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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룬 산에 달이 높거든 - 한향(漢香) 두번째 이야기
스티에성 외 지음, 김혜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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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의 좋은 점은 유명한 중국 작가들의 유명한 수필들을 한 번에 살펴볼 수 있고 그만큼 다양한 내용과 다양한 서술기법들을 한 번에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보니 이 책에 수록된 작품 하나하나를 읽을 때 마다 느낀 점들이 다 다르다. 그래서 이번 비평문은 전체적으로 작품을 비평하기보다는 수록된 작품들 중에 내 기억에 가장 남고 와 닿았던 것 몇 편을 골라 그에 대한 느낀 점들을 중심으로 글을 써내려가려 한다.

나의 첫 번째 작품은 작가가 열입곱에서 스무 살 사이에 썼던 습작들, 메모나 일기 같은 것들을 모아서 후에 책으로 엮었다는 내용이다. 그 당시에는 글을 쓸 적에 어떠한 기교도 부리지 않고 소박한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썼기 때문에 사뭇 현재의 작가의 글쓰기법과는 매우 비교가 되었다. 고심 끝에 엮어낸 이 작품은 작가의 작품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된다. 그것은 작가 자신에게는 자그마한 개념이며, 독자들에게는 최상의 답례였다.

이 글을 읽고 나도 비록 작가처럼 문학적 소양이나 작문 능력이 뛰어나진 않지만, 나를 기념하기 위한 하나의 책 한권쯤 내고 싶어졌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도 아니고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아니고, 온전히 나에게 주는 선물로서. 이런 바램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해서인지 나는 메모하기나 일기 쓰는 것을 좋아한다. 내향적인 사람은 말하기보다는 글쓰기에 훨씬 능하다던데, 나는 말보다는 글로 내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익숙하고 좋다. 그 순간에 나만 느낀 그 유일한 감정과 생각들을 글로 써놓으면, 말과는 달리 사라지지 않고 영영 간직하며 언제든지 다시 곱씹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춘기는 학창시절에 있었던 일들과 유치하지만 순수했던 그 시절 그때의 내 모습들을 기록해 놓은 것은 내가 커서 몇 번이나 봐도 재미있을 하나의 소설책이 될 것이다.

시험으로 보낸 한평생은 시험으로 일평생을 보낸 작가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수필을 읽고 나서는, 이 작가만큼 내가 시험만을 위해 살지 않았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작가에게 연민이 생긴다. 작가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 또 오늘날 입시경쟁에서 발버둥 치는 많은 학생들과 사회에 나와서도 끝나지 않는 시험에 시달리는 사회인들, 말 그대로 시험으로 한평생을 보내는사람들의 모습과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나도 또한 이런 시험이 일상인 곳에서 자라왔기에 이 작품에 이렇게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이 슬프다. 현대인들은 시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이렇게 항상 자신의 능력을 시험지 한 장으로 평가받아야만 할까 하는 회의감도 든다. 한평생 시험에 시달려온 작가는 그러한 현실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만 그 자신도 결국에는 교편을 잡고서 학생들에게 똑같이 시험을 요구하게 된다. 나는 후에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절대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자식이 받지 않도록 하고 싶은데 이글을 읽으니 막상 그때가 되면 작가처럼 되지 않을까 두렵다.

조심! 조심!’은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가 중국을 여행하다 여러 번 속임수를 당한 에피소드들을 소개하고 이에 주의하라는 내용이다. 바가지, 덤터기, 소매치기를 허방다리, 올가미, 낚시걸이 등으로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지만 글의 마지막에서는 이렇게까지 추악(?)하게 변한 중국을 북유럽과 비교하며 작가는 한탄한다.

중국이 살기 힘들도 매사에 늘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중국인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열거한 것을 보니 기가 막힐 정도이다. 작가 중국인 자신도 인정하는 중국의 부도덕성은 가히 경악할 만하다. 중국이 경제적으로는 세계 2위를 달리고 있는 만큼 눈부신 성장을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정신적문화적인 수준은 발전해야 할 길이 먼 듯하다.

‘1백년의 청춘은 북경대학에 대한 글쓴이의 자부심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서두 부분에 북경대학 교정의 아름다움을 언급하면서 그곳이 가진 역사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북경대학을 과학과 민주의 고향’, ‘학문의 민주와 사상의 자유의 기지라 일컫는 것을 보 작가 자신이 북경대학 교수로써 모교에 짙은 애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학생쯤 되면 한 나라의 엘리트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무지한 국민들을 대표해서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나라를 개혁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기며 부조리간 것에는 항쟁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북경대학 학생들과 교수들이 1903년 러시아의 군대 미철수에 항러운동으로 애국심을 표현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지식인들의 활동과 의지가 있어야 그 나라의 미래는 밝고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학교가 참 자랑스럽다고 생각한다. 나는 신문이나 TV 등 대중매체를 잘 접하지 않아 시사나 상식에 대해 잘 모르는데, 우리 학교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뛰어나다. 자유게시판에서도 항상 공적인 사항에 대한 발언이 하루에 몇 번씩 떠오르고 자신들끼리 열띤 논쟁을 벌이는데 그러한 모습들이 매우 보기 좋고 청춘의 패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고등학교부터 시작해서 대학교에까지 우리나라의 교육제에는 병폐가 너무 많다. 자유로운 사고의 장과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하는 대학에서도 주입식 교육과 시험성적위주의 시스템이 끝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 학교 학생들이 저렇게 깊은 사고를 한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이제부터라도 나도 신문과 책을 많이 읽고 우리나라의 엘리트가 되어 우리나라 발전에 조력하도록 하려야겠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정말 재밌게 읽었다. 정말 어디서 들은 말처럼 후딱읽고 홀딱반한 책이다. 괜해 교수님의 추천도서가 아니었다. 우연히 고르게 된 이 책이 너무 재밌어서 같이 연재된 하늘가 바다 끝도 꼭 읽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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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향인 - 발췌 지만지 고전선집 647
중리허 지음, 고운선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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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읽은 타이완 작품 원향인’. 우리가 흔히 대만이라고 부르는 중화권 국가 타이완은 내가 교환학생을 목표로 할 정도로 특히 관심이 많다. 꽤 오래전부터 대만 드라마를 즐겨 봐왔고 대만 연예인에 눈을 들인 까닭이다. 내가 알고 있는 대만이란, 중국보다 더 깔끔하고 풍요롭고 여유로운 선진국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중국에속하는 같은 중화권 국가이지만 생활 모습이나 사람들 등을 보면 우리나라와 더 유사한 것 같았다. 항상 대만 연예인들은 예쁘고 멋있고 화려했고 드라마 속에는 낭만과 자유로움이 항상 담겨있어서 대만이 참 살기 좋고 평화로운 나라인 줄 알았는데 )(물론 이것이 현재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기나긴 이민의 역사와 일제 식민지의 아픔을 가진, 그저 속편한 나라가 아니었다는 걸 몰랐었다.

비록 이 작품속의 배경이 모두 타이완은 아니었지만, 작가가 타이완 사람 중 한명으로서 타이완인이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작품 속에서 잘 그려내고 있다. 이 책은 원향인, 협죽도, 도망 3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원향인은 굉장히 짧은 분량에 속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를 책 제목으로 정한 이유는 아마 작가 중리허가 가장 말하고 싶었던 주제, 즉 타이완인의 정체성에 대해 가장 가까이 다루고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작가 중리허는 타이완이 일제 치하에 있을 때 태어나서 자라는 가운데에서도 많은 다양한 작품들을 창작해왔고 병으로 몸져 누워있는 상황에서도 이런 작가 정신을 버리지 않았다. 이 작품도 작가가 생을 마감하기 바로 그 전해에 창작되었다고 한다. 중리허는 일본의 식민 통치로 인해 일분어로 사고하고 작품 활동을 하는 세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황과 처지에 상관없이 자신과 국가의 정체성과 같은 심도 있는 고민을 하고 작품들을 써내려갔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문학은 그 시대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는데, 특히 이 작품은 장가 중리허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서 타이완의 과거 역사를 이해하면 작품 속에 잘 녹아들 수 있다. 원향인에 나오는 주인공은 할머니와 아버지, 둘째 형을 통해서 알게 된 원향’, 즉 중국 대륙에 대한 막연한 환상과 동경 등을 품게 된다. 하지만 이런 긍정적인 측면만 품고 있지는 않다. ‘그들의 손이 닿으면 깨진 물건은 금세 좋아졌다(33p)’는 부분이나, 열심히 일하는 쟁기 주조공들에게처럼 원향 사람을 긍정적으로 품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개고기를 좋아하여 온 망르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개를 잔인하게 때려잡는 장면이나 원향인들을 염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32p)’라고 평가하는 부분을 보면 부정적으로 원향인을 인식하는 장면도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글의 끝에서 주인공은 그 중국 대륙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에 마지못해 둘째 형을 뒤따라 타이완을 결국 떠나게 되지만 그 동경과 환상은 실망이라는 감정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협죽도에서는 베이징을 대표하는, 혹은 중국을 대표하는 주택 사합원의 모습이 잘 묘사되고 있다. 작가가 타이완이 아닌 중국의 전통가옥 사합원을 제재로 하여 그 곳 인물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아마 작가가 타이완을 떠나 베이징으로 갔을 때 느낀 원향에 대한 상실감으로 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당시 하층 소시민들의 물질적인 빈곤과, 인간을 인간답게 해 주는 이성과 도덕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작가가 어릴 적 마을에서 본 힘차고 빛나는 원향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따라서 원향인에서 원향이라는 단어는 대만 사람들에게 있어 다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근원, 원류, 본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대만 사람들이 중국 대륙에 대해 가지고 있는 혈연적문화적 유대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글자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륙에 대한 유대감과 자부심뿐만 아니라 실망경멸이라는 부정적인 정서가 들어있기도 하다. 막연한 애환이나 그리움 때문에 원향을 찾아가지만 직접 겪어 본 원향은 자신이 꿈꾸던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안타까움도 담겨있는 것이다.

어쨌든 책 안에서 가장 스토리가 길었던 협죽도는 빈곤과 삶의 무게에 찌들린 소시민들이 겪는 외면적내면적 갈등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척박한 자갈과 그늘진 잡초와 같은 곳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햇빛의 따스함을 맛볼 수 없었다. 하루하루를 그저 쥐꼬리만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마지못해 살았고 이런 그들에게는 도덕과 법률이란 참으로 우스운 것이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노부인은 정신상태가 이상해져 사합원 내에서 이웃 사람과 마주칠 때마다 곧장 쫓아가 당신은 어째서 나를 거들떠보지 않나, 우리는 모두 사이좋은 이웃이잖아(76p)’ 라고 하소연한다. 사합원이라는 공동 생활공간 안에서 그들은 함께 살아가지만 공동의식을 갖기는커녕 남의 집 문 앞에다 우리 집 똥물을 냅다 버리고 계모가 전처의 자식을 학대하여 굶겨 죽이고 워워터우 두 개 때문에 어미와 아들 사이가 냉혹해지고 형제가 서로 다투는 일들이 일어난다. 이러한 모습들이 보이는 중국 대륙에게 회환을 느낀 나머지 작가는 다시 중일전쟁이 끝나자마자 타이완으로 영구 귀국을 했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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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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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인생이라는 작품의 작가는 책 서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 작품은 한바탕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주인공 푸구이의 이야기를 통해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넌지시 제시한다. 그 답은 방금 말한 대로 그저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란 것이다.

소설 속 는 어느 한 농촌마을에 민요를 수집하는 일을 하러 왔다가,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나서 그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렇게 작품은 전체적으로 푸구이가 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푸구이는 젊었을 때부터 조상이 대대로 물려진 유산덕분에 비교적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늘 부잣집 도련님들은 철이 없는 것처럼, 그는 결혼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계집질이나 도박을 일삼았으며, 아이를 밴 아내까지도 구박하기 일쑤였다. 그런 그가 도박꾼 룽얼에게 자기 집안 전 재산을 빼앗기게 되면서 그의 삶은 180도 달라지게된다. 재산 탕진으로 인한 충격으로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서 그는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일을 해야 했다. 그러다 몸이 약해진 어머니를 위해 약을 구하러 가다 국민당군들에게 잡혔는데 겨우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낳은 딸 펑샤는 열병을 앓다 그만 농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둘째로 낳은 아들 유칭은 헌혈을 하다가 어처구니없게 목숨을 잃고, 딸 펑샤는 완얼시라는 사위를 겨우 얻어 혼례를 치렀으나 아이를 낳다가 사망한다. 뒤이어 자신과 고된 나날을 늘 함께 해왔던 아내 자전도 잃게 되고, 사위 얼시도 공사장에서 일하던 도중 시멘트에 깔려 목숨을 잃었으며, 마지막에는 딸이 남긴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쿠건도 콩을 너무 많이 먹어 죽게 된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곁에 있던 소중한 사람들을 단 한명도 빠지지 않고 잃게 되고, 결국 끝에는 자기 자신만 덩그러니 남아 이렇게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남에게 들려준다. 그의 삶은 객관적으로 봤을 때 더 이상 비극적일 수 없을 만큼 가련했다. 이토록 인생이 밑을 달리기도 힘든데 그는 이러한 삶을 고스란히 수용하여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한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에 애정을 품고 있는 듯 그는 과거를 회상하기 좋아했고 자기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고생스럽고 가난한 생활을 한 것을 운명이라 여기며, 아직까지 홀로 살아남아있는 자신을 뿌듯하게 여기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 작가 위화가 말하고자 했던 그 인생과 일치하는 것이다. 비록 삶에 고난과 고통이 있어도 좌절하기보다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저 살아있기에 묵묵히 앞을 보고 살아가는 것……

상처와 고통을 끌어안고 묵묵히 소와 밭을 갈며 노인이 된 푸구이의 인생도 작가의 말대로라면 의미가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작품의 원제 살아간다는 것(活着)‘은 매우 힘이 넘치는 말이며, 그 힘은 인내, 즉 생명이 우리에게 부여한 책임과 현실이 우리에게 준 행복과 고통, 무료함과 평범함을 견뎌내는 데서 나온다고 밝혔다. 하지만 나는 인생을 이보다 좀 더 적극적인 것으로 여기고 싶다. 자신의 삶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받아들이고 인내하고 견뎌내는 것과 같은 수동적인 자세들보다는, 자신이 자기 삶의 주체자로서 인생을 좀 더 가치 있게 살려고 노력하고 개척하고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능동적인 자세를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푸구이는 이미 머리가 하얗게 샌 노인이 되었지만, 악덕했던 그의 젊은 시절을 보았을 때 그는 분면 개과천선한 케이스이다. 어떻게 보면 자신의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세상을 떠나게 된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그의 잘못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푸구이를 우리는 구차한 삶에 대한 집착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데, 오히려 이렇게 살아있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푸구이가 조금은 얄밉기도 하다.

이 책의 제목인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 깊게 한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푸구이의 기구한 인생이야기를 읽어나가면서 (비록 그가 가상인물이긴 하지만) 나는 지금의 내 인생, 적어도 푸구이보다는 행복한 내 인생에 감사하게 되었다. 때로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고난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생명은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기에, 살아있다는 것은 하나의 특권일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있는 우리 자신과 우리 곁에 있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하고,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을 좀 더 가치 있게 살도록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또 한 번 거론하고 싶은 것은 바로 가족의 소중함과 사랑이다. 푸구이와 그의 가족들은 힘겨운 인생을 겪었지만 그나마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들 간의 사랑 때문이 아닌가 한다. 푸구이의 아내 자전는 남편이 어떠한 상황 앞에 놓여있더라도 항상 그를 바라보고 함께 곁에 있어주었다. 철없는 남편에게 무시당하고 맞아가면서도 남편을 사랑하고, 다음 생에서도 함께 하고 싶다고도 말한다. 펑샤와 얼시도 그들 서로의 단점을 감싸주며 예쁘게 사랑했고, 펑샤가 아이를 낳을 때 목숨이 위협되자, 자식과 부인 둘 중에 선택하라는 의사의 말에 망설임 없이 아내를 택한 얼시에게는 정말 감동받았다. 이들의 사랑은 요즘 같은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사랑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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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집
라오서 지음, 신진호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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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허의 <찻집>은 아마도 내가 처음 읽은 중국 희곡 작품일 것이다. 라오허라는 작가는 학기 초 토론 작품인 뱀 선생을 통해 처음 알게 되어, 이후 <낙타샹즈>라는 그의 작품을 재밌게 읽으면서 이 작가의 이름을 내 머릿속에 새겨두게 되었다. 그래서 이 <찻집>이라는 책을 보았을 때 라오허작가의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보고는 내가 처음 보는 희곡이지만 전혀 부담감 없이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생각했던 대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작가 라오허의 희곡 창작 시기는 신중국 수립 이전과, 신중국 수립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를 포함하고 있다. 내가 작가 라오허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풍자수법이 신랄하고, 이야기가 읽기도 쉽고 재밌기도 하지만, 이렇게 그의 생애가 중국의 다양한 역사적 시기에 걸쳐져서 그만큼 다양한 역사적 상황을 작품 속에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찻집>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 및 항일 전쟁 이후 등의 세 역사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각각 1막씩 구성되어 있다. 글의 주인공 왕리파는 베이징에서 찻집을 운영하는 주인이다. 이 찻집은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의 주요 공간적 배경이 되는데, 각기 각층의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종의 광장 같은 곳이었다. 시간이 흘러 시대적 상황이 조금씩 변하면서 찻집도 조금씩 변해가고 왕리파도 같이 늙어간다. 그의 자식과 손자 세대에 걸칠 만큼 세월이 흐르지만 좀 더 나은 인생을 살아보려고 발버둥 치던 작품 속 모든 등장인물들은, 변하는 역사와 시대의 압박에 견디지 못하고 각자 쓴 결말을 맞게 된다.

희곡이라는 것이 원래 연극 상연을 위한 시나리오라서 다양한 등장인물들이 나오는데, 처음에 책을 읽기 전에 소개된 등장인물들이 장장 5페이지에 걸칠 정도로 많았다. 이 많은 등장인물들을 어찌 다 기억하고 책을 읽어나갈까 걱정을 했지만 이야기 진행 순서대로 새 등장인물들이 등장해서 책을 읽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또한 희곡은 이렇게 주로 등장인물들의 대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것만으로도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잘 드러날 수 있을지, 너무 많은 인물들의 등장으로 내용이 산만해지지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이 책은 라오허의 대표작답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각자의 개성이 두드러지는 인물들을 통해 작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잘 나타낸 것 같다.

이 작품에서는 희극성과 과장법이 특히 두드러지는데,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하여 관객들의 웃음을 유발하게 하는 부분은 특히 3막에 자주 나온다. 101쪽에 전기세 수납원과 왕리파와의 대화 장면, 107, 108쪽의 대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이 책은 중국 근현대사 50년의 급변하는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중국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작품을 읽으면 이해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작품에서 마지막에 자살을 한 왕리파는 찻집을 꾸려나가면서 이익을 챙기지만 본성이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가게 안에는 나랏일은 논하지 말 것이라는 종이가 항상 붙어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꽃피우는 게 중에는 당연히 정치적인 색채를 띤 발언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이 매우 뒤숭숭했기 때문에 말 한마디 실수로도 얼마든지 피해를 당할 수 있었다. 가게에 걸려있는 종이는 막이 바뀌고 시대적 상황이 바뀔 때 마다 글씨가 더 많이, 더 크게 바뀐다. 아마도 정치적인 발언으로 인해 소동이나 사고가 일어나서 자신의 가게에 피해주는 것을 우려하여 왕리파가 붙여놓은 것이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왕리파는 자기 나름대로 찻집을 개량하며 살아가고자 노력했지만 결국은 죽음을 맞이했고, 재산을 날린 친중이나 애국자인 창대인도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흘러 등장인물들이 낳은 자식들은 자라서 자신의 부모가 했던 일들을 고스란히 물려받는다. 왕리파의 아들은 찻집에서 일을 하고, 나머지 자식들도 부모님의 가업을 그대로 물려받았는데,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성마저도 그대로 물려받은 듯 했다. 이는 아마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지만 여러 세대를 거친 그들 역시도 역사적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부록 편에는 몇 마디의 노래를 부르면서 동시에 간략하게 글의 내용을 소개하는 부분이 나와 있는데, 원래는 이러한 부분이 막과 막 사이에서 상연된다고 한다. 하지만 연극이 아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이 부록편이 첫 부분에 나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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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샹즈 황소자리 중국 현대소설선
라오서 지음, 심규호 옮김 / 황소자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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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骆驼祥子>는 여태 읽었던 몇 되지 않는 토론 작품들 중 가장 속도감 있게 읽은 책이다. 이전에 읽은 <蛇先生><魯迅소설전집>은 둘 다 단편들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짧은 단편들 속에서 작가가 사상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너무 강해서 조금은 딱딱하고 상징성이 지나치게 높은 감이 있었다. 반면에 <骆驼祥子>는 주인공 祥子의 인생을 하나의 스토리로 하여 좀 더 문학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骆驼祥子>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北平성의 한 인력거꾼 祥子로부터 시작된다. 北平성에는 수많은 종류의 인력거꾼이 있는데 개중에는 인력거를 빌려주는 부자 전세 주인 刘四爷으로부터 인력거를 빌려 하루 밥벌이를 겨우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인력거꾼들이 있었으나, 祥子는 그 중 나름대로 성실하고 능력 있는 인력거꾼에 속했다. 가족도 친척도 처자식도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는 祥子는 비록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시골 청년에 불과했지만, 건장한 체력과 성실성만은 그 누구 못지않았기에 힘든 인력거생활도 그에게는 고진감래를 위한 디딤돌로 느껴졌다. 언제나 자신만의 인력거를 장만하는 데에만 뜻을 두고 말 그대로 앞만 보며 인력거를 끈 祥子에게 닥친 첫 번째 고난은 바로 전쟁이었다. 패잔병에게 끌려가면서 자신이 새로 겨우 장만한 인력거를 잃고, 인력거와 더불어 자신이 생각해놓았던 행복한 미래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祥子는 처음 인력거꾼이 되었을 때 품은 희망과 꿈, 자신이 바래왔던 미래는 점점 그의 손에서 멀어져 갔고 祥子의 인생은 바닥을 향해 치닫으며, 자신을 사랑했고 독립적이었던 건장하고 위대했던 祥子는 결국 보통의 인력거꾼들과 같이 변해버린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祥子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그의 인생에 나타나는 액운에는 이마가 저절로 찌뿌려지고 또 祥子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그가 위가나 고난을 극복하면 나도 한시름 놓고 뿌듯한 엄마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고 책을 덮었을 때에 내가 느낀 점은 祥子에게 보였던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 자주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祥子는 인생은 망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祥子의 인생은 결국엔 하향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그 과정에 약간의 기복이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점점 밑을 향해 내려가는 결말을 피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작품을 읽을 때에는 등장인물이나 주인공에 대해 아까도 말했다 시피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면서, 자신과 비교하고 또 그들에게 자신을 투영해보기도 한다. 祥子를 봤을 때 그는 일단 말수가 적고, 말수가 적은만큼 생각이 많은데 이 점이 나와 정말 닮았다. 또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삶의 의욕을 잃을 만큼 미래지향적이고, 자신의 꿈과 의지를 소중히 하는 긍정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그의 인력거에 대한 애정과 자신이 맡은 인력거 일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나다. 그에게는 인력거를 끌어 밥벌이를 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기개 있는 일’(23P)이었으며, ‘烙饼을 포함해서 모든 먹을 것을 만들어내니, 만능 전답이자 온순하게 그를 따르는 생명력 있는 토지, 보배로운 땅’(24p)이었다. 또한 그는 생각하는 것은 느렸지만 나름대로 주도면밀했으며, 일단 생각이 나면 그 즉시 실행에 옮긴다는 점, 또 약간은 지나친 걱정으로 인해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마저 나와 비슷한 성격이다. 나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이토록 祥子가 점점 망가지고 망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더욱더 祥子가 가엽게 느껴지고, 이렇게까지 만든 모든 부정적인 상황들에 대한 울분이 치밀었다.

祥子는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인력거를 잃고, 이후 힘들게 모은 재산을 또 형사에게 강탈당하다시피 하고, 虎妞의 계략에 걸려 억지결혼생활까지 하며, 그런 그녀마저도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함께 하늘나라로 보내고, 마지막에는 小福子의 죽음까지 겪게 되면서 祥子는 이미 더 이상 예전의 祥子가 아니게 된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이 만약 있다면, 작품 속에서 이 운명이란 것은 祥子에게 고난만을 주지는 않는다. 패잔병에게 끌려간 祥子가 낙타를 데리고 성안으로의 탈출에 성공하기도 하고, 예전에 일했었던 인자한 차오 선생을 만나 다시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잠시나마 하게 되고, 수중에 돈이 몇 번 들어오기도 하는 등 중간 중간에 희망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들도 결국은 오아시스가 아닌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祥子의 삐뚤어진 인생이 다시 정도(正道)를 찾는가 싶다가도, 이제야 잘 굴러가나 싶다가도, 결국 이러한 희망들은 비누방울처럼 사라져버린다. 그토록 달콤하게 유혹하던 희망들이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오히려 祥子는 좀 덜 고생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가 탓해야 할 것은 이런 시덥지 않은 희망에 눈먼 祥子가 아니라, 이런 작디작은 희망도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리는 그 현실사회가 아닐까. 이 작품 속에서 祥子가 내리막길의 인생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은 그 사회에서라면 우연이 아닌 필연, 운명이 아닌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의지에 상관없이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사회현실에서는 祥子가 아닌, 또한 인력거꾼이 아닌 당대 하층민 누구라도 그 사회상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남는 것이 지푸라기라도 없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祥子의 꿈은 정말 소박했다. 그저 열심히 닥치는 대로 일해서 자신만의 인력거를 한 대 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소박한 꿈마저 그곳에서는 높은 벽이었으며, 현실은 그보다 더 높은 벽이었다.

이러한 사회 구조자체의 문제로 인해 개인이 희생당하는 것은 작가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반제국반봉건을 외치다 老舍처럼 피투성이 속에서 사라져버린 사람은 아마 수억 명이 될 것이다. 달리 말해 사회구조는 개인을 부당하게 억압하고 죽음에 이르게까지도 한다.

祥子骆驼祥子라는 별명을 비록 의도치 않게 얻게 되었지만 나름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낙타는 산을 타지도 못하고, 한번 쓰러지거나 다리가 부러지면 걷지도 못한다. 인간을 위해 짐을 싣고 나르지만 한번 쓰러지면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이, 사회 구조라는 큰 틀속에서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祥子와 비슷하기도 하다. 祥子가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술과 담배와 여자에 찌들려 사는 보통의 인력거꾼들과 다름없게 되어벼렸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부조리한 사회 현실의 책임이 더 커보여서 祥子만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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