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짬뽕과 말러 교향곡 5번 ㅣ 특서 청소년문학 49
탁경은 지음 / 특별한서재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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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비교하고 또 자신이 비교대상이 되곤한다. 자신보다 더 뛰어난 사람, 더 특별한 사람, 더 인정받는 사람을 바라보며 비교 대상에 올린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삶'을 나만의 것이 아니라 누군가보다 낫거나 더 괜찮아 보이기를 바라는 것 같다. 『여름짬뽕과 말러 교향곡 5번』은 그 당연하게 여겼던 마음에 질문을 던지는 청소년 소설이다.

이 책은 특별한 사건으로 열어가지는 않는다.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 말을 건네는 등나무, 여름날의 짬뽕, 그리고 말러의 교향곡처럼 언뜻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요소들을 조합하여 '성장'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이야기는 독특한 설정을 위한 장치가 아니라, 주인공의 마음을 가장 솔직하게 비춰 주는 세상이 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등나무가 들려주는 '기다림'의 의미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은 배우면서도 정작 자신을 기다리는 법은 배우지 못한다. 조금만 늦어도 실패라고 여기고, 조금만 부족해도 스스로를 몰아세운다. 그러나 등나무는 씨앗이 수십 년, 때로는 백 년을 기다리듯 사람에게도 저마다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소설에서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의 방식이다.

그 기다림은 자연스럽게 용기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세상은 쉽게 "용기를 내라"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결심 하나를 하기 위해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그래서 "죽어라 도망만 치고 싶다"는 주인공의 고백은 나약함이 아니라 너무나 현실적인 마음으로 다가온다. 작품은 도망치고 싶은 감정을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을 충분히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직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성장은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두려움을 품은 채 한 걸음을 내딛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작품은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도 인상적이다. 우리는 흔히 이해가 관계의 출발이라고 생각하지만, 소설은 "이 세상은 이미 너와 다른 사람들로 꽉 차 있어"라고 말하며 그 믿음을 뒤집는다. 모든 사람을 이해하려 애쓰기보다 먼저 받아들이는 일, 그리고 사랑하게 되면 이해되지 않는 것조차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이해가 사랑의 조건이 아니라 사랑이 이해를 가능하게 만든다는 역설은 이 책의 독특한 제목과 맞닿아 따뜻한 시너지를 뿜어낸다.

친구들과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다는 고백 역시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소중한 사람이 생길수록 잃을 가능성도 커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관계는 설렘보다 두려움이 먼저다. 그래서 관계를 피하는 마음도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작품은 우정이란 드러난 마음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쉽게 꺼내지 못한 마음까지 함께 보듬는 일이라고 말한다. 결국 상처받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보다 상처를 감수하면서도 다시 사람에게 다가가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서 다시 시작된다.

특별함보다 고유함을 선택하는 순간, 비교는 더 이상 삶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누군가보다 뛰어나야 하는 삶이 아니라 나답게 존재하는 삶인 것이다. 성장의 끝에서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청소년 성장소설이면서도 동시에 어른들을 위한 위로가 되기도 한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소설은 서두르지 말라고 말한다. 조금 늦어도 괜찮고,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를 조금 더 오래 기다려 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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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주얼 의과학사 - 그림으로 읽는 의과학 혁명의 순간들
유임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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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조금 의아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에서 정자와 난자의 형상을 발견한 저자의 이야기는 뭔가 낯설었다. 그림에서 의학을 발견한다고? 라는 의문도 잠시 저자는 역사에 남은 그림을 해부하듯 의학이 발전한 역사를 보여준다. 책은 그림에 담겨 있는 의학의 역사 뿐만 아니라 인류가 무엇을 보기 시작했는가를 기록한 책이다. 정확히는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어 왔으며 그것이 의학으로 어떻게 드러났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의학의 혁명은 생각보다 더 단순하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서 변화를 일으켰다. 의학의 발전은 한 사람의 천재가 만들어낸 기적이 아니다. 많은 연구자들의 발견이 차곡차곡 쌓인 끝에 완성된 결과였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의료 기술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질문과 실패, 그리고 끈질긴 검증이 서로 맞물리며 하나의 거대한 톱니바퀴를 이루었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이 장면은 의학의 역사인 동시에 인간 사회의 역사이기도 하다. 새로운 지식이 발견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은, 기존의 상식을 바꾸는 일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진실은 증명되는 순간보다 받아들여지는 순간에 비로소 세상을 바꾼다. 갈레노스 시대의 의학은 몸을 직접 볼 수 없었다. 질병은 체액의 불균형으로 설명되었고, 신체는 추측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베살리우스는 직접 인체를 해부하며 수백 년 동안 이어진 권위를 수정했고, 하비는 심장이 혈액을 순환시키는 펌프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레이우엔훅은 작은 렌즈 하나로 인간의 눈이 닿지 못하던 미생물의 세계를 보여 주었고, X선은 몸을 열지 않고도 내부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마침내 DNA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지면서 의학은 세포를 넘어 생명의 설계도를 읽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도 않았다. 정확하게 치료하기 위해선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한다. 몸을 제대로 해석하는 건 생명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몸을 해부하고, 세포를 들여다보고, 유전자를 읽기까지의 과정은 치료 기술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발전했다. 제멜바이스는 손 씻기만으로 산욕열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을 통계로 증명했지만, 동료 의사들은 오히려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들의 손이 환자를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훗날 세균설이 정립된 뒤에야 그의 연구는 재평가되었다.

CT와 MRI, 초음파처럼 몸속을 정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에도 의사는 여전히 청진기를 목에 건다. 소리를 듣기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환자와 의사가 가장 가까이 연결되는 순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의학은 기술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람의 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사람에 의해 그 결을 달리한다. '암브루아즈 파레'의 사례를 보여주며 의사는 생명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몸이 회복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겸손함 또한 다룬다.

책을 덮고 나니 지금까지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게 보였다. 손을 씻는 일도, 백신도, 마취도, 항생제도, X선도 모두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바쳐 증명해야 했던 질문이었다. 우리는 그 질문들이 남긴 결실 위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의학을 전공하지 않는 일반 독자에게는 의과학을 이해하는 훌륭한 교양서가 되어준다. 그리고 그 긴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과학이란 결국 정답을 많이 아는 학문이 아니라 끊임없이 더 정확하게 보려는 태도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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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 - 보이지 않아도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인지노동'의 불평등
앨리슨 데이밍거 지음, 전경훈 옮김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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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은 이미 한 차례 치러졌다. 오랫동안 집안일은 사랑이나 의무로 여겨졌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사노동 또한 '노동'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청소와 요리, 육아에 투입되는 시간을 계량하고 가시화하는 연구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노동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드러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머릿속 노동은 누가 하는가>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 책은 시간을 기준으로 가사노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또 다른 노동을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바로 계획하고, 예측하고, 결정하며 가정을 운영하는 '머릿속 노동'이다.

그렇다면 왜 집안일을 분담하는데도 한 사람만 유독 더 지치고 피곤하다고 느낄까. 설거지는 반반 하고, 청소도 번갈아 하는데도 왜 누군가는 늘 머릿속이 바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저자는 그 이유를 인지노동에서 찾는다. 인지노동이란 몸을 움직여 집안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예측하고, 필요한 정보를 파악하며, 우선순위를 결정하고, 끝까지 확인하는 일련의 사고 과정을 의미한다. 집안일을 '실행하는 사람'과 집안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반드시 같은 사람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많은 가정에서 후자의 역할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점을 포착했다.

저자는 다양한 형태의 커플들을 인터뷰하며 인지노동이 실제 가정에서 어떻게 분배되고 있는지를 추적한다. 그 과정에서 집안일을 공평하게 나누고 있다고 생각하는 커플들조차, 정작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계획하고 예측하며 결정하는 머릿속의 노동은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이러한 불균형은 흔히 "내가 원래 꼼꼼해서", "상대가 원래 무던해서"라는 말로 설명된다. 하지만 저자는 이를 개인의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불평등을 성격의 차이로 환원하는 '성격 본질주의'라는 사고방식으로 분석한다. 즉, 성별에 따라 형성된 역할과 훈련의 결과를 타고난 기질의 차이로 받아들이는 순간, 인지노동의 불평등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굳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자는 모든 가사와 돌봄을 기계적으로 50:50으로 나누는 것이 해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실행'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계획하고 예측하며 결정하는 권한과 책임까지 함께 나누는 일이라고 강조한다. "쓰레기를 버려 달라", "장을 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여전히 한 사람이 전체를 기획하고 있다는 의미다. 진정한 재배분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먼저 알아차리고, 일정을 관리하며, 끝까지 책임지는 과정 자체를 함께 맡는 것에서 시작된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처음부터 효율적일 수 없다. 상대가 나와 다른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거나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도 감수해야 한다. 저자는 바로 그 '통제 내려놓기'가 인지노동을 재배분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공평하다고 믿었던 가사 분담이 반드시 평등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는 점이다. 눈에 보이는 집안일은 나누고 있었지만, 그 일을 계획하고 기억하고 책임지는 머릿속의 노동은 여전히 한 사람에게 머물러 있었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이 책은 우리가 막연히 느끼기만 했던 불균형에 '인지노동'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그동안 설명하기 어려웠던 불평등함을 가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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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끝
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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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아는 것이 힘이라고 믿는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고, 다가올 비극을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에게 그 흐름을 바꿀 힘이 없다면 어떨까. 미래를 아는 일은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확인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정말 힘이 되는 것은 지식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무지가 오히려 인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일까.


이 소설은 세상의 멸망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종말의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은 채, 그것을 막으려는 이들과 받아들이려는 이들의 선택을 따라가며 조금씩 세계의 윤곽을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종말 자체보다 종말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더 큰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끝을 유예하기 위해 시간을 붙잡으려는 사람들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이 책은 세상이 어떻게 끝나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질문에 집중한다.
세상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확실한 답을 갈망한다. 불확실성이 극에 달할수록 이성을 통해 의심하기보다 단언하는 목소리에 기대려 한다. 그래서 종말 앞에서 가장 빠르게 세력을 넓히는 것은 광신과 선동이다.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태도를 결정한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행동할 것인가. 이 소설은 종말 자체보다 그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믿음과 선택에 집중한다.

작품 속 《네크로노미콘》과 틸링해스트의 수학 역시 초자연적 장치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둘이 맞닿는 순간 지식은 세계를 향해 확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로보로스처럼 자기 꼬리를 물며 끝없이 자신을 증명하는 폐쇄된 회로가 된다. 원래 지식은 인간을 더 넓은 세계로 이끄는 힘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의 끝』에서 지식은 가능성을 여는 대신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인간은 진실을 깨닫는 순간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 안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지식은 더 이상 힘이 아니라 신경증적인 굴레다.

이 '닫힌 시공간'의 목적은 명확하다. 인물들을 제물로 삼아 시간을 동력으로 굴림으로써, 바깥 세계가 맞이할 진짜 종말을 막고 세계의 한 조각을 무한히 보존하는 것이다. "시간은 끝나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는 명제의 진짜 의미가 여기에 있다. 갇힌 자들에게 미래는 오지 않지만, 그 희생을 담보로 세상은 굳어진 채 유지된다. 종말을 막으려는 이들의 선택은 결국 세상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변화와 소멸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현재를 영원히 붙잡으려는 인간의 욕망처럼 읽힌다.

가장 흥미로운 비유는 이 소설 속에서도 나온 스노글로브다. 유리구를 흔들면 눈송이의 움직임은 매번 달라 보인다. 하지만 결국 모든 눈은 같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다시 흔들면 또 다른 궤적을 그리지만 결말은 달라지지 않는다. 『시간의 끝』의 세계 역시 그렇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되감기고,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두려워하는 것은 종말이 아니다. 끝을 맞지 못한 시간이다.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지도, 완전히 끝나지도 못한 채 영원히 자신을 반복하는 세계. 어쩌면 소멸보다 더 잔혹한 것은 영원이며, 끝보다 더 큰 공포는 끝을 맞이하지 못한 채 같은 시간에 영원히 묶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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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사회 프로젝트 - 노동과 여성·청년이 만나면 세상이 바뀐다
조돈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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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사회 프로젝트>라는 제목은 하나의 선언처럼 느껴졌다. 과연 평등사회가 하나의 '프로젝트'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저자는 어떤 방법으로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책은 이러한 질문에 답하듯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유지하는 구조와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를 차근차근 분석해 나간다. '평등사회'라는 다소 이상적인 목표를 현실에서는 어떻게 구현할 수 있다고 보는지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 사회가 미국식 자유시장 모델을 이상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과 북유럽 국가들의 복지 모델은 현실성이 없다고 여기는 인식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은 인상적이었다. 또한 노동운동이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연대보다는 일부 정규직 중심으로 인식되면서 대중적 신뢰를 잃었다는 비판 역시 현재 한국 사회를 돌아보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책은 단순히 불평등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노동·여성·청년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방향까지 제시한다.

그러나 책의 주장에 모두 동의하기는 어려웠다. 저자는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모델을 비교적 이상적인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각 국가가 처한 역사적·문화적·경제적 조건은 크게 다르다. 높은 복지와 강한 노조 체계가 성공적으로 운영된 배경에는 높은 조세 부담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오랜 정치적 신뢰가 존재한다. 이러한 전제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한국에서 같은 모델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사회 문제를 지배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선택이나 시장의 긍정적인 기능은 다소 축소되어 있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았다. 읽는 내내 저자의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면서도, 현실에 적용하는 과정에서는 다른 방식의 접근도 충분히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불평등 구조를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청년 세대의 자산 격차, 비정규직 문제, 지역 간 교육 격차와 같은 현실은 분명 개혁의 필요성을 보여 준다. '평등사회'라는 단어는 처음에는 다소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구호처럼 느껴졌지만, 책을 읽을수록 오히려 지금의 사회가 얼마나 불평등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었다. 정치권은 끊임없이 평등과 공정을 이야기하지만, 구조를 바꾸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은 쉽게 체감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왜 많은 청년들이 허탈감과 박탈감을 느끼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취업과 주거, 자산 형성의 문턱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청년들이 체감할만큼 구조가 달라졌는지 답하기 어려웠다. 최근 청년들의 정치적 양극화를 단순히 이념의 문제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무엇을 선택해도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무력감과 냉소가 누적된 결과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결국 청년들이 원하는 것은 특정 이념의 승리가 아니라, 노력한 만큼 기회를 얻을 수 있고 사회가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변화일 것이다. 책을 덮고 나서도 가장 오래 남은 질문은 '왜 우리는 지금의 불평등을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였다.

<평등사회 프로젝트>는 모든 해답을 제시하는 책이라기 보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고민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주장과 대안에 모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불평등을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의 문제라는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게 했다는 점은 분명 의미가 있었다. 큰 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과 책임 역시 함께 감수해야 한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복지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함께 부담을 나눌 때 지속될 수 있다. 세금은 적게 내면서 더 많은 복지와 혜택을 기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느 한쪽의 희생이 아니라, 어떤 수준의 부담을 함께 나누고 그 대가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불평등과 사회 개혁에 대해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계기를 마련해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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