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잠이 깨었다.

그녀의 냄새가 나를 깨웠다.
냄새는 종종 목소리, 얼굴의 기억보다 더 강하며 또 다른 감각의 세계에 속하는 그녀를 만든다.

도시의 밤은 결코 어두워 지지 않는다.
별이 없는 밤하늘은 으스름한 전등갓 처럼 밝혀진다.

친근한 그녀의 목소리가 벽 너머 콘크리트 기둥을 타고 올라와 창을 미세하게 진동시킨다.

밤안개가 뚜껍게 깔려 있다.
천천히 흘러가는 안개를 따라 가로등 수은불빛이 아지랑이 처럼 흐느적 거린다.
축축한 습기를 머금한 향긋한 흙냄새에 싸인 잔디밭을 가로 질러간다.

유쾌한 흥분으로 뜰뜬 그녀의 반 옥타브 높은 목소리가 이제 뚜렸해진다.

세그루의 미루나무 그리고 그 사이를 돌아가는 시냇물,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한여름의 멀리서 울려오는 매미울음과 사이사이 조용히 지나가는 풀벌레소리.
플라타나스의 그늘 아래 소름끼치도록 차갑게 스쳐가는  한줄기 바람.
심연속으로 천천히 천천히 가라앉는 졸음. 신이여 해체된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자그마한 공터에 낮게 깔린 엷은 안개를 날리며 나는 그녀에게 다가간다.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그녀.

새벽안개는 밝아지며 이제 그녀는 마치 영원히 그래 왔던 것처럼 나무그루터기 사이를 가볍게 뛰어 다니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알아 보지 못한다.

한여자가 나무 등걸에 앉아 있다.
그 여자의 무채색 옷이 안개와 어울려 그 여자가 있음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그 여자를 바라볼때 그녀의 얼굴에는 빛이 번득이며 그 여자에게 말을 걸때 그녀의 목소리는 소풍길에 나선 어린아이처럼 기쁨에 튀어 오른다.
 
그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여자는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어떤 말보다도, 그 어떤 행동보다도 그녀에게 살갑게 대함이 느껴진다.

나는 그 여자 앞에 서 있다.
그 여자 또한 얼굴을 들어 나를 찬찬히 바라본다.
그 여자에겐 눈이 없다. 입도 없다. 코가 있을 자리에는 적당한 돌기가 있다.
그 여자에겐 얼굴이 없다.

나는 잠깐의 슬픔과 가벼운 소름이 지나감을 느낀다.
나는 그 여자를 모른다.
그러나 그 여자가 왜 거기에 있는지는 안다.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그녀.

문득 잠이 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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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0-06-23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우연이라고 하기엔..사실 저도 그 여자를 종종 만납니다. 백화점 쇼원도에서요.
(요즘 마네킹이 제작비 절감 차원인지 눈,입은 없고 코 비스무리한것만 만들어놓더군요.)

chika 2010-06-23 22:43   좋아요 0 | URL
끝에 조금 무서워지려고 했는데 메피님 덕분에 웃고 갑니다. 히힛,,, (본문은 다시 안읽으랍니다 ㅠ.ㅠ)

마노아 2010-06-23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시에서 갑자기 호러가 연상되었어요. 반전의 대왕!

땡땡 2010-06-23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왜왜왜왜왜왜? 그 여자는 거기 있었어요? 왜왜왜왜왜?

Mephistopheles 2010-06-23 16:21   좋아요 0 | URL
(이글이글) 이 빠졌습니다.

Joule 2010-06-23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체홉의 <미녀>를 읽어보세요.

레이 님은 죽은 사람들과 같이 사는 사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