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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샹즈 ㅣ 황소자리 중국 현대소설선
라오서 지음, 심규호 옮김 / 황소자리 / 2008년 2월
평점 :
<骆驼祥子>는 여태 읽었던 몇 되지 않는 토론 작품들 중 가장 속도감 있게 읽은 책이다. 이전에 읽은 <蛇先生>과 <魯迅소설전집>은 둘 다 단편들로 이루어져있는데, 그 짧은 단편들 속에서 작가가 사상을 전달하려는 의도가 너무 강해서 조금은 딱딱하고 상징성이 지나치게 높은 감이 있었다. 반면에 <骆驼祥子>는 주인공 祥子의 인생을 하나의 스토리로 하여 좀 더 문학적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에 더 집중해서 재밌게 읽을 수 있었다.
<骆驼祥子>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北平성의 한 인력거꾼 祥子로부터 시작된다. 北平성에는 수많은 종류의 인력거꾼이 있는데 개중에는 인력거를 빌려주는 부자 전세 주인 刘四爷으로부터 인력거를 빌려 하루 밥벌이를 겨우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인력거꾼들이 있었으나, 祥子는 그 중 나름대로 성실하고 능력 있는 인력거꾼에 속했다. 가족도 친척도 처자식도 가진 것도 아무것도 없는 祥子는 비록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시작한 시골 청년에 불과했지만, 건장한 체력과 성실성만은 그 누구 못지않았기에 힘든 인력거생활도 그에게는 고진감래를 위한 디딤돌로 느껴졌다. 언제나 자신만의 인력거를 장만하는 데에만 뜻을 두고 말 그대로 앞만 보며 인력거를 끈 祥子에게 닥친 첫 번째 고난은 바로 전쟁이었다. 패잔병에게 끌려가면서 자신이 새로 겨우 장만한 인력거를 잃고, 인력거와 더불어 자신이 생각해놓았던 행복한 미래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이를 기점으로 祥子는 처음 인력거꾼이 되었을 때 품은 희망과 꿈, 자신이 바래왔던 미래는 점점 그의 손에서 멀어져 갔고 祥子의 인생은 바닥을 향해 치닫으며, 자신을 사랑했고 독립적이었던 건장하고 위대했던 祥子는 결국 보통의 인력거꾼들과 같이 변해버린다.
소설을 읽는 동안 우리는 어느새 祥子에게 감정이 이입되어, 그의 인생에 나타나는 액운에는 이마가 저절로 찌뿌려지고 또 祥子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조마조마하면서 그가 위가나 고난을 극복하면 나도 한시름 놓고 뿌듯한 엄마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소설을 끝까지 읽고 책을 덮었을 때에 내가 느낀 점은 祥子에게 보였던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이 자주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祥子는 인생은 망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祥子의 인생은 결국엔 하향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그 과정에 약간의 기복이 있다 할지라도 결국에는 점점 밑을 향해 내려가는 결말을 피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작품을 읽을 때에는 등장인물이나 주인공에 대해 아까도 말했다 시피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면서, 자신과 비교하고 또 그들에게 자신을 투영해보기도 한다. 祥子를 봤을 때 그는 일단 말수가 적고, 말수가 적은만큼 생각이 많은데 이 점이 나와 정말 닮았다. 또 그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삶의 의욕을 잃을 만큼 미래지향적이고, 자신의 꿈과 의지를 소중히 하는 긍정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그의 인력거에 대한 애정과 자신이 맡은 인력거 일에 대한 자부심은 엄청나다. 그에게는 ‘인력거를 끌어 밥벌이를 하는 것이야말로 천하에서 가장 기개 있는 일’(23P)이었으며, ‘烙饼을 포함해서 모든 먹을 것을 만들어내니, 만능 전답이자 온순하게 그를 따르는 생명력 있는 토지, 보배로운 땅’(24p)이었다. 또한 그는 생각하는 것은 느렸지만 나름대로 주도면밀했으며, 일단 생각이 나면 그 즉시 실행에 옮긴다는 점, 또 약간은 지나친 걱정으로 인해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되는 것마저 나와 비슷한 성격이다. 나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이토록 祥子가 점점 망가지고 망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더욱더 祥子가 가엽게 느껴지고, 이렇게까지 만든 모든 부정적인 상황들에 대한 울분이 치밀었다.
祥子는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인력거를 잃고, 이후 힘들게 모은 재산을 또 형사에게 강탈당하다시피 하고, 虎妞의 계략에 걸려 억지결혼생활까지 하며, 그런 그녀마저도 뱃속에 있는 아이와 함께 하늘나라로 보내고, 마지막에는 小福子의 죽음까지 겪게 되면서 祥子는 이미 더 이상 예전의 祥子가 아니게 된다. 하지만 운명이라는 것이 만약 있다면, 작품 속에서 이 운명이란 것은 祥子에게 고난만을 주지는 않는다. 패잔병에게 끌려간 祥子가 낙타를 데리고 성안으로의 탈출에 성공하기도 하고, 예전에 일했었던 인자한 차오 선생을 만나 다시 비교적 안락한 생활을 잠시나마 하게 되고, 수중에 돈이 몇 번 들어오기도 하는 등 중간 중간에 희망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희망들도 결국은 오아시스가 아닌 신기루에 지나지 않는다. 祥子의 삐뚤어진 인생이 다시 정도(正道)를 찾는가 싶다가도, 이제야 잘 굴러가나 싶다가도, 결국 이러한 희망들은 비누방울처럼 사라져버린다. 그토록 달콤하게 유혹하던 희망들이 차라리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오히려 祥子는 좀 덜 고생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우리가 탓해야 할 것은 이런 시덥지 않은 희망에 눈먼 祥子가 아니라, 이런 작디작은 희망도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리는 그 현실사회가 아닐까. 이 작품 속에서 祥子가 내리막길의 인생 곡선을 그리고 있는 것은 그 사회에서라면 우연이 아닌 필연, 운명이 아닌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의 의지에 상관없이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사회현실에서는 祥子가 아닌, 또한 인력거꾼이 아닌 당대 하층민 누구라도 그 사회상에 굴복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한 개인이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남는 것이 지푸라기라도 없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祥子의 꿈은 정말 소박했다. 그저 열심히 닥치는 대로 일해서 자신만의 인력거를 한 대 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소박한 꿈마저 그곳에서는 높은 벽이었으며, 현실은 그보다 더 높은 벽이었다.
이러한 사회 구조자체의 문제로 인해 개인이 희생당하는 것은 작가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다. 반제국•반봉건을 외치다 老舍처럼 피투성이 속에서 사라져버린 사람은 아마 수억 명이 될 것이다. 달리 말해 사회구조는 개인을 부당하게 억압하고 죽음에 이르게까지도 한다.
祥子는 ‘骆驼祥子’라는 별명을 비록 의도치 않게 얻게 되었지만 나름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낙타는 산을 타지도 못하고, 한번 쓰러지거나 다리가 부러지면 걷지도 못한다. 인간을 위해 짐을 싣고 나르지만 한번 쓰러지면 일어설 수 없다는 것이, 사회 구조라는 큰 틀속에서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祥子와 비슷하기도 하다. 祥子가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술과 담배와 여자에 찌들려 사는 보통의 인력거꾼들과 다름없게 되어벼렸지만, 그를 둘러싸고 있는 부조리한 사회 현실의 책임이 더 커보여서 祥子만을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