 의해서 보장된 권리를 잃고 무방비한 존재가 된 대중의 등장을 배경으로 태어났다.

- p.41 대중의 등장


아렌트는 전체주의 등장의 핵심을 운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운동은 몹과 엘리트의 졀묘한 역할이 만나서 이루어집니다.

특히 홀로 남은 개체의 몹집단은 자신들의 보고싶고 바라고 듣고 싶은 말에만 휩쓸리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지도자는 몹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적입니다.

이들의 사상체계나 사회운동의 핵심을 미혹하고 선동하는 단서나 실마리 즉 아렌트가 말하는 난간들이 너무나 쉽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잃고 주변인으로 밀려난다는 정체성의 상실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결국 전체주의는 2차 세계대전 동안 집단선동된 유대인 학살 사건을 통해 인간다움의 조건이 무엇인지 반성하게 만듭니다. 과연 전체주의는 우리의 무엇을 파괴하는 것일까요.

전체주의를 파고들며 한나 아렌트는 특히 인간의 조건에 대해 깊이 사유합니다.

노동, 일, 행위로 분류하며 인간 삶의 터전인 '세계'를 재구성해봅니다.

특히, <예측 불가능하다>라는 점에 방점이 찍힙니다.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며 이타적으로 생각하기에 압박을 느끼며 일상을 살아가지만, 한편으로 사생홀을 보호받고 국가와 사회로부터 안정과 안전을 추구하며 개인의 개성을 드러내야 행복합니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그러므로 언제나 '공통' - Common Sense - 이라는 단어는 우리와 함께 합니다. 

이것이 딜레마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렌트가 말하는 것처럼 전체주의 기원을 파헤치고 인간의 조건을 사유하는 동안 우리 삶에서 무엇을 경계하며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의 과정은 굉장히 의미가 있습니다.


전체주의가 다시 나타날 가능성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전체주의가 파괴한 사람들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자유로운 "운동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 p.154 끊임없이 희망을 말하는 것


<전체주의라는 악몽>을 통해 가장 공감이 되는 문장이었습니다.

아렌트가 오랜동안 사유했던 우리의 일상을 통해 나온 말이라고 생각하면 더욱 무게있게 다가옵니다. 결국 인간의 책임과 판단은 인간 테두리 안에서 인간을 향한 우리의 공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출판사 지원도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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