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시리즈
야마나 테츠시 지음, 최성현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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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사상은 매우 심오합니다. 불교의 경전은 많고, 복잡합니다. 또한 매우 어려워 일반인들이 그 사상을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교사상의 어려움만큼 시중에 나와 있는 불교서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불교의 전문용어를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책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은 일단 쉽습니다. 불교신자가 아니라도 부담없이 읽고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습니다.

 

반야심경을 불교의 정수라고 합니다. 265자의 짧은 글자 속에 불교사상의 심오한 정수를 함축한 경전이라 합니다.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면 불교의 본질을 알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신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줄줄 외우고 있는 반야심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저자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반야심경을 펴내려는 의지로 이 책 반야심경 해설서를 펴냈습니다.

 

반야심경은 지혜의 완성, 그 핵심을 설한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사상의 핵심을 설한 반야심경이 전하는 내용은 현실의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것을 이루는 중요한 실천으로 알아차림과 명상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무의식적으로, 기계적으로, 자동적으로 대응합니다. 우리의 깨어있는 의지가 아닌 외부의 것에 종속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아차리고 자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현재, 무엇을 느끼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자각하여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프로그램된 나의 현실을 알아차리고, 깨어나는데 필요한 것이 명상입니다.

 

저자는 매순간 살아서 하는 행동 일체를 의식해서 행하라고 합니다. 외부의 것에 휘둘리지 말고, 세상을 대하는 나의 생각을 바꿔 주체적으로 행할 때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야심경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고, 낭송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의 낭송은 우리 마음의 기계적인 회전을 멈추게 해주고, 우리의 무의식적 잠을 깨우는 주문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이 책 <인문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반야심경>을 통해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실생활에 적응해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본문 중에서,

 

- 행복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얼마만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달리 말하면 자신에 대한 긍정적인 신념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 그걸 위해 <반야심경>을 낭송하는 것입니다. 한 차례 긍정적인 신념이 뿌리를 내리면, 그 신념이 당신 안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며 당신을 변화시켜 갑니다. 그리고 당신 주변 사람과 일을 바꿔 갑니다.(p.9)

- 흔히 라고 부르며 사랑하고 있는 것이 실은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길 바라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것을 알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이 타인이 행복해지는 것과 별개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p.43)

 

- 그러나 붓다는 그것이 내 욕망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내 욕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것을 바랄 수도 있지만 바라지 않을 수도 있는 경우에만 그렇게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만을 할 수 있을 때, 곧 바라는 것을 멈출 수 없을 때는 내가 바라고 있는것이 아닌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상태라는 겁니다. 이런 상태를 탐욕’, 곧 탐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바라고 있을 때 우리는 내가 무엇인가에 속박돼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느낍니다. 내 의지로는 욕망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p.60~61)

 

-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조건 지어진 존재입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이 늘 작동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힘에 늘 휘둘리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를 불교에서는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나 실체가 아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체가 아니라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다른 것의 힘에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움직이는 독립된 존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p.70)

 

- ‘나무라고 할 때 우리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어떤 한 덩어리의 물질입니다. 틀림없이 나무는 어느 정도 독립성을 띠고 거기에 서 있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나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흙이 있고, 물이 있고, 공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아닌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없으면 나무는 나무로서의 존재를 곧바로 멈추게 됩니다(, , 공기 또한 그 안에 흙, , 공기가 아닌 온갖 요소가 들어 있음으로써 비로소 이루어진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독립된 실체로 보이는 나무라는 물질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어디부터가 나무고 어디부터가 나무가 아닌 것인지 경계선이 점점 더 모호해집니다. 이처럼 나무라고 이름 지어진, 독립된 실체로 보이는 나무도 실은 나무가 아닌 것에 완전히 구속되고 조건 지어져 있습니다.(p.87~88)

 

- 우리는 진짜로 실재하는 것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색깔과 모양을 비롯한 정보에 반응하고 있을 뿐인데, 우리는 조금도 그 사실을 모릅니다. 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틀림없이 실재하고 있는 것에 반응하고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실재로는 우리 신체에 나타나는 반응이 그 대상의 현실성을 만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 말입니다.(p.99)

 

- 우리의 화나 기쁨이나 슬픔은 모두 최종적으로 로부터 나옵니다. 일어납니다. 바깥의 일들은 우리의 감정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줄 뿐입니다. 어디까지나 가 주체입니다. ‘에 변화가 일어나면 무엇에 화를 내고, 무엇에 슬퍼하고, 무엇을 기뻐할 것이냐 하는 바깥 세계에 대한 나의 반응이 바뀝니다. ‘바깥을 향한 나의 반응이 바뀐다는 것은, 결국 바깥 세계자체가 바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바깥은 서로 의존해 있기 때문입니다. 나뉘어 있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p.108)

 

- 반야의 지혜란 자신이 의존돼 있는 존재이며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하다는 것, 바깥 세계의 정보에 대해 자동적으로 반응해 버리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채는 활동입니다. ‘알아차림’, 자각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동적인 반응을 멈출 수 있습니다. 반야의 지혜란 누구도 제 욕심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추상적인 진리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화가 나 있을 때나 욕심을 내고 있을 때처럼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을 때, 그 자리에서 그 사실을 알아채는 일입니다. 그런 능력이 곧 반야의 지혜입니다.(p.115~116)

 

- 바깥 세계의 정보에 는 어떤 감정을 체험했는지, 그 감정에 따라 어떤 반응을 취했는지 등을 알아가는 길 말고는 나는 누구인가를 알 길이 없습니다. 한편 그렇게 나를 아는 길 말고는 감정이나 욕망에 몰리고 있는 나의 행동을 바꿀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바깥 세계의 정보에 대한 의 반응 방식이 곧 나의 삶이기 때문에 반응 방식을 바꾼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걸 할 수 있는 것은 반야의 지혜뿐입니다.(p.118)

 

- 이것은 달리 말하면 살아서 하는 행동 일체를 의식화하는 훈련을 말합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무자각한 상태에서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훈련을 통해 우리는 우리 행동이 거의 다 바깥 세계의 정보에 대한 무의식적이자 자동적인 반응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환하게 알게 됩니다. 이 훈련은 지금, 여기에 사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는 것에까지 조건 지어져 버리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로 평생 남을 원망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일을 걱정하면서 괴로움에 빠져 삽니다. 거기에서 벗어나려면 철저히 지금, 여기를 알아차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p.127)

 

- 명상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깥 세계에 조건 지어져서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우리의 나날의 행동을 그 조건 지어짐으로부터 풀어내는 데 있습니다. 조건 지어짐이란 과거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해체하는 일은 지금, 여기’, 현재에 사는 훈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p.138)

 

- 자신을 받아들이는 (자기를 향한 요구를 버리는) 행위는 기적 같은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람은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남을 향한 요구도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요구 없이 남을 대할 수 있으면 상처를 입는 일 또한 없습니다. 집착이란 자신의 요구에 꼼짝 못 하고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하면 요구가 채워지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붙들려 있기 때문에 행복해질 수 없는 겁니다. 요구를 버리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행복해지는 데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갖고 싶어 하고), 그것을 얻으면 나는 행복해지리라고 생각하며 우리는 살아왔습니다.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갖고 싶어 하는 행위 자체가 불행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 무엇 하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행복해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주어져 있습니다. 더 있어야만 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p.15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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