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그 의미를 풀어 보면,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제목은 ‘비극적인’ 과거로부터 얻은 교훈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샘솟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붙인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삶의 의미와 존재 가치를 일깨워 주는 대학자이자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런 그가 강제 수용소에서 한 경험은 이제 개인의 경험이 아닌 인류의 경험이 됐다.

이시형


강제 수용소에서는 모든 상황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상실하도록 만든다. 평범한 삶에서는 당연했던 모든 인간적인 목표들을 여기서는 철저히 박탈당한다. 남은 것이라고는 오로지 인간이 지닌 자유 중에서 가장 마지막 자유인 ‘주어진 상황에서 자신의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뿐이다.

끔찍한 공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작은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해서 이 책은 강제 수용소에서의 일상이 평범한 수감자들의 마음에 어떻게 반영됐을까 하는 질문에 답하려고 쓴 것이다

수용소 생활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은 수용소 생활에 대해 그릇된 생각, 즉 감상이나 연민을 갖기 쉽다. 하지만 밖에 있던 사람들은 당시 수감자 사이에서 벌어졌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 그것은 일용할 양식과 목숨 자체를 위한 투쟁이자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친구를 구하려는 피비린내 나는 투쟁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한 가지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위해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 아니면 이제 곧 끌려갈 친구의 목숨을 구해 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그래서 주저하지 않고 자기를 대신할 다른 사람, 즉 다른 ‘번호’를 수송자 명단에 집어넣는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어느 날 동료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가 자신을 지탱해 나갈 힘을 잃어버린 것으로 생각했다. 일단 그 믿음을 잃고 나면 살고자 하는 의지가 다시 생기기는 힘들었다.

"아우슈비츠야. 저기 팻말이 있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멈췄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그 모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름, 아우슈비츠! 기차는 망설이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불쌍한 우리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현실로부터 구해 내고 싶다는 듯이…….


"당신 친구가 간 곳이 바로 저기요. 아마 지금쯤 하늘 위로 올라가고 있을 겁니다."

나는 그가 쉬운 말로 사실을 이야기해 줄 때까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다.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변 환경으로부터 자기 마음을 어느 정도 분리시켜 어떤 일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을 갖게 한다.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보호하려는 수단으로 이런 마음가짐을 가꾸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하지만 정신 의학적 관찰은 아직 이런 것을 말할 수 있는 단계까지 진전하지 못했다. 우리 중 이런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전히 심리적 반응의 첫 번째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한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 중에서 잠깐이라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에게도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면서 겪는 고통이 자살을 생각하게 했다.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했다.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정상적인 것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밖을 봤다. 방금 전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다시 수프를 먹었다.

만약 그때 내가 정신과 의사로서 직업의식을 가지고 나의 감정 결핍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이 일을 기억해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그 일이 나에게 아무런 감정도 불러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작 참기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내가 여기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은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수감자라고 할지라도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있음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그 분노는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 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같이 됐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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