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빠른 독자들은 내 말의 의미를 금방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명의 벽돌공은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대답을 했다. 마음가짐이 달랐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그저 일을 한다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은 일당을 벌고 있었다. 마지막 사람만이 벽돌을 쌓는 이유와 목표를 알고 있었다. 그는 벽돌을 쌓아 성당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作家, writer)가 ‘글’을 쓴 사람이라면, 저자(著者, author)는 ‘책’을 쓴 사람이다.
작가가 쓰는 글이 ‘벽돌’이라면, 저자는 그 벽돌을 쌓아 ‘책’을 완성하는 사람이다. 책을 쓰면 저자가 된다.
저자라는 말은 영어로는 ‘오서(author)’인데, 여기에서 ‘권위’를 뜻하는 ‘오서리티(authority)’라는 단어가 파생되었다.
자신의 이름이 박힌 책을 쓴다는 것은 그만큼 권위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책을 써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듯, 책을 쓰기 이전과 책을 쓰고 난 뒤의 삶은 많이 다르다.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기회들이 저자에게 다가온다.
책이 팔려 수입이 들어오고, 책을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책에서 다룬 내용으로 강연을 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책을 쓸 수 있는 좋은 조건이 형성된다.
첫 책을 쓰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써보면 두 번째, 세 번째 책을 쓰는 것은 한결 수월해진다.
책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의 단단한 매듭들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매듭이 있는 삶은 쉽게 미끄러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매듭이 발판이 되어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게 된다.
무덤에도 핑계가 있다는데, 삶이야 핑곗거리가 얼마나 많겠는가.
이 책을 읽고 용기를 내서 책을 쓰는 사람 역시 반드시 성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나와 당신은, 책을 쓴다는 목표를 가지고 같은 길을 걸어가는 길동무이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러한 길동무를 도반(道伴)이라고 한다. 이제 여러분과 나는 도반이다.
학생과 선생이 아니라 친구로서 우정을 나누며 힘든 길을 같이 가자. 나와 여러분을 응원한다.
특별하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써야 한다.
보통 사람들이 자기 생각을 당당하게 말하고 글로 쓸 수 있을 때 민주주의가 실현된다.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인가? 아마도 이 질문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이 될 것이다
‘나는 나의 삶의 주인인가?’라는 물음을 던졌다.
이 질문이 왜 중요하냐면, 책을 쓰는 것은 내 삶의 주인이 자신임을 밝히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삶의 주인이 되려면 자신이 쓰는 언어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간다.
말하고 듣는 관계가 불평등하다면 거기서는 사랑과 우정이 아니라 권력이 형성된다.
일방적 말하기는 의사소통이 아니라 권력 행사이다.
거기서는 사랑과 우정이 싹트는 것이 아니라 명령과 복종이 생겨난다.
말하지는 못하고 듣기만 한다면 노예나 다름없다.
말을 하더라도 들을 말만 반복한다면 그 역시 노예와 같다.
자발적으로 글을 읽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글을 쓸 리가 없다.
남이 쓴 글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는데, 자신의 글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쓰기는 읽기를 전제로 한다. 읽기가 1차적이고 쓰기가 2차적이다. 읽기 없는 쓰기는 없다.
돈이 되든 안 되든 자신이 좋아하는 글을 기꺼이 쓰는 아마추어 작가에게서 좋은 글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자유인은 자기로부터 출발한다. 삶의 주인공이 되어 말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당시에 내가 쓸 수 있는 최선의 책이었다. 나는 심혈을 기울여 썼고, 망했다. 그러나 아무리 초라하고 실패한 책이라도, 그 책이 만들어준 인연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삶의 나날을 풍성하게 하였다.
나는 책을 읽을 때마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어떤 작가는 평생 걸려 한 권을 쓰는데, 나는 그 한 권의 책을 하루 정도면 읽을 수 있다.
책을 쓰는 수고에 비하면 책을 읽는 노력은 새발의 피라 할 수 있다. 책을 써본 사람이기에 책의 소중함을 더욱 절감한다
우리는 왜 자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실패하는가? 몰라서가 아니다.
욕망은 태산처럼 높은데 그것을 이룰 몸은 나약하기 그지없다면 결코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없다.
머리가 몸을 만날 때, 앎이 실천될 수 있는 몸이 만들어질 때, 기쁨은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자전거를 타는 몸이 기쁘듯이, 악기를 연주하는 몸이 기쁘듯이,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오른 몸이 기쁘듯이, 책을 쓰게 된 작가의 몸은 기쁘다.
일상을 매끄럽게 운용하고, 신체가 유연해지는 것. 이것이 슬기로운 백수 생활의 핵심이다.
고수는 서두르지 않는다. 내공이 깊으니까. 백수도 서두르지 않는다. 시간이 많으니까. (고미숙 저, 프런티어)-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장정일은 거의 매주 책을 읽으며 독서 일기를 연재하고, 그렇게 쌓인 원고로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일곱 권,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을 세 권이나 냈다
지금도 나는 평균 일주일에 두세 권의 책을 읽는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 기억할 만한 내용들을 독서노트의 형식으로 정리한다. 이제는 거의 습관화된 나의 이 버릇은 1998년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읽으면 정리하기, 읽으면 쓰기는 작가의 기초 근육이다.
글이 모이면 책이 되지 않느냐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다. 글이 모이면 그냥 글 더미가 될 뿐이다.
책은 글 더미가 아니다. 벽돌만 모은다고 집이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글과 책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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