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그래픽노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프랑시스 메티비에.이자 피통 지음, 이세진 옮김 / 지와사랑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우리가 꾸고 있는 꿈이라고 한다면 어느 곳에서, 어느 시간에 문득 깨어난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자신의 철학을 통해 우리에게 행복을 수업하고 있다. 이 책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만화 형식을 취한 책이다. 만화지만 들어있을 것이 다 들어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적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가진 책이다. 책을 읽는 내내 그림보다는 내용에 집중하다보니 한번 읽을 때는 그림보다는 글에 더 많이 집중을 하게 되었고 두 번째 읽을 때는 내용과 그림을 연결하면서 읽다보니 글만 읽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이해도가 더 높았다. 사실 쇼펜하우어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쓴 글이니 일반인이 한, 두번 읽어서 그가 의도한 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대 포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 책은 최소한 두 번 이상은 읽어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나는 두 번 읽었는데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읽고 또 읽었다. 또 문구 하나하나 보면서 조금 어렵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음미하면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책 제목에서와 같이 의지’, ‘표상이라는 단어 자체도 무척 어려운 단어이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의지라는 단어, 그러나 우리는 표상이라는 단어는 매우 낯설기도 하다. 그래도 수회 읽다보니 처음 읽을 때보다는 조금씩 이해가 되었고 쇼펜하우어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서도 이해하게 되었다.

 

내용을 들어가 보면 제1부에서는 직관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직관은 개념과 증명의 조건이다. 추상적 개념이 직관적 표상의 반영일지라도 인식을 증명하려면 그 개념이 필요하다. 증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또다른 증거가 필요하다. ‘직관증명은 샘과 물에 비유할 수 있다. 공간과 이동의 관계와도 비유될 수 있다. 진리는 증명에 사용된다. 모든 진리는 증명 이전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 이 때 의지이자 표상인 육체의 문제가 제기되는데 여기서 오성이 나온다. 오성의 결여는 우둔이다. 현상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는 존재는 어리석다. 쇼펜하우어는 유물론과 관념론 둘 다 비판하였다. 둘 다 절대 원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였다. ‘감정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지식이 타인에게 뭔가를 전달한다면 감정은 그게 어렵다. 도덕적 행위가 이성이 수반된 내재적 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스토아 학파가 주장한 불행한 이유는 가난이 아닌 욕망의 불충족이다. 지혜에 부합한 삶은 고통이 없다.’ 이러한 표현은 정말 멋진 표현 아닌가? 그러나 인간사회에서 이러한 말은 너무 추상적인 개념이다. 2부에서는 생명체에 대한 내용이다. 의지로서의 세계이다. 자연과학에 관한 내용이다. 과학은 사물의 외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내 안의 의지가 내 삶의 원동력이 된다. 밖에서 보아서는 본질에 이를 수 없고 직관을 통해 의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상 밖 육체는 의지이자 본질을 꿰뚫는 핵심이다. 모든 표상과 객관은 의지가 현상으로 나타나 개체화된 것, 즉 의지의 객관성이다.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 영감을 받았다. 플라톤에게 이데아가 있다면 쇼펜하우어에게는 의지가 있다. 살고자 하는 의지에는 원인도 합목적성도 없다. 그저 살기만 바랄 뿐이다. 3부에서는 예술에 관한 내용이다. 예술은 실용적이거나 도덕적인 게 아닌 의지의 표현이다. 예술의 유일한 목적은 의지의 관념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음악은 곧 힘이고 인간이 없어도 세계는 존재한다. 자연의 소리에도 음이 있다. 4부는 도덕이다. 의지로서의 세계, 일상에서 작용하는 의지 방식을 살펴보고 있다. 살고자 하는 의지, 우리를 정의하는 욕망이다. 삶의 의지는 현재에 있고 과거와 미래는 꿈일 뿐이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인생은 곧 고통이라는 석가모니의 말이 생각난다. 그런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자가 맞는 것 같다. 행복은 영속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관조만이 우리의 고통을 앗아갈 수 있다. 불행은 정상이고 행복은 덧없는 것이다. 결핍이 없으면 희열도 없고 불행이 없으면 행복도 없다. 쇼펜하우어의 신념은 우파니샤드와 윤회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선악을 상대적인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최고선은 없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의지가 없으면 표상도 세계도 없다.

 

쇼펜하우어 하면 염세주의자라고 하면서 그의 철학의 내면을 보면 행복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불행을 이야기한다. 상대적인 것을 제시하여 정작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였다. 쇼펜하우어가 마냥 염세주의자만은 아닌 이유다. 그는 역설적으로 불행과 고통을 행복을 위한 전제조건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그의 생각은 행복으로 가기 위한 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비관적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에게서의 고통과 불행 이러한 것들에서 희망을 찾았다. 독자들은 그의 책을 읽으면서 분명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이해했을 것이다. 내가 쇼펜하우어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그의 말에 공감하는 것이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