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 현실을 창조하는 마음상태, 개정증보판
천시아 지음 / 젠북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생각한대로, 믿음대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책은 현실창조를 하는 여러가지 수행방법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끌어당김의 법칙, 론다 번의 시크릿, 호오포노포노 등을 아시는 분이라 이 책을 통해 더욱 더 견고하게 이론과 실천을 겸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하지 않고 동물과 대화하는 법 - 동물과 마음을 나누고 싶은 당신을 위한 실질적인 가이드
피 호슬리 지음, 정지인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동물과 대화하고 교감하는 것을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영국 최초의 애너멀 커뮤니케이터로서 이 책 <말하지 않고 동물과 대화하는 법>을 통해 진정한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설명하고, 다양하고,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 모두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 났다고 합니다. 쓰지 않으면 퇴화하는 근육처럼 단지 그 기억을 잃어버렸을 뿐이라고 합니다. 근원적으로 우리 모두는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상 만물은 뿌리가 같은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은 이 부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모두 하나이며 서로 동등하며, 존중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따라서 동물과 교감할 때 중요한 것은 우리와 동물이 서로 종속된 관계가 아닌 함께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은 우리를 더욱 잘 알아차리고, 더욱 잘 연결하고, 더욱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교만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자연의 모든 생물을 서로 연결된 생명으로 인식하게 하고, 파괴가 아닌 보호하고 존중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직관에 기반을 둔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은 우리에게 오감을 넘어 육감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주변의 미묘한 신호에도 지나치지 않는 세심함을 키우게 합니다. 배려와 존중, 경외심, 사랑을 가르쳐 줍니다.

 

내가 바뀌면 내 주변도 따라 바뀐다고 합니다.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생명 있는 모든 만물을 더욱 주의 깊게 관찰하고, 관심과 경외심과 존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서로 소통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따스하게 하는데 일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중에서,

 

- 오스트리아의 한 원주민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원주민들은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본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것이 부분적으로는 인간이라고 본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우리의 친척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털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고, 깃털이 있고, 비늘이 있고, 기어 다니는 모든 존재의 영혼에 경의를 표하지요. 어머니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으며, 생명의 순환 고리 안에서 함께 춤추는 존재들이라고 믿습니다.(p.25)

 

-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은 서로 떨어져 있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동물 사이, 또는 인간이 아닌 두 동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에너지의 교환입니다. ‘종간(種間) 커뮤니케이션또는 직관적 커뮤니케이션이라고도 부를 수 있어요. 그것은 비언어적 정보의 직관적 교환이며 모든 종 사이에 걸쳐 있는 보편적 언어입니다. 핵심은 그것이 가슴의 의식이라고도 알려져 있는 사랑의 주파수 위에서 작동한다는 겁니다.(p.31~32)

 

- 동물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우리의 선천적 능력을 되살리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 다른 동물의 진가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우리가 모든 생명과 하나일 수 있음을 더욱 깊이 인식하는데 도움이 되지요. 더 넓은 관점에서는 환경과 지속가능성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는 등 넓은 시야 또한 가지게 되고요.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을 함으로써 우리는 자연의 일부분이라는 우리 자신의 위치를 기억하게 되고,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는 자연도 더욱 존중하게 됩니다.(p.37~38)

 

- 애니멀 커뮤니케이션은 우리가 그 동물만의 고유한 주파수에 접속하는 겁니다. 그 주파수는 지문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커뮤니케이션하기 원하는 검은 고양이를 그와 비슷한 다른 검은 고양이와 구별해주는 것이죠. 무슨 신기한 기계를 가지고 그 주파수에 접속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 동물의 고유 주파수에 연결되려는 의도를 내고 서로 연결된 주파수상에서 메시지를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요.(p.122~123)

 

- 당신이 신뢰를 갖고 살아간다면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과거에 일어난 일을 후회하거나 미래에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걱정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무엇이든 지금 일어나는 일은 일어날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며,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우주적 생명 에너지와 조화를 이루게 되고, 이러한 조화의 감정을 세상을 향해 발산할 수 있게 됩니다. 조화를 이뤄 살아가다 보면 삶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노력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상태가 우리를 존재하가 하지요.(p.244)

 

- 동물에게서 배우세요. 에니멀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아름답고 보람 있는 일은 우리가 동물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것을 허용할 때 일어납니다. 동물은 우리에게 즐겁게 노는 법과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줄 수 있어요. 친절하고 용서하는 존재가 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또 조용하고 고요해지는 법도 가르쳐줄 수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완벽한 가르침이지요. 동물은 피곤하면 잠을 잡니다. 화가 났을 대는 배우려고 애를 쓰지요. 공포에 질렸을 때 그들은 명료하게 듣지 못합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는 자극에 과민하게 반응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커뮤니케이션을 가장 잘 하는 때는 마음이 열려 있고 평온할 때입니다. 이 역시 우리가 그들에게서 배울 수 있는 또 하나의 교훈이네요.(p.265~2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리즈
야마나 테츠시 지음, 최성현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불교의 사상은 매우 심오합니다. 불교의 경전은 많고, 복잡합니다. 또한 매우 어려워 일반인들이 그 사상을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교사상의 어려움만큼 시중에 나와 있는 불교서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불교의 전문용어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책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은 일단 쉽습니다.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부담없이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습니다.

 

반야심경을 불교의 정수라고 합니다. 265자의 짧은 글자 속에 불교사상의 심오한 정수를 함축한 경전이라 합니다.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면 불교의 본질을 알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줄줄 외우고 있는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반야심경을 펴내려는 의지로 이 책 반야심경 해설서를 펴냈습니다.

 

반야심경은 지혜의 완성, 그 핵심을 설한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사상의 핵심을 설한 반야심경이 전하는 내용은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것을 이루는 중요한 실천으로 알아차림과 명상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무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대응합니다. 우리의 깨어있는 의지가 아닌 외부의 것에 종속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아차리고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현재, 무엇을 느끼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자각하여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프로그램된 나의 현실을 알아차리고, 깨어나는데 필요한 것이 명상입니다.

 

저자는 매순간 살아서 하는 행동 일체를 의식해서 행하라고 합니다. 외부의 것에 휘둘리지 말고, 세상을 대하는 나의 생각을 바꿔 주체적으로 행할 때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야심경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낭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의 낭송은 우리 마음의 기계적인 회전을 멈추게 해주고, 우리의 무의식적 잠을 깨우는 주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 책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을 통해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실생활에 적응해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본문 중에서,

 

- 행복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만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달리 말하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신념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 그걸 위해 <반야심경>을 낭송하는 것입니다. 한 차례 긍정적인 신념이 뿌리를 내리면, 그 신념이 당신 안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며 당신을 변화시켜 갑니다. 그리고 당신 주변 사람과 일을 바꿔 갑니다.(p.9)

- 흔히 라고 부르며 사랑하고 있는 것이 실은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길 바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것을 알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타인이 행복해지는 것과 별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p.43)

 

- 그러나 붓다는 그것이 내 욕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바랄 수도 있지만 바라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만을 할 수 있을 때, 곧 바라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는 내가 바라고 있는것이 아닌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상태라는 겁니다. 이런 상태를 탐욕’, 곧 탐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있을 때 우리는 내가 무엇인가에 속박돼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낍니다. 내 의지로는 욕망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p.60~61)

 

-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조건 지어진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늘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힘에 늘 휘둘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불교에서는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실체가 아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체가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다른 것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독립된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p.70)

 

- ‘나무라고 할 때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어떤 한 덩어리의 물질입니다. 틀림없이 나무는 어느 정도 독립성을 띠고 거기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나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흙이 있고, 물이 있고, 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아닌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나무는 나무로서의 존재를 곧바로 멈추게 됩니다(, , 공기 또한 그 안에 흙, , 공기가 아닌 온갖 요소가 들어 있음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진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독립된 실체로 보이는 나무라는 물질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디부터가 나무고 어디부터가 나무가 아닌 것인지 경계선이 점점 더 모호해집니다. 이처럼 나무라고 이름 지어진, 독립된 실체로 보이는 나무도 실은 나무가 아닌 것에 완전히 구속되고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p.87~88)

 

- 우리는 진짜로 실재하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색깔과 모양을 비롯한 정보에 반응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조금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틀림없이 실재하고 있는 것에 반응하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실재로는 우리 신체에 나타나는 반응이 그 대상의 현실성을 만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p.99)

 

- 우리의 화나 기쁨이나 슬픔은 모두 최종적으로 로부터 나옵니다. 일어납니다. 바깥의 일들은 우리의 감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줄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가 주체입니다. ‘에 변화가 일어나면 무엇에 화를 내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을 기뻐할 것이냐 하는 바깥 세계에 대한 나의 반응이 바뀝니다. ‘바깥을 향한 나의 반응이 바뀐다는 것은, 결국 바깥 세계자체가 바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깥은 서로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p.108)

 

- 반야의 지혜란 자신이 의존돼 있는 존재이며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하다는 것, 바깥 세계의 정보에 대해 자동적으로 반응해 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채는 활동입니다. ‘알아차림’, 자각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동적인 반응을 멈출 수 있습니다. 반야의 지혜란 누구도 제 욕심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추상적인 진리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화가 나 있을 때나 욕심을 내고 있을 때처럼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그 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아채는 일입니다. 그런 능력이 곧 반야의 지혜입니다.(p.115~116)

 

- 바깥 세계의 정보에 는 어떤 감정을 체험했는지, 그 감정에 따라 어떤 반응을 취했는지 등을 알아가는 길 말고는 나는 누구인가를 알 길이 없습니다. 한편 그렇게 나를 아는 길 말고는 감정이나 욕망에 몰리고 있는 나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바깥 세계의 정보에 대한 의 반응 방식이 곧 나의 삶이기 때문에 반응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걸 할 수 있는 것은 반야의 지혜뿐입니다.(p.118)

 

- 이것은 달리 말하면 살아서 하는 행동 일체를 의식화하는 훈련을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무자각한 상태에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 우리는 우리 행동이 거의 다 바깥 세계의 정보에 대한 무의식적이자 자동적인 반응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환하게 알게 됩니다. 이 훈련은 지금, 여기에 사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는 것에까지 조건 지어져 버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로 평생 남을 원망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면서 괴로움에 빠져 삽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철저히 지금, 여기를 알아차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p.127)

 

- 명상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깥 세계에 조건 지어져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우리의 나날의 행동을 그 조건 지어짐으로부터 풀어내는 데 있습니다. 조건 지어짐이란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체하는 일은 지금, 여기’, 현재에 사는 훈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p.138)

 

- 자신을 받아들이는 (자기를 향한 요구를 버리는) 행위는 기적 같은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남을 향한 요구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요구 없이 남을 대할 수 있으면 상처를 입는 일 또한 없습니다. 집착이란 자신의 요구에 꼼짝 못 하고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요구가 채워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붙들려 있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없는 겁니다. 요구를 버리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해지는 데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갖고 싶어 하고), 그것을 얻으면 나는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살아왔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갖고 싶어 하는 행위 자체가 불행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더 있어야만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p.152~1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음의 요가 - 인도 최고의 지성과 영성, 비베카난다의 말
스와미 비베카난다 지음, 김성환 옮김 / 판미동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마음의 요가>의 저자 비베카난다는 인도 최고의 영적 지도자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인도의 위대한 영혼 라마크리슈나가 인정한 유일한 계승자이기도 한 그는 스승의 타계 후 스승의 사상을 서양에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는 모든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는 가르침을 전했습니다. 어떤 종교도 배척하지 않고, 나름의 쓸모를 인정하며 포용하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런 관점은 세상 만물에 내재되어 있는 신을 통해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으며, 분리가 아닌 통합을, 우리가 곧 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가 신이고, 만물이 하나라면 세상은 서로를 적대시할 이유가 사라질 것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도 분명 긍정적으로 바뀔 것입니다.

 

이 책 <마음의 요가>는 인도의 <우파니샤드>를 근간으로 하는 베단타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서양인들에게 많은 강연을 통해 가르침을 전했던 비베카난다의 강연 중 베단타라는 주제를 다룬 핵심적인 강연 12편을 모아 펴낸 책입니다. 이 책은 다양한 비유와 체계적인 논리, 일상적인 언어를 통해 비교적 쉽게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을 던지고, 오랜 시간 숙고하고, 평생 동안 신을 보는 것에 매진했던 위대한 사상가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본문 중에서,

 

- 인간들은(그가 아무리 위대하다 해도) 그 너머에 있는 완전한 인간의 희미한 반영체로 묘사한 신화들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정당화됩니다. 하나이자 무한한 영혼은 원인과 결과를 넘어서 있고,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인간, 곧 하나의 영혼은 자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결코 속박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속박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반영체인 현실 속 인간들은 시간과 공간, 인과관계에 의해 제한되어 있고, 속박되어 있습니다. 또는, 다른 철학자들의 말을 빌자면, 그는 속박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도 합니다. 이것이 무한하고 편재하며 영적 본성을 지닌 우리 영혼의 진실입니다. 영혼은 무한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습니다.(p.30~31)

 

- 분리된 관념을 버리고 과거나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칠 때, 한정된 체로 가고 오는 이 몸의 관념을 포기할 때, 사람들은 더 고차원적 이상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진정한 것이 아니고, 이는 마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은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반복합니다. 영원히 살 수 있는 것은 이들 배후에 존재하는 영혼뿐입니다. 몸과 마음은 끊임없는 변화를 거듭하고 있으며, 사실상 일련의 현상들에 붙여진 이름들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끊임없이 흐르면서도 같은 모습으로 비춰지는 강물과 비슷합니다.(p.32)

 

- 모든 윤리 체계의 심장부에는 공통된 중심 관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형태는 다양하지만, 결국은 타인을 향한 선행이라는 하나의 의미로 모아집니다. 인류의 핵심 동기는 다른 사람을 향한 자애, 모든 생명을 향한 자애입니다. 이때, 이런 말들은 모두 내가 곧 우주이고, 이 우주는 하나다.’라는 영원한 진리의 다양한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p.39)

 

- 가장 근본적인 무지는 무한자가 한탄하고 슬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한마디로 무한자를 유한자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무지의 기반입니다. 순수한 불멸자이자 완벽한 영혼인 우리가 자신을 작은 마음으로, 작은 몸으로 생각하는 것, 이것이 모든 무지의 뿌리이고, 모든 이기심의 어머니입니다.(p.41)

 

- 우리는 세상을 우리 식대로 바라봅니다. 탁자 위에 금이 든 가방이 놓여 있고 옆에 아기가 있다고 해 봅시다. 이때 도둑이 들어와 금을 훔쳐간다면, 아기가 과연 도둑을 볼 수 있을까요? 우리가 겉으로 볼 수 있는 건, 그것이 우리 내면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기가 도둑을 보지 못하는 건, 내면에 도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는 모든 지식에 적용됩니다. 그러니, 세상의 사악함과 죄악에 대해 말하지 마십시오. 대신 당신 눈이 여전히 사악함을 본다는 사실에 슬퍼하십시오. 당신 눈이 모든 곳에서 죄를 본다는 사실에 슬퍼하십시오.(p.47~48)

 

- 절대자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관념, 자연을 훨씬 넘어선 곳에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는 관념은 교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자라는 이상을 가까이, 더 가까이 가져와야 합니다. 그것의 가치를 떨어뜨리거나 손상시키지 않은 채로 말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있는 신은 자연에 내재된 신이 되고, 자연에 내재된 신은 자연 그 자체인 신이 되며, 자연 그 자체인 신은 인간의 몸이란 이 신전 속에 거주하는 신이 되고, 몸이란 이 신전 속에 거주하는 신은 결국 신전 그 자체가 됩니다. 마침내 영혼과 인간 전체를 포괄하게 되는 것입니다.(p.71~72)

 

- 베단타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자신이 짐작해 온 대로의 세상을 포기하라. 너의 짐작은 매우 제한된 경험에, 매우 빈약한 추론에, 너 자신의 허약함에 기반을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세상을 포기하라. 오랜 세월 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그 세상, 오랜 세월 동안 집착해 온 그 세상은 스스로 창조해 낸 거짓 세상이다. 그 세상을 포기하라. 눈을 뜨고 그런 세상이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라. 그것은 꿈, 마야다. 진정으로 존재하는 건 그 자신뿐이다. 아이의 내면에, 아내의 내면에, 남편의 내면에 존재하는 자가 바로 . 선함 속에, 악함 속에 존재하는 자가 바로 . ‘는 죄 속에도 있고, 죄인 속에도 있다. ‘는 삶 속에도 있고, 죽음 속에도 있다.”(p.83)

 

- 우리는 살면서 크게 후회할 만한 일들을 수백 가지는 저질러 왔지만, 그 실수들은 동시에 위대한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저로서는, 지금까지 살면서 좋은 일도 해 보고 실수도 많이 저질러 봤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쁩니다. 내가 올바른 일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기쁘지만, 많은 실수를 저질러 왔다는 사실 역시 기쁩니다. 그 모든 경험 하나하나가 위대한 교훈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대로의 내 모습은, 지금까지 해온 모든 생각들과 모든 행위들의 총합입니다. 각각의 생각과 행위가 나름의 영향력을 일으켰고, 그 영향력들이 장기간 축적되어 지금의 모습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p.84~85)

 

- 삶을 신성한 것으로, 신 그 자체로 받아들이면서 부단히 일하는 것이 우리가 알고 행해야 할 모든 것임을 베단타 철학은 알려 줍니다. 신은 모든 것 속에 존재합니다. 그 밖의 어느 곳에서 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미 모든 것 속에, 모든 생각 속에, 모든 느낌 속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일해야 합니다. 이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행위와 결과에 구속당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p.89~90)

 

- 생각은 우리 내면에서 추진력으로 작용하는 힘입니다. 그러니 내면을 가장 고차원적인 생각들로 채워야 합니다. 그것을 매일같이 듣고 숙고하십시오. 실패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주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실패들은 삶의 아름다움 자체입니다. 실패가 없다면 삶은 대체 뭐가 되겠습니까? 만일 삶에 투쟁이 없다면 산다는 것에는 별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시적인 측면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실수와 투쟁 같은 것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는 소가 거짓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소는 인간이 아니며, 그저 소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실수나 작은 퇴보들에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단지 이상을 위해 1,000번 시도하고, 민일 1,000번 다 실패한다 해도 한 번 더 시도하십시오. 인간의 이상은 모든 것 속에서 신을 보는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p.94)

 

- 사물들의 심장부에는 어떤 단일성이 존재합니다. 표면 아래로 파고들 수만 있다면, 당신은 인간과 인간 사이, 인종과 인종 사이, 높음과 낮음 사이, 부자와 빈자 사이, 신과 인간 사이, 인간과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된 단일성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충분히 깊이 들어갈 수만 있다면, 당신은 모든 것이 하나의 변형체에 지나지 않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p96)

 

- 모든 행복에는 불행이 그림자처럼 뒤따릅니다. 삶에 항상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우듯, 이 둘은 함께 갈 수밖에 없습니다. 동일한 실체의 두 측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실체가 삶과 죽음, 슬픔과 행복, 선과 악 등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두 개의 분리된 개체라는 관념, 이 각각의 개체가 영원히 지속된다는 이원론적 관념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하나의 동일한 실체가 한 번은 나쁘게, 다른 한 번은 좋게 구현된 것뿐입니다. 그들은 모순되는 두 개의 실체가 아니며, 그들 사이에는 종류의 차이가 아닌 정도의 차이만이 존재합니다.(p.105)

 

- ‘는 움직이는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합니다. ‘는 순수한 모든 것들 속에 존재합니다. ‘는 우주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는 집을 찾는 손님이고, 사람 속에도, 물속에도, 동물 속에도, 진실 속에도 존재합니다. ‘위대한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불이 다양한 형상들을 취하듯, 우주의 진정한 영혼인 도 그 자신을 이 모든 다양한 현상들로 현현시킵니다. 우주에 나타나는 공기가 다양한 형상들을 취하듯, 모든 영혼과 모든 존재들의 진정한 영혼인 도 그 자신을 이 모든 현상들로 현현시킵니다.(p.115)

 

- 베단타는 우리가 지녀야 할 유일한 기도가 다음과 같다고 가르칩니다. “내게는 죽음도, 두려움도 없다. 내게는 계급도, 사상도 없다. 내게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탄생도, 죽음도, 친구도, 적도 없다. 나는 존재이자 의식이자 지복인 절대 자체다. 나는 축복받은 존재이며, 내가 그 축복받은 하나. 나는 덕에도, 악덕에도, 행복에도, 불행에도 구속당하지 않는다. 순례와 책과 의례로는 결코 나를 움켜줄 수 없다. 내게는 배고픔도, 갈증도 없다. 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나는 몸이 겪는 망상과 부패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 나는 존재, 의식, 지복의 절대자다. 나는 축복받는 존재이며, 내가 그 축복받은 하나.”(p.153)

 

- 비난을 에게 돌리면서 신을 심판자나 보상자로 만드는 우리의 태도는 무지의 산물입니다. 그는 심판하지도 보상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무한한 자비는 모든 이들에게, 모든 장소에서,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모든 조건하에서 그 자비는 변함이 없고,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 자비를 어떻게 활용할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 인간을 비난하지도, 신을 비난하지도 마십시오. 고통 받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스스로에게 책임을 물은 뒤, 더 잘할 수 있도록 시도해 보십시오. 이건만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입니다.(p.201)

 

- 불이이원론 철학에 의하면, 우주는 진실된 것이 단 하나뿐입니다. 브라흐만이라 불리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마야의 힘에 의해 브라흐만으로부터 현현되어 나옵니다. 브라흐만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우리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는, 브라흐만이라는 그 실재에 마야를 더한 결과물입니다. 이러한 마야, 즉 무지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진정한 모습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p..233~234)

 

- 저는 그 어떤 종파도 반대하지 않습니다. 저는 종파들이 존재해서 기쁘고, 앞으로도 종파들이 더더욱 많이 생겨나길 바랍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당신과 나, 그리고 여기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완전히 똑같은 생각만 한다면, 우리에게는 생각할 거리가 전혀 남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양성은 생명의 징표입니다. 따라서 종파는 존재해야만 합니다. 나는 종파가 계속해서 증가하기를, 그리하여 결국, 종파의 수가 세상의 인구수만큼 많아지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종교관을 갖게 되기를 기도합니다.(p.344~345)

 

- 이 사람들은 서로를 적대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들 각각은 세상에서 나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 다양한 마음들 모두를, 이 다양한 유형들 모두를 필요로 합니다. 이상적인 종교라는 게 가능하다면, 그 종교는 이 모든 마음에게 양식을 공급할 정도로 넓고 클 것이 분명합니다. 그 종교는 철학자들에게 철학의 힘을 공급해 주고, 숭배자들에게 헌신적인 가슴을 제공해 주며, 의식을 치르는 사람들에게 온갖 종류의 놀라운 상징을 제시해 주고, 시인들에게 충분한 감흥을 불러일으켜 줄 것이 분명합니다. 그처럼 광대한 종교를 만들려면, 우리는 종교의 원천으로 되돌아가, 그들 모두를 하나로 융합해 내야 할 것입니다.(p.364~36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 두어야 할 단 하나의 진실
아디야샨티 지음, 이창엽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불교의 선()을 수행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가리키는 진리는 어떤 종교적 관점, 신앙 체계, 교리에도 한정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모든 사람 안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전통이나 이데올로기, 특정 종교에 한정하여 가르침을 펴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전체의, 통합의 관점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법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을 살아가는 동안 에고라는 관념과 감정을 라고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답을 찾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답으로 자신을 찾으라는 교육을 평생 받으며 살아갑니다. 나의 생각과 기억, 이미지, 느낌 등은 나를 대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가 아닙니다. 타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는 거짓 자기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비판없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타성에 젖어 진정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법을 영영 잃어 버렸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러한 거짓 자기를 버리고 고요한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삶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내면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알아차리라고 말합니다. 고요한 곳에 귀 기울이며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 지금 이 순간 놀라울 정도로 진실하게 자신을 경험하는 방법, 그것이 명상입니다.

 

명상은 깊이 듣는 행위입니다. 외부의 것에 현혹되지 않고, 내면으로 들어가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방법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친절하고,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질문을 던지고, 생각만 하는 것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외부의 것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일 뿐인 삶을 지금 여기에서,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면의 고요한 공간을 깊이 신뢰하고, 스스로 경험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깨어나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나는 누구인가?

 

저자의 안내를 따라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고요와 평온을 바탕으로 하는 내면으로의 여행은 진정한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하나입니다.

 

 

 

본문 중에서,

 

- 우리 내면의 삶은 어느 모로 보나 무한히 광대한 우주처럼 놀랍고 불가해하고 신비롭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식이 있는 존재의 개별적 표현이며, 우리가 우주 속에 있는 만큼 우리의 내면에 광대한 우주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너 자신을 알라.”는 매우 오래된 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가장 위대하고 낯선 모험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의 진리로 깨어나고 개인으로서, 또 인류 전체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발전된 삶을 살기 위한 열쇠이다.(p.12)

 

-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적 생활은 무엇을 위한 건가요?”라고 물어보면, 그것을 확실히 밝히기 위해 시간을 들이거나 정신 수양을 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 책을 읽고, 이 스승 저 스승에게 배우며, 몇 년씩 명상을 비롯한 다른 영적 수행을 하지만, “저게 아주 좋아 보이는 걸. 저걸 해야겠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이 규정한 것을 좇을 뿐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유일한 방향을 발견한 게 아니다. 아무도 그것을 줄 수 없다. 어떤 현명한 영적 스승도, 어떤 심오한 가르침도, 당신에게 중요한 것을 대신 발견할 수 없다.(p,19)

 

- 통찰력 있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동 조종 장치에 따라 움직이듯이 살게 되고 조건화된 대로만 살게 됩니다. 그런 식의 반응은 문화와 사회, 가족과 친구들, 우리가 받은 교육,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빠지는 합의된 현실에 의해 우리에게 각인되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뛰어나고 높은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합의된 현실에 대해 질문하는 경향이 있다. 붓다나 예수 그리고 많은 영적인 인물들이 특히 그렇다. 그들은 위안을 주는 신앙체계에 안주하지 않고, 권위자들이 세계가 그렇게 돌아간다고, 그것이 진리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대로 순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그 문제들을 탐색한다.(p.28)

 

- 봉사는 반드시 영적인 생각이나 이상적인 활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경험의 일부가 봉사하고 보답하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남을 돕고 타인의 평안을 보살피는 것이다. 봉사가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평안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봉사의 핵심이다. 전체성의 관점에서 봉사할 때, 흘러넘치는 내면의 풍요로움을 남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봉사할 때, 봉사는 우리만이 아니라 봉사에 연관된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삶을 긍정한다.(p.34)

 

- 알지 못하는 걸 기꺼이 신뢰하는 것, 그것이 은총이다. 그것은 또한 깊은 기도의 핵심이기도 하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이 말했듯이, 가장 깊은 기도는 신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반응을 기다리며 침묵 속에서 듣는 것이다. 기도와 마찬가지로, 깊은 명상은 신앙과 신뢰의 행위이고 통제하려 하지 않는 행위이다. 그것은 어떤 물음에 대한 해담을 얻거나 어려움을 해결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기꺼이 어딘가에서 해답을 받으려하는 것이다. 어딘가를 신이라고 여기든 보편적 지혜라고 여기든 어떤 미지라고 여기든, 미개발된 의식의 차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려놓음으로서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절망해야 신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른 선택이 모두 소용없어졌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가슴을 여는 것, 귀 기울이는 것, 그 상태에 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히 응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슬픔과 갈등, 그리고 괴로움을 겪어야 할 수도 있다.(p64~65)

 

- 영적 추구를 하는 것과 자기 인식, 혹은 영적 깨어남이 일어나는 것 간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간접적으로 기여한다. 모든 것은 나머지 모든 것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어느 한 순간이 전 우주에서 지금 일어나거나 과거에 일어났던 다른 모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나머지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p.75)

 

-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더 현존하려 하는 알아차림 수행을 하는 것은 좋다. 그 수행에는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내가 말하는 건 다른 것이다. 즉 주의력을 향상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 자체의 본성 안에서 편히 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것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우리가 경험을 하든 하지 않든,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우리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항상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p.79)

 

- 이는 의식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건 잘못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잘 되지 않고, 느끼지 않으려 하면 부정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가졌던 생각을 모두 버리고 다시는 아무것도 느끼지 말라고 권유하는 게 아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생각과 느낌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가 이기적인 생각과 자기 지시적인 감정을 모두 초월하는 것을 그저 알아차려라. 우리는 그것들보다 먼저 있으며 의식적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들은 사라질 수 있고 또한 사라진다. 그것을 직접 알아차리면 인식의 빛을 비추는 자리가 마련된다. 거기서 마음이 아니라 의식 자체가 자신을 인식한다. 마치 의식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 나는 생각 속에서 길을 잃었고, 감정 속에서 헤맸다. 과거 속에서 갈팡질팡했고, 미래에 대한 생각과 나라고 여긴 것 속에서 헤맸다. 그런데 그중 어느 것도 내가 누구인지 밝혀주지 못한다.” 얼마나 대단한 계시인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자유를 깨달은 것인가.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p.189~190)

 

- ...... 즉 나무는 환경에서 동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에서 단절된 나무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므로, 나무가 곧 환경이라고 결론 내려야만 한다. 이것이 일종의 통합의 경험에 (‘나무같은) 이름표를 붙이는 합리적인 길이다. 나무 한 그루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 우주가 필요하고, 우주는 한 그루 나무의 형태로 표현된다. 가장 합리적인 이해조차 넘어서는 이런 진리를 알 때, 우리는 그 다음으로 도약해서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담겨 있음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나무 한 그루가 전 우주이고, 전 우주가 나무 한 그루이다.(p.194~195)

 

- 내면을 바라보면, 우리가 무()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무가 온전하고 심오하며, 무가 곧 우리임을 깨닫게 된다. 외부를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외부를 바라보든 내면을 바라보든,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무이다. 모든 것이 무이고, 무가 모든 것이다. 추상적이 사고에 머무를 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직접적 경험에 이를 수 있을 때 그것은 절대적으로 완전히 의미가 통한다. “너 자신을 알라.” 내면을 바라보고 우리가 무임을 알고, 외부를 바라보고 우리가 모든 것임을 안다. 이것이 신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p.200)

 

-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을 지나치게 말하지 않는 것, 그 대신 강하든 약하든 말들 사이의 틈새를 연결하는 것, 그리고 있음의 가장 깊고 가장 직접적인 경험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지복, 명백함, “모든 것이 괜찮다.”는 심오한 자각이다. 그것에 연결되면, 삶을 살고 도전에 응할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p247)

 

- 깊은 영적 계시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 있는 모든 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생명 자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생명은 늘 모습을 바꾸고 있다. 물은 수증기로 변하고,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지고, 차가워지고, 얼음이 되고, 데워지고, 녹고, 기체로 변하고, 계속 그렇게 된다. 나무 한 그루가 숲에서 쓰러지고, 썩어서 땅으로 돌아가고, 양분을 내보내고, 새 나무와 새로운 요소들이 생기게 하고, 새로 자란 나무가 또 쓰러지면서 생명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에너지는 보존되고, 생명은 형태를 바꾼다. 여기에는 넘치는 것도 없고 부족함도 없다.(p.261)

 

- 생명은 태어남과 죽음의 부단한 과정이다. 태어남은 생명이 한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생명은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시작되는 게 아니고, 심장이 고통을 멈출 때 끝나는 게 아니다. 태어남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삶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죽음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깨달은 관점은 우리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형상을 취하는 생명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이는 그 특정한 형상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합일이란 독특함이나 개별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모습, 냄새, , 촉감의 차원에서 표면적으로 하나의 형상이 다른 형상과 같아 보이지 않듯이, 생명은 독특한 형상을 취한다. 하나의 형상은 다른 형상과 구별되지만 - 나무는 바위와 달라 보이고, 바위는 사람과 다르지만 - 그것들은 모두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해서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p.271~27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