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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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무슨 이런 제목이 있나 싶었다. 머리말을 읽어 나가며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말을 듣고,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이 기묘한 상황.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단 한 마디 말로 표현하는 제목이었던 것이다. 인지언어학의 대가인 저자 조지 레이코프 교수에 따르면 “뇌 안에서 프레임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활성화된 프레임이 우리 뇌 속에서 굳어지면, 우리는 그 프레임대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선하고 합리적인 것은 왜 항상 승리하지 못하는가? 이 역시 ‘프레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사람들이 프레임을 통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명확한 과학적 사실을 아무리 들이대도 보주주의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 머릿속 프레임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정당에 표를 던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는 게 아니라 정체성과 가치에 따라 투표한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이 점을 너무도 일찍 간파해냈다. “그들(보수주의자들)은 항상 앞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보수주의자들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당장 방어할 생각밖에 하지 못합니다.”

 

저자는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엄격한 아버지의 가정과 자상한 부모의 가정 모형’으로 설명한다. 보수주의적 가치가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이며, 이기적이고, 규율과 체벌에 근거한 가정의 가치라면, 진보주의적 가치는 권위 있고, 평등하며, 쌍방향적이고, 돌봄과 책임과 헌신에 근거한 가정의 가치다. 조지 레이코프 교수는 자신이 진보주의자임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저자는 진보주의의 가치야 말로 이제껏 미국을 지탱해온 가치라고 말한다. 이른바 “최상의 전통적인 미국적 가치”다.

 

진보주의의 가치는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의존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교육, 전력망, 과학 연구, 공중 보건, 공공 안전 등.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을 가능하게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공적 자원을 최소화하고, 심지어 제거하려든다. 그들이 중시하는 건 개인적 책임뿐이다. 이런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진보주의자들은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올바로 말하고 반복해서 말하자.” 간단해 보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제안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주장을 “진지하고 의식적인 헌신”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우리 뇌는 웬만한 주장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진보적 주장을 몇 번 듣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이 그것에 감정이입할 수 없고, 그들의 뇌 회로가 활성화되지 않으며 시냅스가 강화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른편으로 이동하지 마십시오. 오른편으로 이동하면 두 가지 측면에서 해롭습니다. 이는 우선 진보적 지지층을 소외시키고, 이중개념을 소유한 유권자들 내부의 보수주의 모형을 활성화함으로써 도리어 보수에게 보탬이 됩니다.”는 저자의 경고는 한국의 상황에 잘 들어맞는다. 실제로 최근 몇 년 간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은 프레임을 주도적으로 구성하기보다는 보수가 짜 놓은 프레임에 말려들고 말았다. 결국 한국에선 여당과 야당이 견지하는 정치적 스탠스에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 구별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한국 정치 지형의 이런 불균형은 우려스럽다.

 

정말이지 판을 새롭게 짤 만한 프레임이 나와야 할 때다.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은 그렇게 해서 구성된 프레임을 벼리고 또 벼려야 한다. 사람들의 뇌를 날카롭게 찌를 수 있을 정도로 프레임을 부릴 수 있어야 한다. 지금보다 훨씬 꾀 많고 영악해져야 한다. 요컨대 좀더 유능해져야 한다. 그 일은 이 책을 읽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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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디 때문에 아시아 문학선 12
류전윈 지음, 김태성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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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애써 계획하고 준비했던 것들이 어그러져 어찌 할 수 없는 때가 있다. 마음속은 타들어 가는데 길이 보이지 않아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때.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며 일일이 짚어주는 자기계발서들 차고 넘친다. 나도 조금은 읽어 봤다. 그런 책을 읽어봐도 일렁이는 마음은 잠잠해지지가 않더라. 어떻게 해야 할까.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는 그렇게 힘겨워하는 이들의 책상 위에 살며시 놓아두고 싶은 책이다.

 

한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소설은 아니다. ‘새옹지마’라는 상투적인 말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양바이순이 양모세로, 다시 우모세를 거쳐 결국에는 뤄창리가 된 이야기라고 해 두자. 두부 파는 라오양의 둘째 아들 양바이순. 그는 어떻게 뤄창리가 되었나.

 

함상(喊喪)을 하는 뤄창리를 흠모했기 때문이다. 함상은 큰 소리로 장례식 사회를 보는 걸 말한단다. 장례식 곡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어디어디에서 오신 손님들이 절을 올립니다”라고 목청 높여 외치는 것이다. 양바이순은 뤄창리의 함상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그 일을 하며 살고 싶었다. 뭐 대단할 것도 없는 소망이다. 그런데 이 평범한 소망이 양바이순에게는 너무 멀리 있다.

 

원하던 함상을 하며 살 수 없었던 양바이순은 가업인 두부 파는 일만이 아니라 온갖 궂은 잡일을 거치게 된다. 양바이순이 도제로서 모신 사부들만 해도 두부 파는 아버지 라오양, 돼지 잡는 라오쩡, 염색공방의 라오쟝, 신부 라오잔, 죽업사 라오루 (여기서 ‘라오’는 성(姓)이 아니라 성 앞에 붙는 존칭어인 듯하다) 등 여럿이다. 이런 잡일을 거치는 여정에서 신부 라오잔에게 의탁할 때는 이름을 ‘모세’로 바꾸기도 한다. 이름까지 바꾸었건만 양바이순, 아니 양모세는 결국 신부를 거드는 일도 완수하지 못하고 신부와 헤어져 물을 지어 나르는 일을 하기에 이른다.

 

우리의 주인공, 인생이 꼬여도 너무 꼬인다. 그런데 이런 양모세에게도 좋은 일이 생긴다. 현장(縣長) 라오스의 눈에 들어 현 정부에서 채소 가꾸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애 딸린 과부지만, “솥에서 방금 꺼낸 만터우처럼” 흰 피부의 우샹샹을 아내로 맡게 된다.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바람에 성을 ‘양’이 아닌 ‘우’로, 그러니까 ‘우모세’로 불려야 하지만 뭐 이름을 바꾸거나 성을 바꾸는 일이 우리의 주인공 양바이순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사람은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는 법”이라는 말로 작가는 양모세의 행운을 요약한다.

 

이제야 그는 마음 붙이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아무려나,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또 불행이 닥친다. 현장 라오스가 해임되어 우모세가 현 정부에서 나와야 했던 것이다. 이제 우모세는 우샹샹에게 구박 맞고, 심지어 뺨까지 맞아가며 살아가는 신세가 된다. 거기다 우샹샹과 그 정부에게 속아 오쟁이 진 남편이란 불명예까지 감당해야 한다. 우모세는 귀애했던 우샹샹의 딸을 잃어버리는 희생을 감수하며 떠난 여정 끝에 두 연놈들을 찾아내지만, 그는 돌아선다. 그 연놈을 죽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 두 연놈이 우모세를 속이긴 했지만 그 자신들은 속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간통하기 전 여자 마음을 움직인 남자의 말 한 마디를 우모세는 알 수 없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우모세, 그러니까 이 양바이순이란 사내의 삶이 참 모질지 싶다. 양바이순이 하늘을 향해 긴 탄식을 내뱉으며 했던 말. “이번에는 어떤 수를 두실 생각입니까”라고 신에게 따지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그런데 작가는 “저는 뤄창리라고 합니다”라는 양바이순의 말로 소설을 끝낸다. 양바이순은 아직도 함상을 하는 뤄창리를 잊지 못한 것일까. 양바이순이 뤄창리로 어떻게 살아갈지 작가가 말해주지 않으니 나는 알 수 없다. 예상과 다른 결말과 마주해 조금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이 소설에 진짜 인생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그래서 나는 힘든 시간을 지날 때마다 이 이야기를 마음속에서 꺼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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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해석 - 위대한 작가들이 발견한 삶의 역설과 희망 삶을 위한 노래
이창복 지음 / 김영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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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해석]에 관해 처음 알게 됐을 때 이 책이 반가웠던 건 독일 소설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독일문학을 부러 멀리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내게 독일문학은 낯설다. 작품을 두 권 이상 읽어본 독일작가는 괴테, 헤세, 카프카 정도인 것 같다. 여기에 베른하르트 슐링크나 제바스티안 피체크, 파트리크 쥐스킨트 같은 작가를 보탤 수도 있을 테지만, 민망한 수준이다. [고통의 해석]에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작가가 다섯 명이나 소개돼 있고, 여기에 평생을 독일문학에 헌신해 온 저자 이창복 교수의 해설까지 실려 있으니 내가 이 책을 반길 수밖에.

 

이 책의 형식에 관해서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단편들 가운데도 짧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몇몇은 손바닥 장(掌) 자를 쓰는 장편(掌篇)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각 단편에 딸린 해설은 그보다 몇 배쯤 길다. 자칫 독자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는 형식이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형식이 좀 부담스럽게 느꼈지만, 나중에는 긴 해설에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긴 해설 덕분에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좋은 답변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페터 헤벨의 <예기치 않은 재회>를 해설하면서 시간의 부사와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반복된 것에 주목하라거나, 보르헤르트의 <밤에는 쥐들도 잠을 잔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어떻게 긴장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작가가 사용한 지시대명사 하나의 의미까지도 놓치지 않고 설명해 준다. 하인리히 뷜이 <다리 옆에서>의 첫 문장에 ‘그들’이라는 지시대명사를 넣었던 것이 전체 소설의 주제와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나는 저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문학 교양서 이상의 무언가가 더 있다. 이는 책 뒤표지 ‘어떻게 고통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카피 문구에서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치유 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구였다면, 이 책은 독일문학 교양서 이상의 감흥을 내게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삶에서 고통은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해설은 단순히 문학적 의미를 되짚어주거나 가치를 따지는 것을 넘어서 삶의 고통을 어떻게 껴안고 넘어설 것인지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이를 테면 저자는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해설하며 이렇게 말한다. “망설임은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이기 때문에 망설일 수 없으며, 그래서 망설임은 망설일 때 죄악이며 고통이 된다. 스스로 가야 할 길은 나만이 갈 수 있다. 아무도 대신 가줄 수 없다.”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문학 자습서에 나오는 해설이 아니다. 나는 저자의 해설을 통해 내 삶을 점검하고 내 발이 진정으로 내딛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늠해 본다.

 

이 책에서 내 머리와 마음을 가장 세게 두드린 소설은 하이너 뮐러의 <철십자 훈장>이다. 어느 정도냐면, 이 단편과 그에 딸린 해설만으로도 [고통의 해석]을 읽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히틀러의 자살 소식을 듣고 그 같은 방법으로 아내와 딸을 죽인 뒤 자살하려는 한 히틀러 추종자의 이야기다. 뵐은 이 소설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나치’라는 괴물이 어떻게 인간을 잡아먹는지 장인의 솜씨로 압축해 보여준다. 그 솜씨가 너무도 정교해서 나는 쉽사리 소설 속 인물을 비난할 수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괴물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괴물을 응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랜 세월의 노예생활과 짧은 자유의 세월을 만끽했으며 인생이라는 빵을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알뜰하게 다 드셨던 것이다.” 브레히트는 <품위 없는 할머니>라는 단편을 이렇게 끝맺는다. 내가 이 책에서 만난 가장 멋진 문장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평생을 살며 자신이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빵을 부풀려놓고는 한 조각은커녕 부스러기도 먹지 못한 채 죽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남이 보기에 보잘 것 없는 빵이지만 그런 빵을 맛나게 먹고 남에게 나눠주는 이도 있다. 어떻게 먹든 개인의 자유이지만, 이왕 먹는 것 맛있게 먹는 편이 좋지 않을까? [고통의 해석]은 ‘인생이라는 빵’을 어떻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 일러주는 책이다. 그리고 그 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먹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고통의 해석]을 읽고 내가 풍족한 포만감을 느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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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
제바스티안 피체크.미하엘 초코스 지음, 한효정 옮김 / 단숨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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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주인공이 자신의 딸이 납치된 사실을 알게 된다. 납치범은 자신에 대해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주인공은 납치범에 대해 아는 게 없다.” 여기까지는 사실 새로울 것 없는 설정이다. 아마 스릴러물에서 수만 번은 족히 쓰였음직한 설정. 하지만 만일 남자의 직업이 법의학자라면 이야기는 조금 새로워진다. 그리고 납치범이 제공하는 단서가 시체를 매개로 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진진해진다.

 

헤르츠펠트. 바로 그 불행한 사내의 이름이다. 유능한 법의학자이며 정의감도 웬만큼 갖춘 시민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부검 도중 전화번호와 딸 한나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발견한다. 헤르츠펠트는 납치범이 제공하는 단서에 의지해 딸을 찾아낼 수밖에 없다. 그 단서란 태풍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헬고란트 섬에 있는 시체를 부검해야 얻을 수 있다. 그 시체를 발견한 만화가 린다에게 헤르츠펠트는 부검을 부탁한다.

 

잊고 있던 4년 전의 사건이 헤르츠펠트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4년 전 동료 법의학자 마르티넥의 딸 릴리가 납치돼 변태성욕자에게 끔찍한 성적 학대를 당하고 사슬에 목매어 죽은 채 발견된다. 그러니까 릴리는 고통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마르티넥은 헤르츠펠트에게 릴리가 자살한 사실을 숨겨달라고 부탁했지만, 규정을 어길 수 없던 헤르츠펠트는 그렇게 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마르티넥의 딸을 학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남자는 겨우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을 뿐이다. 헤르츠펠트는 마르티넥이 이 사건에 관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딸을 납치하다니! 너무 지나친 것 아닐까? 헤르츠펠트도,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나도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질문을 품고 이 소설은 달려간다.

 

평소 공포영화를 즐기지 못하는 이들도 무섭다, 무섭다, 눈을 가리면서 기어코 보게 되는 영화가 있다. [차단]은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즐기게 되는 소설이다. 린다가 해부실에 들오려 하는 침입자로부터 피해 냉장고로 들어가는 장면은 놀랍다. 침입자는 해부실에 들어와 냉장고 바로 앞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고, 린다는 그 숨소리를 들으며 뻣뻣하게 누워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침입자에게서 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침입자가 갔다고 판단한 린다는 냉장고에서 나가려 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서술자는 이런 문장을 툭 던진다. “그녀로부터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 한 남자가 암흑 속 해부실의 두 해부대를 사이에 두고 웅크리고 앉아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도 못했다.” 이런 문장을 읽으면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면서도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작가는 공포를 어떻게 활용해야 독자가 숨죽이며 읽게 되는지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추리 소설은 아이디어는 좋은데, 대사나 문장이 뻑뻑해 한 번 읽고 나선 다시 찾게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는 이 소설을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찾아 읽을 것이다. 이를 테면 이런 대목 때문이다.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제발 도와달라며 부검을 부탁하는 헤르츠펠트에게 하는 린다의 대사. “전 수년 전부터 채식주의자였어요. 마지막으로 언제 스테이크 고기를 썰어봤는지 이젠 기억조차 할 수 없어요.” 이런 대사 덕분에 이 소설은 언제 다시 읽어도 읽는 재미를 준다.

 

[차단]은 스릴러로서 제공하는 쾌감도 상당하지만, 독자에게 주는 메시지 또한 의미심장하다. 불완전한 사회 시스템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범죄자를 사회에 복귀시키는 것은 정당한가. 사람들은 자신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시스템을 의심하려 하지 않는다. 이 소설의 주인공 헤르츠펠트가 그랬듯 나 역시 내가 이런 사건의 당사자가 되리라고 상상해본 적이 없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의 법은 여전히 가해자에게 너무 관대하지는 않은가. 이 것이야 말로 독일에서 건너온 일급 스릴러 [차단]이 한국에 던지는 질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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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
정창권 지음 / 푸른역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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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한 내 통념을 뒤집어엎는 책을 좋아한다. 내가 지니고 있던 왜곡된 선비상을 교정해 준 계승범 교수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나 과거 합격자 통계 분석을 통해 신분이 낮은 이들도 상당수 관직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한영우 교수의 [과거, 출세의 사다리] 등이 내가 아끼는 책이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무언가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국문학자 정창권 교수의 [조선의 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 역시 그런 책들과 함께 책장에 꽂아두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다.

 

우리는 조선시대 부부라고 하면, 남성 위주의 권위적 풍토를 떠올릴 때가 많다. 교과서나 역사책, 역사소설, 사극에서 그린 여성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조선시대 부부들이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하며 다정다감한 부부생활을 했”다고 주장한다. 조선 중기까지는 오히려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고, 여성의 재혼이 사회적으로 문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부부들이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 머리말을 읽고 목차를 훑어보는데, 의외로 내가 알고 있는 인물들이 많아 반가웠다. 이황, 유희춘, 이광사, 박지원, 김정희. 이들은 평생 학문에 힘썼거나 문장과 글씨를 단련했다고 알고 있다. 조선의 문장가들은 부인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했을까.

 


“... 병든 나는 살고 병 없는 그대는 백년해로할 언약을 저버리고 갑자기 하루아침에 어디로 가신고? 이 말을 이르니 천지가 무궁하고 우주가 공허할 따름이네. 차라리 죽어 가서 그대와 넋이나 함께 다녀 이 언약을 이루고 싶네. 홀어머니 걱정되어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내 서러운 뜻 어찌 이를까?”

 

이 애절한 글은 아내를 죽음으로 떠나보낸 조선시대 한 남자가 쓴 것이다. 1576년 안민학이 죽은 아내 곽씨의 관에 넣어 준 편지 한 대목으로, 곽씨가 세상을 떠날 때 나이 스물 셋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남자라면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을 절제했을 거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그렇기는커녕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넘치도록 드러나 있다. 심지어 서른한 살 때 아내와 사별하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는 심노숭 같은 이도 있다.

 


“지난번 길을 가던 도중에 보낸 편지는 보셨는지요? 그 사이에 인편이 있었는데도 편지를 보내지 않으니 부끄러워 아니한 것이옵니까? 나는 마음이 심히 섭섭하옵니다. 그동안 한결같이 생각하며 냈사오니 계속 편안히 지내시고, 대체로 별일 없고 숙식과 범절을 착실히 하옵소서.”

 

추사 김정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한 대목이다. 당대의 서예가 김정희가 아내가 답장을 보내주지 않아 섭섭하다고 말하는 모습이 정겹고, “하옵니다” “하옵소서” 같은 극존칭으로 맺는 문장도 인상적이다. 오랜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던 김정희는 아내에게 한글로 편지를 40통이나 보냈다고 한다. 40통이 적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 편지가 전달되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을 떠올린다면 실로 대단한 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낭만적 사랑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건 아니다. 조선시대 부부들도 집안일이나 배우자의 외도(거의 남편 쪽에서 잘못한 것이긴 하지만) 때문에 싸우기도 했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남편을 압도한 여성들도 있었다. 기녀를 끼고 술 마시고 돌아온 남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아, 남편 목숨을 잃게 한 이형간의 아내 송씨, 남편이 여종의 손을 잡자, 그 여종의 손을 잘라 남편에게 보낸 홍언필의 아내 송씨. 본래 자매이기도 한 이 두 송씨는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남편을 하찮게 여겼다고 한다. 두 송씨의 예가 설령 예외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을 뒤집어엎는 사실임은 분명하다.

 

[조선의 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는 사랑을 시작하거나 이미 하고 있는 사랑을 더 깊게(?!) 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맞춤한 책이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조선시대 부부사랑이 충분히 품위 있고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저자는 알려 준다.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 대부분은 부부관계에서 근엄하고 체면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아내를 존중했고, 귀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사랑을 아내에게 글로 표현할 줄 알았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모름지기 배운 것은 실천하라고 했다. 나도 이 책에 나온 분들의 가르침을 잘 새겨 실천해볼 작정이다. 아내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던 추사 김정희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빼어난 시 한 편도 마음 한편에 적어 놓으면서.

 

  누가 월하노인께 호소하여
  내세에는 서로 바꿔 태어나
  천 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나의 이 서러운 마음을 그대도 알게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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