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라는 존재는 배움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가정에서는 부모님에게,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사회에서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그런 가치를 배우게 되고 거기에 다다르지 못하는 책은 가십거리정도로 취급된다. 언제나 이성이 우선시되고, 이성에 의해 감성은 자제되도록 교육을 받는 환경에서 어쩌면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성을 담당하는 좌뇌와 감성을 담당하는 우뇌의 존재는 어느 것이 더 우월 하느냐의 문제로는 설명되는지는 않는다. 생존의 필요에 의해 그렇게 진화해 온 것이니 동등하게 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논리적인 사고와 정확한 분석을 통한 사고는 수학처럼 딱 떨어질지 모르지만 주위를 보지 못한다. 가을이면 떨어지는 낙엽을 보고 논리적으로 분석적으로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인간만이 존재하게 된다.

 

책이라는 존재는 배움만을 전제로 깔고 있지 않다. 활자로 된 세상은 우뇌를 자극해 감성이라는 안테나의 반경을 더욱 넓혀주며 더 날카롭고 예리하게 해 준다. 그냥 스쳐지나갈 작은 세상들, 너무나 평범해서 존재조차 깨닫지 못하던 것들을 느끼게 해주며, 인지하게 해주며, 공감하게 해 준다. 따라서 책이 꼭 배움을 전제로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촉각을 곤두세울 수 있는 책이라면 그 자체로 좋다.

 

하지만 =배움이라는 공식에 익숙한 나에게 마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글귀들은 풀리지 않는 난해한 수학문제처럼 이해되지 못하고 머리 속에서 맴돌기만 한다.

 

겨울 숲 속의 나무들처럼 적당한 거리에 떨어져 서서 이따금씩만 바람소리를 떠나보내고 그러고는 다시 고요해지는 단정한 문장들. 그 문장들이 끝나면 문득 어둠이나 무, 그리고 무에서 또 하나의 겨울 나무 같은 문장이 가만히 일어선다. 그런 글 속에 분명하고 단정하게 찍힌 구두점. 그 뒤에 오는 적막함, 혹은 환청, 돌연한 향기, 그리고 어둠, 혹은 무, 그 속을 천천히 거닐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p.16-17”

 

이 책을 옮긴 김화영의 말처럼 글을 만져보고 냄새맡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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