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댁들 같은 사람들이 뭐가 겁나 도망가요? 파리에 뭐가 있는데요?"
"다른 삶이요. 도망일 수도 있겠네요. 공허하고 희망 없는 삶으로부터의."
당신같이 멋진 사람이 적성에 안 맞는 일을 억지로 하며 이런 곳에 사는 거, 이게 비현실적인 일이야. 나도 이런 생활 싫어.
누군가 파리에서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어디든 발붙이고 사는 건 비슷하다고 이야기해 줬다면, 현실 도피용으로 떠날 경우 만날 수 있는 건 또 다른 현실일 뿐이라고 말해 줬다면 에이프릴은 덜 비참했을까.
베를린에서 돌아온 나는 미약하나마 지면을 넓혀나가며 글로 밥 벌어먹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이 일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이전과 확실하게 달라진 점은 더 이상 현실에서 도망가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행복 같은 거, 여기에도 없다면 거기에도 없다’는 비관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태도가 바뀌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든 이전과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가 반복될 뿐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떠나든 떠나지 않든, 어디서든 단단한 마음으로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아가는 것.
어쩌면 나는 이 메시지를 얻기 위해 베를린에 다녀왔는지도 모르겠다
내게는 매일 밤 일기를 공유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있다.
발신인과 수신인을 알지 못한다는 점에서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되고, SNS 바깥쪽에 존재하는 나의 별 볼일 없는 오늘을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
이곳에서 나는 대체로 멍청하고 자주 흔들리며 할 일을 미루다 결국 후회하고 마는, 보통의 인간으로 존재한다.
이 익명의 온라인 일기장에는 몇 가지 규칙이 있다.
첫째, 절대 답장하지 말 것. 둘째, 되도록 매일 매일 남길 것.
나와 마찬가지로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생한 고민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 자체로 이미 답장을 받은 것 같기 때문이다.
숀이 말한 삶의 정수란, 에베레스트 꼭대기나 달의 표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 그러니까 월터처럼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특별하지 않은 날들을 보내는 사람들의 모든 순간인 것이다
역사 내에 전시 중인 지하철 사진 공모전 당선작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이리도 이른 시간에 역 구석구석을, 그것도 매일 매일 청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이었다.
내 일상이 이리도 무탈하고 안온하게 흘러가는 건, 삶의 모든 곳에 존재해 이제는 당연해져 버린 일들을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된 날이기도 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킴으로써 사회를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작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기 전에 실제 세상을 잘 관찰해야 한다.’는 줌파 라히리의 문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소재를 찾아 모험을 떠날 것이 아니라 삶의 한가운데에서 길어 올린 이야기, 곧 삶의 정수를 쓰고 전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라는 것.
그리고 나의 당연한 일상을 지켜주던 사람들을 수시로 떠올리며 일상에서도 유의미함을 찾아낼 줄 아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어쩌면 뒤늦은 다짐을 해본다.
애매한 도움은 불만족으로 이어진다는 셀프 인테리어 선배들의 말을 떠올리며 성호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전했다.
왜 나는 매번 그 애가 내민 손을 내버려두었을까. 얼마간 어색함을 감수해야 다시 시작되는 관계도 있다는 걸, 왜 나는 모른 척했을까
그럼에도 이들의 다정한 침범을 기꺼이 허락하는 이유는, 즐겁고 따듯한 기억은 마치 담요처럼 안 좋은 기억을 감싸 안아준다는 걸 책방을 운영하며 배워가고 있기 때문이다.
폴 마르셸이 부모의 비극적인 죽음을 기억해낸 후에도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처럼, 끔찍한 기억 위에 새로운 서사를 써내려 가는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 입에서 더 자주 발음되어지는 내 이름. 그래서 내 것이지만 완전히 내 것은 아닌 이름.
이따금 소나 닭소리가 전부였던 세상에 내가 있음을 알려주는 건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줄 때였다.
소설가는 아니지만 에세이를 쓰는 나도 하루에 수십 번씩 거짓을 지어낸다.
글을 쓰는 일은 나 자신을 꽤 그럴듯한 인간으로 윤색하는 일이기도 해서, 에세이에 등장하는 ‘이미화’는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미화와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
때때로 취향은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게 만들어버리곤 하니까
어떤 일을 얼마나 어떻게 해왔든 내가 원할 때 그만둘 수 있다는 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렸다고 했다.
통증 앞에서 무력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생생하게 신체 부위를 감각하는 사람이다.
신체는 아픈 틈을 타 발언권을 얻는다. 골반은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골반이란, 척추를 통해 아래로 내려오는 체중을 다리에 전달하는 중요한 부위라고. 끊임없이 소리쳤다.
익숙해진다는 건 옆 사람의 숨소리를 시계 초침처럼 들으며 잠에 드는 것, 한밤중에 옆자리를 더듬어 안정감을 되찾는 것, 2인분의 밥을 짓는 것, 눈에 띄게 치약이 빨리 줄어드는 것, 이 모든 과정을 의식하지 않고 반복하게 되는 것이라는 걸, 이제 나는 안다.
"New things get old."
새것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내가 나의 어린 날들을 잊어버렸다는 건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시간까지도 지워버린 거라는 걸,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었을까.
"인생에서 단 하나의 추억을 고르려니 과거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질 않아서 어렵네요."
"떠나려는 거죠? 선택하려는 거죠?"
"처음엔 필사적이었어. 내 안의 행복했던 추억을 찾으려고. 그리고 50년이 지나서야 내가 누군가가 선택한 순간의 일부였다는 걸 알았어. 이건 정말 멋진 일이야."
익숙해질 법도 한데 상처에는 패턴이 없어서 매번 다른 길로 흉이 졌다
어쩌면 ‘만약’이나 ‘차라리’로 대신할 수 없는 현실의 고단함은 친구와의 대화로 얼마간 해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상처는 그 이후에 생겨났다.
오직 먹이고 입히고 재우느라 자식이 받은 상처까지 돌봐줄 여유가 없던 부모를.
그 시절에는 다 그랬다고 생각하는 편이 상처를 덜 받는 방법일까.
내 한마디에도 바로 무너져버리는 늙은 부모에게 이제 와서 그때 나한테 왜 그랬냐고, 왜 한 번도 괜찮은지 물어봐 주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으면 나는 좀 괜찮아질까
엄마를, 그리고 아빠를, 이미 나는 10년도 더 전에 용서했다는 걸 알아버렸다.
물론 언제고 <벌새>와 같은 영화를 다시 본다면 유년의 기억이 깨진 유리 조각처럼 나를 찌르고 마음에 박혀 기어코 또 눈물을 뽑아내겠지만, 돌이킬 수 없는 과거로 부모를 미워하는 일은 그만두기로 했다
존경이 ‘당신처럼 되고 싶다’는 마음의 발로라면, 사랑은 완벽하지 않은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거라서, 단편이 아니라 삶 전체를 끌어안는 거라서, 나는 부모를 존경하는 대신 사랑하는 쪽을 택했다
어릴 적 꿈이라는 게 쉽게 불타올랐다가 곧잘 식어버리는 속성이라면, 내게 책방 주인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은은하게 지속되는 모닥불 같은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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