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해석 - 위대한 작가들이 발견한 삶의 역설과 희망 삶을 위한 노래
이창복 지음 / 김영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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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해석]에 관해 처음 알게 됐을 때 이 책이 반가웠던 건 독일 소설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독일문학을 부러 멀리한 것은 아니었는데도 내게 독일문학은 낯설다. 작품을 두 권 이상 읽어본 독일작가는 괴테, 헤세, 카프카 정도인 것 같다. 여기에 베른하르트 슐링크나 제바스티안 피체크, 파트리크 쥐스킨트 같은 작가를 보탤 수도 있을 테지만, 민망한 수준이다. [고통의 해석]에는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작가가 다섯 명이나 소개돼 있고, 여기에 평생을 독일문학에 헌신해 온 저자 이창복 교수의 해설까지 실려 있으니 내가 이 책을 반길 수밖에.

 

이 책의 형식에 관해서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단편들 가운데도 짧은 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몇몇은 손바닥 장(掌) 자를 쓰는 장편(掌篇)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데 각 단편에 딸린 해설은 그보다 몇 배쯤 길다. 자칫 독자에게 부담을 줄 수도 있는 형식이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이런 형식이 좀 부담스럽게 느꼈지만, 나중에는 긴 해설에 고마움을 느끼기까지 했다. 긴 해설 덕분에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좋은 답변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페터 헤벨의 <예기치 않은 재회>를 해설하면서 시간의 부사와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반복된 것에 주목하라거나, 보르헤르트의 <밤에는 쥐들도 잠을 잔다>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어떻게 긴장을 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저자는 작가가 사용한 지시대명사 하나의 의미까지도 놓치지 않고 설명해 준다. 하인리히 뷜이 <다리 옆에서>의 첫 문장에 ‘그들’이라는 지시대명사를 넣었던 것이 전체 소설의 주제와 어떻게 관련을 맺는지 나는 저자의 설명을 듣고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 책에는 문학 교양서 이상의 무언가가 더 있다. 이는 책 뒤표지 ‘어떻게 고통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카피 문구에서 예고된 것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치유 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구였다면, 이 책은 독일문학 교양서 이상의 감흥을 내게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삶에서 고통은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해설은 단순히 문학적 의미를 되짚어주거나 가치를 따지는 것을 넘어서 삶의 고통을 어떻게 껴안고 넘어설 것인지의 문제에까지 이른다. 이를 테면 저자는 카프카의 <법 앞에서>를 해설하며 이렇게 말한다. “망설임은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고통이기 때문에 망설일 수 없으며, 그래서 망설임은 망설일 때 죄악이며 고통이 된다. 스스로 가야 할 길은 나만이 갈 수 있다. 아무도 대신 가줄 수 없다.” 우리가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문학 자습서에 나오는 해설이 아니다. 나는 저자의 해설을 통해 내 삶을 점검하고 내 발이 진정으로 내딛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늠해 본다.

 

이 책에서 내 머리와 마음을 가장 세게 두드린 소설은 하이너 뮐러의 <철십자 훈장>이다. 어느 정도냐면, 이 단편과 그에 딸린 해설만으로도 [고통의 해석]을 읽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히틀러의 자살 소식을 듣고 그 같은 방법으로 아내와 딸을 죽인 뒤 자살하려는 한 히틀러 추종자의 이야기다. 뵐은 이 소설에서 인간이 만들어 낸 ‘나치’라는 괴물이 어떻게 인간을 잡아먹는지 장인의 솜씨로 압축해 보여준다. 그 솜씨가 너무도 정교해서 나는 쉽사리 소설 속 인물을 비난할 수 없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 활개치고 다니는 괴물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괴물을 응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랜 세월의 노예생활과 짧은 자유의 세월을 만끽했으며 인생이라는 빵을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알뜰하게 다 드셨던 것이다.” 브레히트는 <품위 없는 할머니>라는 단편을 이렇게 끝맺는다. 내가 이 책에서 만난 가장 멋진 문장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평생을 살며 자신이 다 먹을 수 없을 만큼 빵을 부풀려놓고는 한 조각은커녕 부스러기도 먹지 못한 채 죽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남이 보기에 보잘 것 없는 빵이지만 그런 빵을 맛나게 먹고 남에게 나눠주는 이도 있다. 어떻게 먹든 개인의 자유이지만, 이왕 먹는 것 맛있게 먹는 편이 좋지 않을까? [고통의 해석]은 ‘인생이라는 빵’을 어떻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 일러주는 책이다. 그리고 그 빵을 다른 이들과 함께 먹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고통의 해석]을 읽고 내가 풍족한 포만감을 느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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