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끝
김성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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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흔히 아는 것이 힘이라고 믿는다.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고, 다가올 비극을 피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모든 일이 이미 정해져 있고 인간에게 그 흐름을 바꿀 힘이 없다면 어떨까. 미래를 아는 일은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확인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정말 힘이 되는 것은 지식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무지가 오히려 인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일까.


이 소설은 세상의 멸망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다. 오히려 종말의 실체를 쉽게 드러내지 않은 채, 그것을 막으려는 이들과 받아들이려는 이들의 선택을 따라가며 조금씩 세계의 윤곽을 드러낸다. 흥미로운 점은 이 작품이 종말 자체보다 종말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에 더 큰 관심을 둔다는 것이다. 끝을 유예하기 위해 시간을 붙잡으려는 사람들과,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 이 책은 세상이 어떻게 끝나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질문에 집중한다.
세상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은 더욱 확실한 답을 갈망한다. 불확실성이 극에 달할수록 이성을 통해 의심하기보다 단언하는 목소리에 기대려 한다. 그래서 종말 앞에서 가장 빠르게 세력을 넓히는 것은 광신과 선동이다.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태도를 결정한다.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순응할 것인가, 아니면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끝까지 행동할 것인가. 이 소설은 종말 자체보다 그 앞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믿음과 선택에 집중한다.

작품 속 《네크로노미콘》과 틸링해스트의 수학 역시 초자연적 장치로 쓰이는 것이 아니다. 둘이 맞닿는 순간 지식은 세계를 향해 확장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로보로스처럼 자기 꼬리를 물며 끝없이 자신을 증명하는 폐쇄된 회로가 된다. 원래 지식은 인간을 더 넓은 세계로 이끄는 힘이어야 한다. 그러나 『시간의 끝』에서 지식은 가능성을 여는 대신 가능성을 닫아버린다. 인간은 진실을 깨닫는 순간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 안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지식은 더 이상 힘이 아니라 신경증적인 굴레다.

이 '닫힌 시공간'의 목적은 명확하다. 인물들을 제물로 삼아 시간을 동력으로 굴림으로써, 바깥 세계가 맞이할 진짜 종말을 막고 세계의 한 조각을 무한히 보존하는 것이다. "시간은 끝나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는다"는 명제의 진짜 의미가 여기에 있다. 갇힌 자들에게 미래는 오지 않지만, 그 희생을 담보로 세상은 굳어진 채 유지된다. 종말을 막으려는 이들의 선택은 결국 세상을 구하는 일이 아니라, 변화와 소멸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현재를 영원히 붙잡으려는 인간의 욕망처럼 읽힌다.

가장 흥미로운 비유는 이 소설 속에서도 나온 스노글로브다. 유리구를 흔들면 눈송이의 움직임은 매번 달라 보인다. 하지만 결국 모든 눈은 같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다시 흔들면 또 다른 궤적을 그리지만 결말은 달라지지 않는다. 『시간의 끝』의 세계 역시 그렇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되감기고, 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이 작품이 두려워하는 것은 종말이 아니다. 끝을 맞지 못한 시간이다. 시간이 앞으로 나아가지도, 완전히 끝나지도 못한 채 영원히 자신을 반복하는 세계. 어쩌면 소멸보다 더 잔혹한 것은 영원이며, 끝보다 더 큰 공포는 끝을 맞이하지 못한 채 같은 시간에 영원히 묶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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