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에 근육이 이렇게까지 없어서 일상생활이 가능해요? 살려면 운동 좀 해야 해요."

육체는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지만, 그간 한 번도 내 그릇이 기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해볼 기회가 없었다.

체력은 생선가시 수준임에도 몸이 마른 편이라 그간 운동 필요성을 크게 못 느낀 점도 치명적이었다.

어떤 운동이든 여자 타깃으로 홍보할 경우 ‘단기간에 지방을 잡아 빼는 시술’이 되곤 한다. 20대 때는 주변, 광고의 영향으로 ‘마른 몸 = 예쁘고 건강한 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업무 강도 조절 브레이크가 고장 나자 상황은 달라졌다.

작대기 같은 몸에 에너지를 담을 공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매일 얕은 접시에 담긴 물을 간신히 떠먹는 느낌이었다.

다치지 않고 오래 운동하기 위해 공부도 해서 2018년엔 생활체육지도자 자격증을 땄다.

그 이후로도 책을 보며 운동과 공부를 꾸준히 병행하고 있다. 목표는 하나다. 정신을 담는 그릇을 지금처럼 건강하게 유지하기.

그래서 40~50대에 지금보다 더 괴상하고 제멋대로 살아도 지치지 않기

지루함이라는 블록들이 쌓여 만들어내는 마시멜로우 같은 순간들도 내겐 소중하다.

어제는 힘이 달려서 한 번 밖에 못했던 턱걸이를 언제 그랬냐는 듯 쑤욱 5번이나 할 때. 40킬로그램짜리 바벨을 지고 스쿼트하는 사람을 부러워했던 내가 어느새 60킬로그램짜리 바벨을 지고 안정적으로 스쿼트를 수행해낼 때.

사실 나는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웨이트 트레이닝의 멋짐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근육이 붙기 시작하면 얼마나 자기 효능감이 올라가고, 주변의 칭찬이 없어도 자존감이 얼마나 높아지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운동과 사랑에 빠지는 일의 진짜 효능은 ‘살이 찌든 빠지든 내가 내 몸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생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면 항상 수많은 갈림길이 존재한다.

건강을 위해서라면 우리 몸엔 적정량의 체지방이 필수다. 체지방은 체온을 보존하고 유사시에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여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남성에 비해서 체지방이 높은 편인 여성의 경우, 체지방량이 지나치게 낮으면 생리불순, 불임 등의 치명적인 호르몬계 이상이 생길 수 있다

근육은 우리 몸의 뼈나 관절 등을 붙잡아 고정시키고 일상적인 활동에서 파워를 내고 부상을 예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근육이 적으면 신체를 구성하는 뼈와 관절 등이 제대로 자세를 잡지 못한다

내가 못한다는 걸 진솔하게 받아들이는 경험이야말로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한 핵심 단계다

혼이 났다는 것, 즉 내가 못하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은 새로운 것을 시도했다는 뜻이다

자신의 목적에 맞는 운동 방식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내게 있어 가장 큰 목표는 더 많은 근육과 건강이다

운동을 하면 몸이 항상 가뿐하고 최상의 컨디션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운동을 하기 전엔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건 반쯤은 맞고 반쯤은 틀린 말이다. 꾸준하게 운동하다 보면 안 아픈 날보다 아픈 날이 더 많다. 근육통 때문이다.

운동으로 근육을 찢고, 찢긴 근육을 회복시키는 과정에서 근육이 커진다.

아무리 몸이 커다랗고 힘이 센 사람이라고 해도 근육을 더 크고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선 몸이 아플 정도로 ‘조질’ 수밖에 없다.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근육통이 일상인 이유다.

근육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초보자에게 근육통은 ‘그날 운동이 잘 됐는지’를 가늠할 유일한 단서이기도 하다.

한동안 혼자 운동하던 시절, 자세를 봐줄 사람도 없고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조차 아리송할 때, 다음 날 한발 늦게 찾아오는 근육통만이 내가 전날 운동을 제대로 했는지 알려주는 성적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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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을 바꾸었다 하더라도 무의식적인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인생은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환경을 탓하며 자책만 하고 있었다면 인생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테니 이만큼 극적으로 자신을 바꾸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환경을 바꾸는가.

나는 어디를 향하고 어떻게 되고 싶은가.

무의식적인 생각(=마음 버릇),
무의식적인 말(=말버릇),
무의식적인 행동(=몸 버릇)을 가다듬으면서
환경을 정돈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무의식적인 습관을 고치려면 물건을 정리해서 정돈된 환경을 마련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우선은 많은 물건을 줄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물건을 버릴 것인가. 쓸 만한 물건인가, 그렇지 않은 물건인가로 고르면 사실 대부분이 쓸 만한 물건이 되어 버립니다.

물건이 늘기만 하는 사람을 보면 대개 언젠가는 쓰겠지 하며 차곡차곡 쌓아 놓곤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쓸 물건’은 거의 안 쓰기 마련이고, 막상 쓰려고 하면 다른 것을 더 사야 하는 법입니다.

물건도 그 역할을 다하면 휴식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이건 전혀 쓰질 않았으니 아직 제 역할을 끝내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껏 경험으로 자신이 그 물건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으니 그 물건은 이미 훌륭하게 제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 고마운 마음으로 처분해도 됩니다.

쓰지 않더라도 가족의 추억이 담긴 물건, 좋아하는 물건 등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진다면 그 물건은 그대로 두세요.

나는 내가 더 노력할수록
운이 더 좋아진다는 걸 발견했다.
-토마스 제퍼슨

운이 좋다고 말해야
운이 들어온다

‘운’이 좋은 사람이란 한마디로 충족된 사람, 행복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운’이 좋은 인생이란 많은 것에 고마움을 느끼는 인생입니다.

그리고 ‘운’이 좋은 사람은 수많은 바람을 이루며 삽니다.

‘운’이 없다는 사람은 마음이 자신이 바라는 쪽으로 향해 있지 않고, 그것을 원한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행동도 그 방향으로 향해 있지 않습니다.

원하는 것에 마음이 향해 있지 않으면 다른 것만 보입니다.

원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자기도 모르고, 원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원하는 것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즉 ‘운’의 흐름은 ‘마음 버릇’, ‘말버릇’, ‘몸 버릇’의 ‘방향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운’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면 일단 자신이 바라는 쪽으로 마음을 두고(=원한다고 생각할 것), 그것을 말로 표현하고(=욕구를 내뱉을 것), 그 방향으로 나아가야(=행동할 것) 합니다

‘방향성’을 스스로 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운’의 방향을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난 원한다고 제대로 말했을까?" ← ‘말’

"정말 이 방향이 맞을까?" ← ‘생각’

"그 방향으로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 ‘행동’

지금의 나의 모습은 바로 내 습관의 집대성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자기가 지금 손에 쥔 결과를 역산해서 그것을 만든 습관을 찾아 바꾸는 것이 ‘운’의 방향성을 바꾸는 중요 포인트입니다

만약 지금 운이 나쁘다는 생각이 든다면 지금까지 무의식중에 반복해온 습관을 파악하고 바꾸어 가는 것이 ‘운’을 바꾸는 중요 포인트입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데 쓸데없이 낭비만 하고 계획적으로 저금도 하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면 그 ‘몸 버릇’을 바꿔야 합니다.

부자가 되고 말겠다고 입으로는 말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면 그 ‘마음 버릇’을 바꿔야 합니다.

돈을 모아 집을 장만하겠다면서 수시로 가게에 들러 뭐라도 하나 사야 직성이 풀린다면 좀처럼 돈을 모으지 못할 겁니다.

습관을 바꾸기란 입으로 말하는 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 습관이란 어떤 행위를 무의식 상태가 될 때까지 반복한 결과, 뿌리를 내린 것입니다

① 일단 줄곧 계속되는 습관의 횟수를 줄임으로써 늦춘다.

② 어느 정도까지 늦춰지면 멈춘다.

③ 원하는 결과를 향해 방향을 바꾼다.

④ 그 방향으로 움직임의 속도를 높인다

① 간식 먹는 횟수를 줄인다.

② 간식을 끊는다(①을 거쳤기에 끊기가 조금은 편해졌다).

③ ‘살이 빠진 나’를 머릿속에 그린다.

④ 새로운 식생활로 갈아타서 그것을 반복해 간다.

늦추다가(완화) 멈추고(중지) 방향을 틀어(수정) 속도를 높임(가속)으로써 습관을 바꾸어 가는 겁니다

매일 독경을 거르지 않고 계속하는 이유는 사소한 행동 습관을 반복하는 데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일까요. 자신이 정한 일을 의도한 대로 계속할 수 있다는 자신감(자신에 대한 신뢰)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내가 정한 약속을 스스로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 자기 자신에게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자신감. 이것이 있으면 ‘운’도 반드시 강해집니다.

‘운’은 ‘습관’이 만들므로 일정한 행동을 계속해서 ‘습관화’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으면 어떤 ‘습관’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무의식적인 습관의 힘을 알게 되면서 더 이상 겁먹거나 떨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것도 없고 계속 내려가기만 하는 것도 없습니다.

날씨가 바뀌듯, 혹은 몸 상태가 좋다가도 나빠지고, 나쁘다가도 좋아지듯, ‘운’이나 인생도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쁘게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사람은 대개 싫은 일은 자기에게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되도록 좋은 일만 일어나길 바라죠.

그리고 운이 좋은 사람이란 ‘좋은 일만 일어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운’이 좋은 사람에게도 나쁜 일은 일어납니다. 하지만 ‘운’이 좋은 사람은 나쁜 일을 호들갑스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정도야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받아들입니다. 요컨대 마음에 담아두지 않습니다.

유도로 비유하자면 낙법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상태입니다. 패배도 받아들이므로 넘어지는 법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넘어져도 괜찮습니다.

손해를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고 할까요. ‘운’이 좋은 사람은 그 그릇의 크기가 터무니없이 큽니다.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도, ‘하긴, 이런 일도 있는 법이지.’, ‘병에다 부상까지, 큰일이네. 그래도 목숨을 건졌으니 괜찮아. 앞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1억을 손해 봤잖아. 하지만 나중에 3억을 벌면 이익이 2억이나 남아.’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 낙법을 제대로 익힌 것입니다.

"손해 봐도 괜찮아. 손해 좀 본다고 운이 나쁜 건 아냐. 오히려 손해를 보면 운은 좋아져."라고. 끈질기게 그렇게 타이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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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에서 1기. 2기 전부 보고 만화책도 보고있다
애니메이션으로 보는 게 더 좋지만♡♡
만화책은 애니메이션에 없는 내용도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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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빠른 독자들은 내 말의 의미를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명의 벽돌공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마음가짐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그저 일을 한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은 일당을 벌고 있었다. 마지막 사람만이 벽돌을 쌓는 이유와 목표를 알고 있었다. 그는 벽돌을 쌓아 성당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作家, writer)가 ‘글’을 쓴 사람이라면, 저자(著者, author)는 ‘책’을 쓴 사람이다.

작가가 쓰는 글이 ‘벽돌’이라면, 저자는 그 벽돌을 쌓아 ‘책’을 완성하는 사람이다. 책을 쓰면 저자가 된다.

저자라는 말은 영어로는 ‘오서(author)’인데, 여기에서 ‘권위’를 뜻하는 ‘오서리티(authority)’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자신의 이름이 박힌 책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권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책을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 책을 쓰기 이전과 책을 쓰고 난 뒤의 삶은 많이 다르다.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기회들이 저자에게 다가온다.

저자는 책을 쓰지만, 책은 저자를 만든다.

책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삶이 펼쳐진다.

책이 팔려 수입이 들어오고, 책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책에서 다룬 내용으로 강연을 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책을 쓸 수 있는 좋은 조건이 형성된다.

첫 책을 쓰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써보면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쓰는 것은 한결 수월해진다.

책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단단한 매듭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매듭이 있는 삶은 쉽게 미끄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매듭이 발판이 되어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된다.

무덤에도 핑계가 있다는데, 삶이야 핑곗거리가 얼마나 많겠는가.

이 책을 읽고 용기를 내서 책을 쓰는 사람 역시 반드시 성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와 당신은, 책을 쓴다는 목표를 가지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길동무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러한 길동무를 도반(道伴)이라고 한다. 이제 여러분과 나는 도반이다.

학생과 선생이 아니라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며 힘든 길을 같이 가자. 나와 여러분을 응원한다.

특별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써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고 글로 쓸 수 있을 때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인가? 아마도 이 질문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 될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이 질문이 왜 중요하냐면, 책을 쓰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자신임을 밝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삶의 주인이 되려면 자신이 쓰는 언어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말하고 듣는 관계가 불평등하다면 거기서는 사랑과 우정이 아니라 권력이 형성된다.

일방적 말하기는 의사소통이 아니라 권력 행사이다.

거기서는 사랑과 우정이 싹트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이 생겨난다.

말하지는 못하고 듣기만 한다면 노예나 다름없다.

말을 하더라도 들을 말만 반복한다면 그 역시 노예와 같다.

자발적으로 글을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글을 쓸 리가 없다.

남이 쓴 글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는데, 자신의 글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쓰기는 읽기를 전제로 한다. 읽기가 1차적이고 쓰기가 2차적이다. 읽기 없는 쓰기는 없다.

돈이 되든 안 되든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기꺼이 쓰는 아마추어 작가에게서 좋은 글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자유인은 자기로부터 출발한다. 삶의 주인공이 되어 말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당시에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의 책이었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썼고, 망했다. 그러나 아무리 초라하고 실패한 책이라도, 그 책이 만들어준 인연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삶의 나날을 풍성하게 하였다.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어떤 작가는 평생 걸려 한 권을 쓰는데, 나는 그 한 권의 책을 하루 정도면 읽을 수 있다.

책을 쓰는 수고에 비하면 책을 읽는 노력은 새발의 피라 할 수 있다. 책을 써본 사람이기에 책의 소중함을 더욱 절감한다

우리는 왜 자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실패하는가? 몰라서가 아니다.

머리는 알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이다.

욕망은 태산처럼 높은데 그것을 이룰 몸은 나약하기 그지없다면 결코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

머리가 몸을 만날 때, 앎이 실천될 수 있는 몸이 만들어질 때, 기쁨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자전거를 타는 몸이 기쁘듯이, 악기를 연주하는 몸이 기쁘듯이,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오른 몸이 기쁘듯이, 책을 쓰게 된 작가의 몸은 기쁘다.

일상을 매끄럽게 운용하고, 신체가 유연해지는 것. 이것이 슬기로운 백수 생활의 핵심이다.

고수는 서두르지 않는다. 내공이 깊으니까. 백수도 서두르지 않는다. 시간이 많으니까.
(고미숙 저, 프런티어)-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장정일은 거의 매주 책을 읽으며 독서 일기를 연재하고, 그렇게 쌓인 원고로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일곱 권,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세 권이나 냈다

지금도 나는 평균 일주일에 두세 권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기억할 만한 내용들을 독서노트의 형식으로 정리한다. 이제는 거의 습관화된 나의 이 버릇은 1998년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읽으면 정리하기, 읽으면 쓰기는 작가의 기초 근육이다.

글이 모이면 책이 되지 않느냐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글이 모이면 그냥 글 더미가 될 뿐이다.

책은 글 더미가 아니다.
벽돌만 모은다고 집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글과 책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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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이 넘으면 부모가 자식을 돌봐야 할 아무런 의무나 책임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도 부모님의 말을 무조건 따라야 할 의무가 없어요.

그런데 요즘 젊은이들은 아직도 어린아이처럼 부모님의 도움은 얻고 싶고 반면에 잔소리는 듣기 싫어하니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세상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훈련이 되지 않아서 생긴 문제입니다

"소통의 핵심은 들어주는 겁니다.

지금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들려도 해보면 도움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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