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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야샨티의 가장 중요한 것 - 삶의 가장 깊은 중심에 두어야 할 단 하나의 진실
아디야샨티 지음, 이창엽 옮김 / 불광출판사 / 2020년 1월
평점 :
저자는 불교의 선(禪)을 수행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가르침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가리키는 ‘진리’는 어떤 종교적 관점, 신앙 체계, 교리에도 한정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모든 사람 안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전통이나 이데올로기, 특정 종교에 한정하여 가르침을 펴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전체의, 통합의 관점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법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을 살아가는 동안 에고라는 관념과 감정을 ‘나’라고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답을 찾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답으로 자신을 찾으라는 교육을 평생 받으며 살아갑니다. 나의 생각과 기억, 이미지, 느낌 등은 나를 대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나’가 아닙니다. 타인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나’는 거짓 자기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비판없이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반응하는 타성에 젖어 진정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법을 영영 잃어 버렸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러한 거짓 자기를 버리고 고요한 내면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삶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내면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알아차리라고 말합니다. 고요한 곳에 귀 기울이며 자기 자신과 만나는 것, 지금 이 순간 놀라울 정도로 진실하게 자신을 경험하는 방법, 그것이 명상입니다.
명상은 깊이 듣는 행위입니다. 외부의 것에 현혹되지 않고, 내면으로 들어가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그 방법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친절하고,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질문을 던지고, 생각만 하는 것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외부의 것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일 뿐인 삶을 지금 여기에서,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면의 고요한 공간을 깊이 신뢰하고, 스스로 경험해야 합니다. 그 누구도 나를 대신하여 깨어나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지금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나는 누구인가?
저자의 안내를 따라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고요와 평온을 바탕으로 하는 내면으로의 여행은 진정한 우리 자신을 이해하고, 삶을 살아가는데 중요한 이정표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하나입니다.
본문 중에서,
- 우리 내면의 삶은 어느 모로 보나 무한히 광대한 우주처럼 놀랍고 불가해하고 신비롭다. 왜냐하면 우리는 의식이 있는 존재의 개별적 표현이며, 우리가 우주 속에 있는 만큼 우리의 내면에 광대한 우주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너 자신을 알라.”는 매우 오래된 요청에 응답하는 것은 아마도 모든 사람에게 가장 위대하고 낯선 모험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존재의 진리로 깨어나고 개인으로서, 또 인류 전체로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발전된 삶을 살기 위한 열쇠이다.(p.12)
-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적 생활은 무엇을 위한 건가요?”라고 물어보면, 그것을 확실히 밝히기 위해 시간을 들이거나 정신 수양을 한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랄 것이다. 사람들은 계속 책을 읽고, 이 스승 저 스승에게 배우며, 몇 년씩 명상을 비롯한 다른 영적 수행을 하지만, “저게 아주 좋아 보이는 걸. 저걸 해야겠어.”라고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이 규정한 것을 좇을 뿐이다. 그들은 오직 자신에게만 해당되는 유일한 방향을 발견한 게 아니다. 아무도 그것을 줄 수 없다. 어떤 현명한 영적 스승도, 어떤 심오한 가르침도, 당신에게 중요한 것을 대신 발견할 수 없다.(p,19)
- 통찰력 있는 질문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동 조종 장치에 따라 움직이듯이 살게 되고 조건화된 대로만 살게 됩니다. 그런 식의 반응은 문화와 사회, 가족과 친구들, 우리가 받은 교육,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빠지는 ‘합의된 현실’에 의해 우리에게 각인되었다. 어느 분야에서든 뛰어나고 높은 성취를 이룬 사람들은 ‘합의된 현실’에 대해 질문하는 경향이 있다. 붓다나 예수 그리고 많은 영적인 인물들이 특히 그렇다. 그들은 위안을 주는 신앙체계에 안주하지 않고, 권위자들이 세계가 그렇게 돌아간다고, 그것이 진리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대로 순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그 문제들을 탐색한다.(p.28)
- 봉사는 반드시 영적인 생각이나 이상적인 활동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경험의 일부가 봉사하고 보답하는 것이다. 인간이 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남을 돕고 타인의 평안을 보살피는 것이다. 봉사가 아름다운 이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평안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봉사의 핵심이다. 전체성의 관점에서 봉사할 때, 흘러넘치는 내면의 풍요로움을 남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봉사할 때, 봉사는 우리만이 아니라 봉사에 연관된 모든 사람을 풍요롭게 하고 삶을 긍정한다.(p.34)
- 알지 못하는 걸 기꺼이 신뢰하는 것, 그것이 은총이다. 그것은 또한 깊은 기도의 핵심이기도 하다. 많은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이 말했듯이, 가장 깊은 기도는 신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대한 반응을 기다리며 침묵 속에서 듣는 것이다. 기도와 마찬가지로, 깊은 명상은 신앙과 신뢰의 행위이고 통제하려 하지 않는 행위이다. 그것은 어떤 물음에 대한 해담을 얻거나 어려움을 해결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기꺼이 어딘가에서 해답을 ‘받으려’ 하는 것이다. 그 ‘어딘가’를 신이라고 여기든 보편적 지혜라고 여기든 어떤 미지라고 여기든, 미개발된 의식의 차원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내려놓음으로서 신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절망해야 신뢰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른 선택이 모두 소용없어졌을 때, 우리에게 남는 건 가슴을 여는 것, 귀 기울이는 것, 그 상태에 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단순히 응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기 위해서는 많은 슬픔과 갈등, 그리고 괴로움을 겪어야 할 수도 있다.(p64~65)
- 영적 추구를 하는 것과 자기 인식, 혹은 영적 깨어남이 일어나는 것 간에는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간접적으로 기여한다. 모든 것은 나머지 모든 것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어느 한 순간이 전 우주에서 지금 일어나거나 과거에 일어났던 다른 모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것이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모든 것은 나머지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것이다.(p.75)
-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에 더 현존하려 하는 알아차림 수행을 하는 것은 좋다. 그 수행에는 나름의 역할이 있지만, 내가 말하는 건 다른 것이다. 즉 주의력을 향상시키려 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 자체의 본성 안에서 편히 쉬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하는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어떤 것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우리가 경험을 하든 하지 않든, 생각하든 생각하지 않든, 우리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우리는 항상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p.79)
- 이는 의식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생각하고 느끼는 건 잘못이 아니다.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잘 되지 않고, 느끼지 않으려 하면 부정하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가졌던 생각을 모두 버리고 다시는 아무것도 느끼지 말라고 권유하는 게 아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생각과 느낌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과 ‘동일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가 이기적인 생각과 자기 지시적인 감정을 모두 초월하는 것을 그저 알아차려라. 우리는 그것들보다 먼저 있으며 의식적으로 남아 있지만, 그것들은 사라질 수 있고 또한 사라진다. 그것을 직접 알아차리면 인식의 빛을 비추는 자리가 마련된다. 거기서 마음이 아니라 의식 자체가 자신을 인식한다. 마치 의식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아! 나는 생각 속에서 길을 잃었고, 감정 속에서 헤맸다. 과거 속에서 갈팡질팡했고, 미래에 대한 생각과 나라고 여긴 것 속에서 헤맸다. 그런데 그중 어느 것도 내가 누구인지 밝혀주지 못한다.” 얼마나 대단한 계시인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자유를 깨달은 것인가. 이것이 명상의 핵심이다.(p.189~190)
- ...... 즉 나무는 환경에서 동떨어져서 존재하지 않는다. 환경에서 단절된 나무를 전혀 찾아볼 수 없으므로, 나무가 곧 환경이라고 결론 내려야만 한다. 이것이 일종의 통합의 경험에 (‘나무’ 같은) 이름표를 붙이는 합리적인 길이다. 나무 한 그루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전 우주가 필요하고, 우주는 한 그루 나무의 형태로 표현된다. 가장 합리적인 이해조차 넘어서는 이런 진리를 알 때, 우리는 그 다음으로 도약해서 모든 것에 모든 것이 담겨 있음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나무 한 그루가 전 우주이고, 전 우주가 나무 한 그루이다.(p.194~195)
- 내면을 바라보면, 우리가 무(無)임을 발견한다. 그리고 무가 온전하고 심오하며, 무가 곧 우리임을 깨닫게 된다. 외부를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외부를 바라보든 내면을 바라보든, 우리는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면서 동시에 무이다. 모든 것이 무이고, 무가 모든 것이다. 추상적이 사고에 머무를 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우리가 직접적 경험에 이를 수 있을 때 그것은 절대적으로 완전히 의미가 통한다. “너 자신을 알라.” 내면을 바라보고 우리가 무임을 알고, 외부를 바라보고 우리가 모든 것임을 안다. 이것이 신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p.200)
-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을 지나치게 말하지 않는 것, 그 대신 강하든 약하든 말들 사이의 틈새를 연결하는 것, 그리고 있음의 가장 깊고 가장 직접적인 경험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지복, 명백함, “모든 것이 괜찮다.”는 심오한 자각이다. 그것에 연결되면, 삶을 살고 도전에 응할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p247)
- 깊은 영적 계시에 의하면, 우리는 지금 있는 모든 것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생명 자체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생명은 늘 모습을 바꾸고 있다. 물은 수증기로 변하고, 비가 되어 땅에 떨어지고, 차가워지고, 얼음이 되고, 데워지고, 녹고, 기체로 변하고, 계속 그렇게 된다. 나무 한 그루가 숲에서 쓰러지고, 썩어서 땅으로 돌아가고, 양분을 내보내고, 새 나무와 새로운 요소들이 생기게 하고, 새로 자란 나무가 또 쓰러지면서 생명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에너지는 보존되고, 생명은 형태를 바꾼다. 여기에는 넘치는 것도 없고 부족함도 없다.(p.261)
- 생명은 태어남과 죽음의 부단한 과정이다. 태어남은 생명이 한 형상에서 다른 형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생명은 우리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올 때 시작되는 게 아니고, 심장이 고통을 멈출 때 끝나는 게 아니다. 태어남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삶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고, 죽음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깨달은 관점은 우리가 전체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형상을 취하는 생명이라는 걸 아는 것이다. 이는 그 특정한 형상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합일이란 독특함이나 개별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렇지 않다. 모습, 냄새, 맛, 촉감의 차원에서 표면적으로 하나의 형상이 다른 형상과 같아 보이지 않듯이, 생명은 독특한 형상을 취한다. 하나의 형상은 다른 형상과 구별되지만 - 나무는 바위와 달라 보이고, 바위는 사람과 다르지만 - 그것들은 모두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나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괄해서 ‘생명’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p.271~2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