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의 나라
김나영 지음 / 네오픽션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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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손에 잡고선 놓을 수 없는 소설을 읽고 싶다는 것은 소설애호가들의 오랜 소망이다. 그런 소설은 웬만해서는 만나기 어렵다. 오히려 사람들을 온전히 몰입하게 하는 것은 만화나 영화 쪽이다. 내가 읽은 소설 [야수의 나라]의 작가는 아마 그런 소망을 충족시켜주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뭐... 작가의 의도를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소설을 읽고 싶어 하는 건 독자의 권리다. 그런데 [야수의 나라]의 소재가 하필 도박이다. 도박에 관해서라면 우리에게는 허영만 화백의 저 유명한 [타짜]가 있고, 그것을 영화화한 최동훈 감독의 일급 오락영화 <타짜>가 있다.

 

그렇다면 [야수의 나라]는 과연 어떨까? 한편에는 도박 천재 재휘가 있고 그를 돌봐주는 아버지 같은 존재 용팔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막 떠나보낸 선영이 있다. 재휘의 아버지와 선영의 아버지는 모두 강 회장이란 악한의 술수에 말려들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러니까 강 회장은 재휘와 선영이 겨냥하는 공동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재휘는 일찌감치 복수하려는 마음을 다스렸고, 단지 선영과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한다. 재휘는 그러니까 복수를 포기함으로써 제 인생을 존중할 줄 아는 인물인 셈이다. 그러나 선영은 그럴 수 없다. 선영에게는 안락한 삶보다 복수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복수하려던 선영의 계획은 강 회장의 간계로 좌절된다. 선영을 구출하려던 재휘는 강 회장에게 잡혀 한 쪽 눈을 실명하게 된다. 선영에게 남은 길은 붙들린 재휘를 구출하고 강 회장에게 복수하는 것뿐이다.

 

소설의 대체적 줄거리가 위와 같다. 어찌 보면 전형적 복수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악인의 음모로 인해 격리 된 인물이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 연인과 적 앞에 나타난다는 설정은 아마도 [몬테크리스토 백작]에서부터 시작돼 여러 작품들에서 변주된 것일 텐데, [야수의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복수를 성공시키기 위한 후원자의 존재(추 마담)도 그렇고, 그 후원자가 주인공을 훈련시킨다는 설정도 그렇다.

 

익숙한 설정들을 마주하면서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흥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소설에 카지노에 관한 구체적 정보들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이제껏 한 번도 카지노를 경험해보지 않은 나는 무슨 용어인 줄 모르면서도 부지런히 페이지를 넘겼다. 내가 잘 모르는 세계를 훔쳐보는 재미에 들린 것이다. 작가도 이 소설을 쓰기 전까지 카지노에 대해 잘 몰랐고 하는데, 그렇다면 이것은 꼼꼼하고 성실한 취재가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매력 가득한 캐릭터, 특히 재휘 덕분일 것이다. 주인공 재휘는 도박 천재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천재성을 어디까지 발휘해야 하고 멈춰야 할지를 아는 인물이다. 그에게 천재성을 물려준 자기 아버지 정연이 해 준 말. “도박의 신에게 미움받지 않으려면 욕심을 버려야 돼. 더 많이 갖겠다는 것도, 잃은 것을 찾겠다는 것도 모두 욕심이야. 때때로 신은 우리 마음을 시험하기도 하지만 그걸 이겨낸 사람에게는 반드시 값진 선물을 주고 떠난단다.” 이 말을 재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통통 튀는 매력을 지닌 선영. 그런 선영을 재휘는 끝까지 사랑한다. 그리고 복수하지 않고 제 삶을 살 때에야 진정한 복수가 달성된다는 역설을 선영이 깨닫도록 돕는다. 그 과정을 보고 있으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김나영 작가에게는 익숙한 스토리텔링 안에서 온기 가득한 캐릭터를 생생하게 조형해 낼 줄 아는 재주가 엿보인다.

 

복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짜릿하고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보는 이의 시선을 내내 잡아두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서 [야수의 나라]를 읽기 전, 도박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만화 [타짜]와 영화 <타짜>를 뛰어넘는, 아니면 그에 버금가는 오락적 쾌감을 과연 선사해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어쩔 수 없이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을 다 읽은 지금, 이 소설이 저 두 작품을 뛰어넘는다고 단언할 순 없지만, 이 소설을 한 번 잡고는 내려놓지 못한 채 읽었다는 사실만은 말할 수 있다. 덕분에 쉬이 잠들지 못했고 그래서 피곤이 밀려왔지만 아주 기분 좋은 피곤이었다. 김나영 작가의 다음 소설을 통해 이런 기분 좋은 피곤을 또 다시 맛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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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초 사고
아카바 유지 지음, 이영미 옮김 / 열린책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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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빠르게 결정하지 못할까, 하고 자책할 때가 많다. 이런 신중함 덕분에 무던하게 살아온 것 같긴 하지만, 빠르게 결정하지 못해 좋은 기회를 놓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0초 사고”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에 끌렸던 것은 그래서일 테다. 이 책을 읽으면 “0초”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오래 고민하는 버릇은 고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내 인생도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저자가 말하는 0초란 “순식간에 현상을 확인하고, 순식간에 과제를 정리하고, 순식간에 해결책을 생각하고, 순식간에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의사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뜻”이다. 시간이 좀 더 걸릴 수도 있지만, 종전에 견줘 놀랄 만한 속도로 판단할 때 0초 사고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아무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0초 사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0초 사고를 하지 못하는 것은 정보를 필요 이상으로 수집하려 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대담하게 가설을 세우는 버릇을 들”일 것을 권한다.

 

0초 사고를 실천하기 위한 저자의 제안은 놀랄 정도로 간단하다. A4 용지를 가로로 놓고, 1건을 1페이지에 쓰면 된다. 왼쪽 위에 제목을 쓰고, 1페이지에는 4~6행만, 각 행 20~30자 분량으로 1페이지를 1분 이내에 매일 10페이지씩 쓰는데, 매일 10분만 메모를 쓰는 셈이다. 메모를 쓸 때 행의 구조나 순서나 구조에 연연하지 말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러면서 “멋있게 할 필요 없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그냥 쏟아 내기만 하면 돼”라는 메시지를 매일 10회 이상 자신에게 들려주라는 팁도 알려준다. 단, ‘A4 용지에 가로쓰기’라는 형식은 저자가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궁리해낸 것이니 반드시 지켜달라고 저자는 말한다.

 

 

 

 

메모에는 업무 관련 내용만이 아니라 내 삶의 여러 문제들을 담을 수 있다. 화가 나거나 누군가에 의해 감정이 상했을 때, 그것을 모두 메모에 쏟아 내면 된다. 나를 화나게 한 당사자의 실명까지도 그대로 적으라고 저자는 말한다. 메모하기를 통해 우리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감정에 치우쳐 큰일을 그르치는 사태도 방지할 수 있다. 불합리하고 억울한 상황을 만났을 때, 20분 정도 메모에 쏟아 내면 개운해진다고 한다. 이러한 메모 쓰기는 기획서를 작성할 때도 활용될 수 있다.

 

 

 

오랫동안 메모 쓰기를 해왔다는 저자는 독자들이 시행착오를 겪지 않도록 세심하게 배려한다. 저자는 여러 번 시도해 본 결과 하루에 10페이지가 가장 이상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하루에 10가지 주제면 그날의 고민과 과제를 모두 정리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날의 고민을 끝낼 수 있고, 다음 날부터는 같은 고민거리를 지니고 있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저자는 이면지를 활용하라거나, 샤프는 절대 추천하지 않으며 직액식 수성 볼펜이 적합하다는 등의 알뜰한 노하우를 아낌없이 전수해준다. 또한 메모 쓰기를 처음 시작하는 이들을 위해 메모의 제목 예를 무려 400개나 들어주고 있으니, 이보다 더 자상한 안내는 없을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도 내 나름대로 실습을 해보았다. 이를 테면 약을 복용하고 있어서 내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먹지 말아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 같은 문제로 말이다.(사소하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절실한 문제다.)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한 번 해봤는데, 맙소사! 효과가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날까지만 해도 참지 못하고 초콜릿을 몇 알 먹고 말았는데, 메모 쓰기를 실천하면서 초콜릿을 왜 먹지 말아야 하는지, 먹었을 때 어떻게 얼마나 좋지 않은지 등이 빠른 시간에 정리되면서 내 두뇌가 설득되고 있는 것을 느꼈다. 관건은 메모 쓰기를 지속해 나가는 것일 테다. 나는 메모 쓰기가 어떻게 내 두뇌와 내 삶을 변화시켜나갈지 기대하면서 메모 쓰기의 세계에 첫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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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1위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업무 방식 - 구글 애플 페이스북 어떻게 자유로운 업무 스타일로 운영하는가
아마노 마사하루 지음, 홍성민 옮김 / 이지북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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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사와 술을 마시러 가는 일은 거의 없다. 업무의 연장이라 하는 퇴근 후의 ‘접대’는 아예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만큼 개인 생활을 즐길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주말에 욕심을 부려서 쉬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내키지 않아도 직장 사람들과 밤까지 어울리고, 상사가 퇴근하기 전까지는 자리를 뜨지 못하는 스트레스도 실리콘밸리에는 없다.” 저자 아마노 마사하루가 말하는 실리콘밸리의 모습이다. 아득하고 꿈같은 이야기다. 한국에서 거론되는 ‘신의 직장’도 이 정도의 업무 환경을 제공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도대체 이런 업무 방식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이 책의 저자 아마노 마사하루는 대학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기업인이다. 저자는 실리콘밸리에서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실리콘밸리의 업무 방식을 알려주고, 실리콘밸리에 진출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일본인을 겨냥한 책이기는 하지만, 저자의 조언은 한국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선 저자는 그 원동력이 대학에서부터 나온다고 말한다. 스탠퍼드와 UC버클리를 비롯한 실리콘밸리 10여개 대학은 ‘벤처를 키운다’는 생각을 교육 이념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우수한 학생일수록 창업을 하고, 창업하지 못한 인간이 대기업에 가는 구도라는 것이다. 창업한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진 않지만, 실패해도 다음을 생각하면 된다는 게 실리콘밸리의 가르침이다. 실패가 크게 부담되지 않는 것은 평소 벤처를 후원하는 ‘멘토’의 존재 덕분이다. 실패한 기술일지라도 멘토가 중계하면 다른 벤처로 쉽게 매각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실리콘밸리에는 실패가 오히려 ‘좋은 경험’으로 인식되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으면, 이것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실리콘밸리가 정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해진 답이 없으니까 설령 실패로 끝났다 해도 도전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새로운 정답’에 다가간 사람을 보다 신뢰”하는 것이다.

 

저자는 실리콘밸리의 시스템에 대해 ‘조건 없는 개인의 열의 또는 선의’라고 설명한다. 한 벤처사업가가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가능성과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열의를 가진 ‘개인의 능력’”이 있다고 인정받기만 하면, 여러 기업가들이 벤처 선배로서 열의와 선의를 지니고 도와주려 한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는 일본이나 한국처럼 종적사회가 아니라 횡적사회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데서 비롯한다. 여기서 존중은 ‘서로 같은 단계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저자는 책 후반부에서 실리콘밸리에 입성할 수 있는 여러 경로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변화하라고 말한다. 익숙함은 편안함을 줄 수 있지만, 행복까지 담보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우발적인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서 그것을 계기로 미지의 세계로 나”갈 것을 강조한다. 실제로 저자가 취재한 실리콘밸리의 일본인들은 모두 자신이 주도적으로 생각하고 익숙함에 저항한 사람들이었다.

 

사실 저자가 서로에게 열린 마음이나 존중 같은 개념은 우리도 익히 아는 것들이다. 익숙함에서 벗어나라는 조언도 낯설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알고만’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런 개념이 좋고 바르다고는 알고는 있지만, 단지 이상에 머무를 뿐이라고만 치부한다. 그런데 실리콘밸리에서는 그런 개념을 실제로 실천함으로써 단지 이상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는 안 돼”라는 사고방식을 버리고 실리콘밸리가 보여준 것들에 실천하고 익숙해지는 것이다. 덩치가 큰 조직에는 실리콘밸리의 업무 방식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큰 조직도 들여다보면 실리콘밸리의 업무 방식을 적용할 만한 틈이 분명 존재하기 마련일 테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나 자신부터가 부끄러워진다. 그저 이 책을 살펴보며 나 자신에게 먼저 적용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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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수업 - 천재들의 빛나는 사유와 감각을 만나는 인문학자의 강의실
오종우 지음 / 어크로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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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무엇을 하는가?”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나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이 종종 받게 되는 질문이다. 아니, “예술은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고 해야 좀 더 정확할 듯하다.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할 때의 어조는 정중하거나 상냥하지 않다. 대개는 ‘따지듯이’ ‘도발하듯이’ ‘신경질적으로’ 질문한다. 마치 자신이 예술이란 것과 원수를 지고 있다는 듯이. 어쩌면 이것은 우리 삶에서 예술이 너무 멀리 있고, 선택받은 소수만이 온전히 즐길 수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예술 수업]의 저자 오종우 교수는 예술은 실용적이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가. 예술을 무엇에 써먹을 수 있단 말인가. 저자는 우선 ‘실용’이란 말의 의미를 되짚어 준다. 실용은 실제로 쓸모가 있음을 의미하는데, 따라서 쓸모가 없어지면 소멸하기 마련이다. 예술이 인류 역사에서 한 번도 소멸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예술이 실용적임을 증명하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를 인용하며 “주어진 규율과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게 실용적인 태도”라는 생각을 교정해 준다.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매뉴얼과는 달리 갑작스럽게 변한다. 이처럼 갑작스럽게 변하는 현실을 창의적으로 해석해 대처하는 것이야말로 실질적인 삶의 태도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이런 창의적 해석을 하게끔 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너무도 적절해서 뼈아프게 느껴지는 지적이다. 흔히 실용적이라고 생각되는 학문들로만 훈련받은 사람들이 막상 대형사고가 터졌을 때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작년에도 끊임없이 목도했고, 지금도 보고 있지 않은가. 

 

예술이 우리 삶에서 필요하다는 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너무 어렵게 느껴지는 예술작품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 저자는 음악과 미술, 문학, 영화 등을 통해 직접 보여준다.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응시하면서, 소설을 읽으면서. 음악감상을 위한 QR코드도 있고, 생생한 도판도 있고, 단편소설도 수록돼 있으니 이보다 간편할 수는 없다. 아마도 살면서 수백 번은 들었을 에리크 사티의 <짐노페디>를 오종우 교수의 문장을 읽으며 다시 들으니 무척이나 새롭게 느껴진다. 이 곡에서 저음과 고음, 꿈과 현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칸딘스키의 그림과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Ⅱ>를 함께 감상하면서는 대상을 계량화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도 느낀다. 이처럼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예술을 어떻게 독학해야 할지를 배운다. 이를 테면 ‘드라마’의 성질은 위해서는 그 형용사 ‘드라마틱’에서 알 수 있다며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명사로 굳어진 용어나 개념의 본질을 알기 위한 출발점은 그 것이 아직 굳어지기 전의 상태, 즉 형용사의 형태로 나타내는 의미를 밝혀보는 일입니다.” 이런 말은 더 이상 어떤 교육기관에 적을 둘 일이 없을 나 같은 사람에게는 정말 고마운 조언이다.

 

이 책에서 가장 반가웠던 대목은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에 관한 수업이었다. 이 소설은 내가 가장 여러 번 읽은 단편 소설이다. 뭐, 이 소설이 마냥 좋아서 되풀이해서 읽었던 건 아니다. 단지 체호프의 작품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기에 펼쳤던 소설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고, 무엇이 이 소설을 위대하게 만들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일종의 오기가 발동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끝내 나는 이 소설에 깃든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남녀의 불륜을 다룬 이 소설이 왜 뛰어난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번에 [예술 수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저자의 설명을 듣고 보니 내가 왜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의 진가를 깨닫지 못했는지 알 것 같다. 나는 이야기의 큰 줄기에만 주목했을 뿐 체호프가 이야기 사이에 숨겨둔 아름다운 가지와 꽃들을 살펴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령 사소해 보이는 주인공 구로프가 딸이 나누는 대화 에피소드를 놓쳤던 것이다. 체호프가 무심한 듯 던져놓은 이런 소소한 대목이 어떻게 사실(fact)와 진실(truth)의 관계를 보여주는지 저자는 내게 일러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번 한숨을 쉬었다. 이제껏 내 삶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 음악이나 미술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살아온 게 억울해서였다. 그렇지만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저자는 책을 닫으면서 예술작품을 통해 얻어진 지적 능력이 우리 삶에서 왜 필요한지, 그러니까 "예술이 스며드는 삶" 왜 있어야 하는지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 속에서 노예인지도 모르고 노예처럼 사는 사람과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 풍기는 향기는 다릅니다. 삶의 질도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회의 질도 달라질 것입니다.”

 

요 며칠 사이 정치권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최소한의 상식마저도 무시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치욕으로 여겨졌는지 모른다. 이런 사회에 그래도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예술을 현실 속으로 자꾸만 스며들게 하려는 이들이 있기 때문일 테다. 이 책은 "예술이 스며드는 삶"을 살고 싶으나 방법을 몰라 서성거리는 이들을 위한 명쾌하고 친절한 안내서다. 이 명쾌하고 친절한 수업을 계속해서 경청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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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역사용어해설사전
이은식 지음 / 타오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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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니 수능 이후 한국사 공부를 따로 해본 기억이 없다. 아, 몇 년 전 한국사능력시험을 위해 잠깐 벼락치기를 하기는 했다. 그게 내 한국사 공부의 마지막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한국사를 싫어한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입소문이 좋은 사극들은 챙겨 보는 편이고, 역사소설도 좋아한다. 그렇지만 사극이나 역사소설을 많이 접한다고 해서 한국사 지식이 저절로 증가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내 자신이 그 증거다. 예컨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이라 불리는 3사 가운데 하나가 사극이나 역사소설에 등장할 때, 내 머릿속은 3사의 각 기관이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 가늠하느라 분주해진다. 이럴 때 바로 펼쳐 찾아볼 수 있는 도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타까워하던 차에 [필수역사용어해설사전]을 만나 기쁜 마음으로 펼쳐 들었다.

 

사전이라는 제목이 달린 책답게 엄청나게 많은 역사 용어들이 17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실려 있다. 다른 사전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궁금했던 항목들을 먼저 찾아본다. 몇 달 전 종영한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를 부르는 말인 ‘만호’라는 말에 대한 설명도 나와 있다. “고려시대 순호만호부에 소속된 무관직”이라는 뜻이란다. 조선시대를 다룬 많은 사극들에서 왕과 가장 가까운 내시를 이르는 말로 종종 등장하는 ‘상선’이라는 관직은 무려 종2품이나 된다고 한다. 사극에서 상선 관직의 내시가 여러 대신들을 거침없게 대했던 장면들이 이해가 된다. 그동안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던 ‘대감’이란 말도 본뜻은 “조선시대 정2품 이상의 관계(官階)를 가진 현직과와 산직자(散職者)를 공경하여 부르던 칭호”라고 한다. 그러니까 양반이라고 해서 아무나 ‘대감’이라고 불렸던 건 아닌 셈이다.

 

 

내가 이 책을 가장 쓸모 있게 활용하는 경우는 아마도 역사소설을 읽을 때가 될 것 같다. 특히 요즘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를 다시 읽고 있는데, 이 소설에는 낯선 용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판본에는 용어풀이도 나와 있지 않다. 물론 [칼의 노래]는 서사와 문체의 힘만으로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긴 하지만, 용어의 뜻을 알고서 읽을 때 소설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것 같다. 이를 테면 ‘도원수 권율’이라고 할 때, ‘도원수’가 고려와 조선의 전시에 군대를 통솔하던 임시 무관직으로 대개 문관의 초고관이 임명된다는 사실을 안다면, 문관 출신인 권율이 도원수를 맡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의 부록은 무려 300페이지에 이르는데, 지명 변천 일람표, 성씨일람, 고려와 조선의 관직 및 품계 등 유용한 정보들이 잘 정리돼 있다. 그뿐 아니라 평소 그냥 넘기기 쉬운 시호 일람표나 왕릉약표 같은 것들도 들어있다. 부록을 넘기다가 관향 별 현 행정구역 및 성씨일람에서는 내 본관 진주를 찾아본다. 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는 무려 열다섯 개나 된다. 지명 변천 일람표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명들이 대부분 고려시대에 확정되었음을 알게 된다. 자(字) 일람표와 호(號) 일람표를 쭉 읽어나가면서 동일한 자와 호를 여러 인물이 공유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삼봉 정도전’이라고 부를 때 ‘삼봉’은 자일까, 호일까. 역시 이 책을 참고하면 알 수 있는데, “본이름이나 자(字) 외에 허물없이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이라는 설명에 따른다면, ‘삼봉’은 호일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퇴계 이황’의 그 ‘퇴계’는 호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재밌게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영사전으로 영어 공부하는 식으로 읽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한 용어에 관한 설명에서 모르는 용어가 나오면 찾는 방식으로 읽어나가는 방법 말이다. 영영사전 공부법이 내 영어 실력 향상에 비약적으로 도움을 주었듯이 이 책 또한 내 역사 지식 습득에 크나큰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이 책 덕분에 사극을 볼 때마다 읽기 버거웠던 해설자막을 따라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아 다행이다. 나는 지금 사극 좋아하시는 아버지 곁에 앉아 사극 용어들을 알기 쉽게 설명해드릴 날을 떠올려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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