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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 - 이덕무 청언소품
정민 지음 / 열림원 / 2018년 5월
평점 :
간서치 이덕무의 청언소품과 기타 문집의 글을 분류하여 주석을 단 글모음.
애초 포기를 안고 살았을 노비들과 달리 상대적 결핍과 소외로 고통은 배가되고
그런 시대의 불운을 온몸으로 부대꼈을 서얼 출신의 양반들과 그 가족들.
서얼출신이래도 그나마 부친의 온정이 닿아 먹고 살만했으면 일신이나 편했을텐데
먹고 살길 막막했다면 갓 쓰고 도포 걸친 채 무엇을 할 수있었을지 짐작만해도 깝깝하다.
영양실조로 어머니와 여동생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봤고 굶기를 밥 먹듯 했던 이덕무.
사흘 굶주림을 못견뎌 결국 아끼는 책을 팔아 끼니를 해결했다는 책벌레 이덕무.
그가 저런 생활고와 혈육의 굶주린 죽음을 겪으면서 한서를 이불 삼고 논어로 병풍를 두른 채
골방에 박혀 쓴 글치곤 고담준론까진 아니어도 너무 여유로와 나태해보였고 실망스러웠다.
"봄비는 윤기로워 풀싹이 떨쳐 돋아나고, 가을 서리는 엄숙해서 나무 소리도 주눅이 든다."
"시문을 볼 때는 먼저 지은이의 정경을 살펴야 하고,
서화를 평할 때는 도리어 저 자신의 마음가짐과 됨됨이로 돌아가야 한다."
대개 이런 글 모음이다. 분명 선비의 좋은 글이긴 한데..
글들의 전반적 내용은 먹고 살만한 양반이 한적하게 끄적거릴 내용이지
굶주린 배를 끌어안고 쓴 걸로 감안하고 보기엔 웬지 이해가 부족하고 공감이 떨어진다.
아마 후대의 누군가 나와 같은 평과 의문이 있을까 짐작해서
마치 절묘하게 나를 겨냥한 듯 .. 쓴 웃음 짓게하는 이런 글도 써놓긴 했다.
"글을 읽으면서 단지 공명에만 정신을 쏟고, 마음으로 환하게 비추어보지도 않으면서,
장차 소요하여 노닐지도 않는다면, 어찌하여 저잣거리 가운데로 가서 거간꾼이 되지 않는가?"
"어찌 사슴이나 돼지와 더불어 무리가 될 수 있겠는가?
목석과 더불어 살 수 있겠는가? 저잣거리의 장사치들과 함께 노닐 수 있겠는가?"
웃기지 않은가. 사흘이 아니라 일주일을 굶었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이런 글도 있었다.
"아내가 약해도 길쌈을 잘하고, 아들이 어려도 글을 잘 읽으며, 누렁 송아지가 비쩍 말랐어도
묵정밭을 잘 갈아 집안 살림이 비로소 살 만해지면 한적한 물가에서 책을 저술하여 명산에
굴을 파서 감춰두리라." 쓴웃음을 지었다가 이 글을 다시보며 미친넘마냥 실실 웃기도 했다.
간서치. 책벌레 이덕무는 박제가, 유득공과 교류하며 실학파로 분류되는 사람이나
정조에게 발탁되었어도 주로 책을 짓고 번역하다 평온한 죽음을 맞은 모양이다.
박제가는 개혁을 주장하다 노론의 미움을 사 유배당해 비참한 말년을 보낸 것과 대조된다.
같은 생각을 공유하고 교감을 했어도 박제가는 정치가로 이덕무는 문인의 길을 걸은 모양이다.
손발이 묶인 서얼출신 반반이의 오롯한 문인의 글로만 보면
이 책에 담긴 글들이 새롭게 보이고 의미가 살아나기도 한다.
같은 글을 봄에 있어서 조차도 이래서 다르고 저래서 다르니 사람은 오죽하랴.
"좋은 벗이 마음에 있어도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은 마치 꽃가루를 묻힌 나비가 올 제는
즐겁고 잠깐 머물면 마음이 바쁘다가 가버리고 나면 애틋해지는 것과 같다."
절로 웃음나오게 하는 소심하고 섬세한 문인의 짧은 글이다. 여성성마저 보이는..
"졸렬한 사람은 외람되지가 않다." 이해가 안되는 문장도 있었고 주석조차도 헷갈렸다.
그가 말한 책 읽는 이유. 간결하나 토달 수 없을 만큼 정수만 압축했다.
"독서는 정신을 기쁘게 함이 으뜸이 되고, 그 다음은 받아들여 활용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식견을 넓히는 것이다."
"일을 처리함은 통하게 함을 귀히 여기고, 책을 읽는 것은 살아있음을 중히 여긴다."
나는 이 책을 혼자 실실 웃으며 재미나게 보았는데
누군가 나처럼 재미나게 볼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궁금하다.
요즘 시대에 이런 책이 흥행을 떠나 손익분기점이라도 넘을 수 있을까..의문이 들었다.
청언소품(淸言小品)이란 글 모음의 제목이 참 잘어울리는 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