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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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덧  겨울의 한 중턱에 있는 조선. 온 마을과 고을이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소리와 그 주위를 짖어대는 개들,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떠들썩한 모습들은 추위와 배고픔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주위는 청군으로 둘러싸인 성벽에 갇혀 옴짝달싹할 곳 없다. 줄어드는 먹을 것과 뼈 속까지 미어지는 추위에 조선군은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여기는 남한산성이다. 정묘호란이후 본격적인 청의 침입을 피해 택한 곳. 지금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다.


 그러나 임금은 남한산성에 없다. 분명 수백의 신하들과 군대를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남한산성 어디에도 임금은 없다. 언제나 그렇듯 명분만을 내세우며 현실을 외면하는 자, 자신의 자리만을 내세우며 자신의 의무는 과감히 버리는 자들뿐이다.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성이 위태로우니 충절에 귀천이 있겠느냐?  - 먹고 살며 가두고 때리는 일에는 귀천이 있었소이다. -이러지 마라. 네 말을 내가 안다. 나중에 네가 사대부들의 죄를 묻더라도 지금은 내 뜻을 따라다오. p.227" 시끄러움. 잡음. 변명. 행동이 아닌 입만으로 조정을 이끌던 이들의 목소리가 왕의 심장을 관통해 서글픔을 이끈다. 

”아침에 김상헌은 서날쇠를 묘당에 천거했다. 품계없는 대장장이에게 임금의 문서를 맡길 수 없으며......문서를 맡겨 멀리 내보내려면 먼저 품계를 내려서 보내야 한다는 말과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 알 수 없으므로 돌아온 후에 품계를 내려야 한다는 말이 부딪쳤다.....p230"


 제대로 된 전투 한 번해 보지 못했다. 단지 기다림. 그 기다림 속에서 오가던 것은 성문을 열어야 된다는 최명길을 욕보이는 일. 칼이 아닌 말로 전투를 하는 그들은 단지 명에 대한 충정과 조선을 위한다는 명분만을 보이면 된다는 생각밖에 없다. 그 말 속에는 굶주림에 배를 움켜쥔 백성,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루를 이겨내는 병사들은 없다. 애초에 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마음이 아닌 그들의 명성과 목숨만을 지켜내고자 하는 마음뿐 이다. 그렇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오직 그들만이 존재한다.


 봄비가 치럭치럭 내리는 성 너머로 녹아내리는 눈과 얼었던 강이 녹아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얼은 강에 얽혀있던 시체들도 다시 흘러내리는 강과 함께 어디론가 흘러내려간다. 겨울내내 어는 손과 발을 동동구르며 지킨 성은 화이포 한 방에 날아가고 없으며 인조는 쓸쓸이 청의 칸에게로 발걸음을 옮긴다. 수척해진 얼굴과 어딘지 모르게 기죽은 모습에서는 지낸 인조반정 때의 당당함과 자신감은 찾아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모습으로 칸에게 절을 하고 주위의 왕자들은 눈물만을 흘린다.


 삼전도의 굴욕 다음 날 남한산성의 농부들은 다시 곡괭이를 집어 들고 농사를 지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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