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릴케는 작가를 꿈꾸는 열아홉 살 프란츠 카푸스와 약 5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편지들은 릴케가 죽은 뒤 카푸스에 의해 책으로 묶여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고려대학교출판부, 2006)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말은 생각보다 작아서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다 담지 못한다.
말을 할 때 진심이나 감정을 싣더라도 그것은 완벽하지 않다.
실리다가 말고, 너무 많이 때로는 너무 적게 실려서 내 입을 떠난다.
아차, 하지만 이미 떠난 뒤라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다.
말에 ‘보편’과 ‘보통’을 담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이다.
설사 내 입에서 ‘보통’으로 출발해도 다른 사람의 귀에는 ‘특이’나 ‘특별’로 닿기 때문이다.
이렇게 진심(진심도 믿을 만한 것은 못 되지만)이 얼마나 담겨 있을지 모르는 상대의 비난이나 칭찬을 곧바로 내 마음에 들이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귀가 불편해지고 마음이 동요되는 말을 들었다면 그것을 최대한 늦춰서 들을 필요가 있다.
이 불완전함을 알고 받아들이면 듣기를 보류하기가 쉬워진다.
불완전한 것들에게 상처를 받는 것만큼 스스로가 초라해지는 순간은 없다.
상대방의 말이 불완전한 것처럼 우리의 말도 그렇다.
‘나는 언제나 진심을 다해 말하는데 다른 사람은 안 그래’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다.
생각과 마음의 크기가 1000이라면 말의 크기는 3 정도나 될까.
어느 누구도 악다구니하고 비난하고 욕하는 말들 속에서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구도 그런 인생을 꿈꾸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듣고 나도 좋은 말을 하면서, 그렇게 내 삶이 아름답고 품위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우리는 그 마음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며 살고 있을까?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에게 해주는 말이니 얼마나 좋은 말들이 많은지, 듣기만 해도 가슴이 따뜻해졌다.
30대 중반의 한 학부모는 발표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런데 한 분 한 분의 말을 들을수록 그것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거기에는 원했던 대로 살지 못한 후회와 가슴에 품어온 소망이 담겨 있었다.
이처럼 자신이 듣고 싶은 말, 하고 싶은 말, 가까운 누군가에게 해주는 말들은 결국 자기 내면의 목소리이다.
자신이 원하는 삶의 모습이 ‘말’로써 드러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다른 사람의 말도 잘 들을 수 있다.
내 마음을 읽을 줄 모르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알 수 없다.
내 마음을 위할 줄 모르면 다른 사람의 마음도 허투루 보게 된다.
나의 인생이 예뻐야 다른 사람의 인생도 어여삐 보일 것이다.
오늘따라 나도 ‘예쁜 말’이 듣고 싶다. 그런 날이다.
내가 언제부터 나 자신을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했는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부족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채우려고만 했다는 데에 있다.
내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채우기도 어려울뿐더러, 설사 채운다고 해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그렇게 밑 빠진 독을 채우기에만 급급하다 보니 나의 좋은 점들이 점점 구석으로 몰려 하찮게 취급된 것이다.
나 스스로를 문제 많고 부족한 존재로 생각하다 보면, 남의 말에 더 예민해지고 상처를 잘 받게 된다.
다른 사람의 훌륭한 조언을 듣거나 책을 읽어도 그때뿐이다.
좋은 것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영양소가 되지 못하고 몸 밖으로 빠져나갈 정도라면 아무리 좋은 처방전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 내가 바뀌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이러저러한 이유로 부족하다고 인식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기준이 있다는 뜻이다.
내가 만들어놓은 기준에 못 미치니 부족해 보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상 속의 내가 현실의 나보다 크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가 클수록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스스로가 못마땅해지고 다른 사람에 의해 그것이 자극될 때 상처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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