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
정창권 지음 / 푸른역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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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관한 내 통념을 뒤집어엎는 책을 좋아한다. 내가 지니고 있던 왜곡된 선비상을 교정해 준 계승범 교수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나 과거 합격자 통계 분석을 통해 신분이 낮은 이들도 상당수 관직에 진출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한영우 교수의 [과거, 출세의 사다리] 등이 내가 아끼는 책이다. 이런 책을 읽고 나면 무언가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국문학자 정창권 교수의 [조선의 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 역시 그런 책들과 함께 책장에 꽂아두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었다.

 

우리는 조선시대 부부라고 하면, 남성 위주의 권위적 풍토를 떠올릴 때가 많다. 교과서나 역사책, 역사소설, 사극에서 그린 여성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저자는 조선시대 부부들이 “자연스럽게 사랑을 표현하며 다정다감한 부부생활을 했”다고 주장한다. 조선 중기까지는 오히려 처가살이가 일반적이었고, 여성의 재혼이 사회적으로 문제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부부들이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는지를 보여주면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 머리말을 읽고 목차를 훑어보는데, 의외로 내가 알고 있는 인물들이 많아 반가웠다. 이황, 유희춘, 이광사, 박지원, 김정희. 이들은 평생 학문에 힘썼거나 문장과 글씨를 단련했다고 알고 있다. 조선의 문장가들은 부인에게 어떻게 사랑을 표현했을까.

 


“... 병든 나는 살고 병 없는 그대는 백년해로할 언약을 저버리고 갑자기 하루아침에 어디로 가신고? 이 말을 이르니 천지가 무궁하고 우주가 공허할 따름이네. 차라리 죽어 가서 그대와 넋이나 함께 다녀 이 언약을 이루고 싶네. 홀어머니 걱정되어 우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내 서러운 뜻 어찌 이를까?”

 

이 애절한 글은 아내를 죽음으로 떠나보낸 조선시대 한 남자가 쓴 것이다. 1576년 안민학이 죽은 아내 곽씨의 관에 넣어 준 편지 한 대목으로, 곽씨가 세상을 떠날 때 나이 스물 셋이었다고 한다. 조선 시대 남자라면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을 절제했을 거라는 인상이 있었는데, 그렇기는커녕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넘치도록 드러나 있다. 심지어 서른한 살 때 아내와 사별하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을 흘리곤 했다는 심노숭 같은 이도 있다.

 


“지난번 길을 가던 도중에 보낸 편지는 보셨는지요? 그 사이에 인편이 있었는데도 편지를 보내지 않으니 부끄러워 아니한 것이옵니까? 나는 마음이 심히 섭섭하옵니다. 그동안 한결같이 생각하며 냈사오니 계속 편안히 지내시고, 대체로 별일 없고 숙식과 범절을 착실히 하옵소서.”

 

추사 김정희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 한 대목이다. 당대의 서예가 김정희가 아내가 답장을 보내주지 않아 섭섭하다고 말하는 모습이 정겹고, “하옵니다” “하옵소서” 같은 극존칭으로 맺는 문장도 인상적이다. 오랜 유배생활을 겪어야 했던 김정희는 아내에게 한글로 편지를 40통이나 보냈다고 한다. 40통이 적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 편지가 전달되기까지의 지난한 여정을 떠올린다면 실로 대단한 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낭만적 사랑 이야기만을 늘어놓는 건 아니다. 조선시대 부부들도 집안일이나 배우자의 외도(거의 남편 쪽에서 잘못한 것이긴 하지만) 때문에 싸우기도 했다. 다소 극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남편을 압도한 여성들도 있었다. 기녀를 끼고 술 마시고 돌아온 남편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아, 남편 목숨을 잃게 한 이형간의 아내 송씨, 남편이 여종의 손을 잡자, 그 여종의 손을 잘라 남편에게 보낸 홍언필의 아내 송씨. 본래 자매이기도 한 이 두 송씨는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남편을 하찮게 여겼다고 한다. 두 송씨의 예가 설령 예외적이라고 하더라도, 상식을 뒤집어엎는 사실임은 분명하다.

 

[조선의 부부에게 사랑법을 묻다]는 사랑을 시작하거나 이미 하고 있는 사랑을 더 깊게(?!) 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맞춤한 책이다. 우리가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조선시대 부부사랑이 충분히 품위 있고 아름다운 것이었음을 저자는 알려 준다. 이 책에 소개된 인물들 대부분은 부부관계에서 근엄하고 체면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아내를 존중했고, 귀하게 여겼으며, 자신의 사랑을 아내에게 글로 표현할 줄 알았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울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모름지기 배운 것은 실천하라고 했다. 나도 이 책에 나온 분들의 가르침을 잘 새겨 실천해볼 작정이다. 아내에 대한 마음이 각별했던 추사 김정희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빼어난 시 한 편도 마음 한편에 적어 놓으면서.

 

  누가 월하노인께 호소하여
  내세에는 서로 바꿔 태어나
  천 리 밖에서 나는 죽고 그대는 살아서
  나의 이 서러운 마음을 그대도 알게 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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