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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박경리 님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짠했다. 사람 좋은 어떤 분이 세상을 떠나셨구나 하는 마음에 안타깝기 그지없으면서도, 우리나라 문학계에 멋진 업적을 남겨두고 가시니 이 분의 삶은 진정 살아볼 만한 가치있는 삶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누구의 삶이 소중하지 않겠냐마는 '토지'와 같은 대하소설은 결코 아무나 쓸 수 있는 작품이 아니니 말이다.
어느 날 밤 라디오를 듣는데, 마침 박경리 님을 추모하는 특집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그 프로그램에서는 박경리 님의 살아생전 육성을 방송해 주어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토지'를 집필할 당시 '토지'의 배경이 된 곳에 가본 일이 없는데도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그렇게 글이 써지더라는 얘기를 하고 계셨는데, 나와는 피 한방울 안섞인 분인데도 평소 안면 있던 분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겸손함과 수더분함이 느껴지는 말투에서는 스스로 대단한 작가라는 자아의식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어서 박경리 님이 남긴 시 두 편이 성우의 목소리로 낭독되었다. 야밤에 듣는 시의 진솔한 내용은 가슴을 울렸고, 이 분의 시에서는 미화나 꾸밈이나 운율보다는 그저 삶이 뚝뚝 흘러내리는 것처럼 삶 자체가 시였다고나 할까,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때 들었던 시가 이 책에 나와 있는 '옛날의 그 집'과 '홍합'이다. 시구 하나하나가 마음에 와닿으며 어찌나 좋던지......
주제별로 네 단원으로 나누어져 있는 책의 시들은 박경리 님의 마음을 그대로 투영해 놓은 듯이 솔직하고 담백하다. 어렵게 상징화해놓거나 돌려 말하지 않으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과 아픔, 살아온 모습과 어머니에 대해서, 그리고 고귀한 자연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읽는 그 순간 가슴에 울려 퍼지는 잔잔한 느낌은 박경리 님의 시에서 맛볼 수 있는 공통된 특징인 것 같다. 특히 '어머니의 사는 법'은 장장 14쪽에 달하는 시로서 어머니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가족사에 우리 역사를 투영하여 볼 수 있는 시이다. 4장 '까치설'에서는 사회 현상에 대한 따끔한 비판과 숨죽인 분노가 표현되어 있다. 사회의 모순에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 애정이 많아서일 것이다. 세상을 향한 사랑은 부조리에 대한 분노와 연결될 수밖에 없을 터이니.
뒷부분에는 '사진으로 보는 소설가 박경리'라는 부록이 있어, 소녀 시절의 모습부터 땀흘리며 채소를 직접 가꾸는 꾸밈없는 말년의 모습까지를 모두 볼 수 있다. 우리 문학계의 큰 별 하나가 졌지만, 이렇게 남겨진 시와 사진이 있어 덜 쓸쓸하다. 다행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