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나익주 감수 / 와이즈베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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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무슨 이런 제목이 있나 싶었다. 머리말을 읽어 나가며 나는 그 이유를 알았다. ‘코끼리는 생각하지마’라는 말을 듣고,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이 기묘한 상황.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단 한 마디 말로 표현하는 제목이었던 것이다. 인지언어학의 대가인 저자 조지 레이코프 교수에 따르면 “뇌 안에서 프레임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활성화된 프레임이 우리 뇌 속에서 굳어지면, 우리는 그 프레임대로 사고하고 행동한다.

 

선하고 합리적인 것은 왜 항상 승리하지 못하는가? 이 역시 ‘프레임’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사람들이 프레임을 통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명확한 과학적 사실을 아무리 들이대도 보주주의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들 머릿속 프레임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을 위한 정책을 펴는 정당에 표를 던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에 따라 투표하는 게 아니라 정체성과 가치에 따라 투표한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이 점을 너무도 일찍 간파해냈다. “그들(보수주의자들)은 항상 앞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은 보수주의자들에게 공격받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당장 방어할 생각밖에 하지 못합니다.”

 

저자는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엄격한 아버지의 가정과 자상한 부모의 가정 모형’으로 설명한다. 보수주의적 가치가 권위주의적이고, 위계적이며, 이기적이고, 규율과 체벌에 근거한 가정의 가치라면, 진보주의적 가치는 권위 있고, 평등하며, 쌍방향적이고, 돌봄과 책임과 헌신에 근거한 가정의 가치다. 조지 레이코프 교수는 자신이 진보주의자임을 공공연히 드러낸다. 저자는 진보주의의 가치야 말로 이제껏 미국을 지탱해온 가치라고 말한다. 이른바 “최상의 전통적인 미국적 가치”다.

 

진보주의의 가치는 “사적인 것은 공적인 것에 의존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된다. 교육, 전력망, 과학 연구, 공중 보건, 공공 안전 등. 공적인 것은 사적인 것을 가능하게 한다. 보수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애써 외면하며, 공적 자원을 최소화하고, 심지어 제거하려든다. 그들이 중시하는 건 개인적 책임뿐이다. 이런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진보주의자들은 어떻게 맞서야 하는가? 저자는 이렇게 주장한다. “올바로 말하고 반복해서 말하자.” 간단해 보이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제안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 주장을 “진지하고 의식적인 헌신”이라고까지 표현한다. 우리 뇌는 웬만한 주장으로는 바뀌지 않는다. 진보적 주장을 몇 번 듣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이 그것에 감정이입할 수 없고, 그들의 뇌 회로가 활성화되지 않으며 시냅스가 강화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른편으로 이동하지 마십시오. 오른편으로 이동하면 두 가지 측면에서 해롭습니다. 이는 우선 진보적 지지층을 소외시키고, 이중개념을 소유한 유권자들 내부의 보수주의 모형을 활성화함으로써 도리어 보수에게 보탬이 됩니다.”는 저자의 경고는 한국의 상황에 잘 들어맞는다. 실제로 최근 몇 년 간 한국에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다. 한국의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은 프레임을 주도적으로 구성하기보다는 보수가 짜 놓은 프레임에 말려들고 말았다. 결국 한국에선 여당과 야당이 견지하는 정치적 스탠스에 무슨 큰 차이가 있는지 구별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한국 정치 지형의 이런 불균형은 우려스럽다.

 

정말이지 판을 새롭게 짤 만한 프레임이 나와야 할 때다. 자유주의자들과 진보주의자들은 그렇게 해서 구성된 프레임을 벼리고 또 벼려야 한다. 사람들의 뇌를 날카롭게 찌를 수 있을 정도로 프레임을 부릴 수 있어야 한다. 지금보다 훨씬 꾀 많고 영악해져야 한다. 요컨대 좀더 유능해져야 한다. 그 일은 이 책을 읽는 일에서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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