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럴 때마다 내비게이션이 되어준 건 영화였다.
회사를 그만둘 때, 베를린으로 떠날 때, 다시 돌아와 책방 문을 열 때도, 영화는 내게 인생에 여러 갈래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물론 그 길엔 아스팔트 대신 자갈밭이 깔려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럼에도 계속 걸어갈 수 있었던 건 나처럼 평범하고 지질한, 영화 속 등장인물들 덕분이었다.
어릴 적 여우의 이야기는 아이들에게 포기를 비웃으라고 가르치느라 정작 중요한 삶의 지혜—‘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방법—를 생략해 버렸다.
온 힘을 다해 뛰어도 여전히 나밖에 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진실하고 고유한 이야기를 영화 같다고 부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 당신의 선택이야. 계속 가기로 했으면 그 결심을 따라야지. 두 발로 딱 버티고 제대로 살아가는 거야.
"정신 차려. 니가 왜 안 되는 줄 알아? 이거 목숨 걸고 해도 제자리도 지키기 힘들어. 근데 넌 맨날 장난처럼 하잖아. 너처럼 하면 아무것도 안 돼. 다들 그렇게 열심히 한다고. 너만 빼고."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끈덕지게 물었다. 결국 어딘가로 향하는 게 인생이라면 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이고, 또 어디로 가고 싶은지.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떤 길로 걸어가든 내가 예상했던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내비게이션은 애초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글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가 가장 입체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내가 무얼 추구하는지, 무얼 할 때 살아 있다고 느끼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글을 쓰며 알게 되었다.
경험 후 얻은 것과 잃은 것을 기록하면 삶의 태도에 단서가 된다는 것도 쓰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내게 쓰는 일이란, 돈이 되진 않지만 거친 물살에도 무너지지 않고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도록 차곡차곡 둑을 쌓아 올리는 일이었다.
‘언젠가 내 마음껏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날이 온다면 세상에 내놓자. 언젠가 이해해 줄 거다, 언젠가 좋은 편집자를 만날 수 있을 거다, 언젠가 인정받을 수 있을 거다, 언젠가, 언젠가…… 언젠가는.’
"작품을 만든다는 건 자신의 마음속을 계속 들여다보는 일이야. 아무리 추악하고 한심해도 마주 봐야만 한다네."
"직장 다니는 동창들에게 항상 잘난 듯이 이렇게 말했어요. ‘꿈을 좇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는 달라.’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어요.
만화가를 목표로 하는 동안은 특별하게 있을 수 있었어요. 특별한 사람으로 있고 싶었어요."
현재를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에게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꿈을 좇으며 사는 예술가로서의 우월감과 자부심에 도취되어 있던 누마타의 에피소드는 이렇게 끝이 나지만 내 이야기의 결말은 조금 다르다.
놓지 못한 꿈을 끌어안은 채 자신의 작은 재능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 뚜렷한 목표 없이 벌인 일을 수습하며 사는 사람이 대다수일 테니까. .
내가 나를 마주한 채 써내려간 글이 지루하고 시시한 삶을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에게 닿을 수 있다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다.
동시에 작은 변화가 있다면, 내게도 목표가 생겼다.
‘언젠가’가 아닌 오늘, 어제보다 더 나은 글을 쓰는 것. 그래서 이왕이면 ‘출판사와 작가 모두가 행복해지는 중쇄’를 찍는 것
"네가 실수를 만드는 게 아니야. 실수가 널 만들지. 실수는 널 더 똑똑하게 하고 더 강하게 하고 더 자립적으로 만들어."
"난 당신과 달라요, 해리엇. 당신처럼 담력이 세지 못하다고요."
"실패해. 어마어마하게 실패해. 실패해야 배울 수 있어. 실패해야 사는 거야. 네 인생은 시작도 안 했어."
실패가 두려워 에세이 작가라는 꿈이 있음에도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살아온 앤에게 해리엇은 말한다. 크게 자빠지라고. 기꺼이 실패하라고.
스무 살이 되도록 나를 위한 시도나 실패를 해본 적이 없던 나는,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님한테 물어 봐야 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에게 실패란, 아빠의 기대를 저버리는 일이었다.
문틈 사이로 아빠의 취기 어린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날이면 나는 실패한 사람이 되곤 했으므로, 아빠가 바라지 않는 일은 애초에 시도하지 않았다.
다만 인생에서 맞닥뜨릴 크고 작은 선택의 순간에 누군가의 허락은 불필요하다는 것과 조금 무모해져도 별문제가 없다는 것.
그러니 시도하고 살아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다.
뭘 해도 스파이라고 생각하니 두근거린다. 가능한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게 사는 거다.’
느려터진 거북이도 헤엄칠 때는 의외로 빠른 것처럼, 나에게도 평범하지 않은 능력이 하나쯤은 있다.
스스로가 보잘것없는 엑스트라처럼 느껴질 때, 나의 평범함이 지겨울 때, 보통명사로서의 삶이 초라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나는 지금 평범하게 사는 임무를 수행 중이다. 나는 스파이 영화의 주인공이다’라고 주문을 왼다.
"언니, 나는 목포에서 지내면서 나 자신이 더 좋아졌다?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어."
존재 자체로 쓸모 있는 삶. 우리는 정말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괜찮을까.
우리는 이 세상을 보기 위해서, 세상을 듣기 위해서 태어났어. 그러므로 특별한 무언가가 되지 못해도 우리는, 우리 각자는 살아갈 의미가 있는 존재야.
냉침 밀크티 같은 사람이고 싶다. 사골처럼 고온에서 펄펄 끓여내진 않지만 낮은 온도에서 천천히 우러나는 사람. 적은 말수와 차분한 어조로도 깊은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고 싶다.
행복한 감정으로만 가득하던 어린 시절이, 이제는 떠올리기만 해도 슬픈 기억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슬픔이 때문에 전만큼 잘 웃지도, 장난을 치지도 않는 라일리를 보고 있자니 기쁨이는 궁금해진다. 슬픔은 꼭 필요한 걸까? 라일리를 위해서라도 슬픈 감정은 없는 편이 좋지 않을까?
우연히 깨닫게 된다. 행복한 기억 앞에는 언제나 슬픈 기억이 존재했다는 걸.
우리는 기쁜 순간에도 함께하지만 슬픔을 공유하면서 깊어진다.
때론 나와 같은 슬픔을 겪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 조금 더 견딜 만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위로에 서툰 건, 어쩌면 내가 슬픔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고민이나 슬픔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대신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슬픔을 공유하면 기분은 얼마간 해소될 수 있지만 상황 자체가 변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