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소설 읽는 노인 Mr. Know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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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몇년 전 세계 환경기구에서 "아마존"의 밀림이 훼손되고 있으니, 제발 나무를 베지말라고 라틴 아메리카의 어느 나라에게 경고 내지는 권고를 한 적이 있다. 오존층이 뚫린다는 점을 들어 국제환경기구가 권고한 것이다.
 여태껏 나무를 베고, 금과 지하자원들을 캐고 동식물을 황폐하게 만들고, 전국토를 황폐하게 만든 바로 당사자들이 이제 자신이 저지른 짓을 주인에게 금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어떻게든 생활의 방편이 되어야 하는 그 나라는 말을 듣지 않았고,  결국 전 세계의 기운센 나라들은 돈을 걷어 달래 주는 걸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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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의 이름은 중남미 대륙 최고의 영웅 시묜 볼리바르 장군을 연상시키는,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이다.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런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닫을 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가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45-46)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를 연구하는 사람처럼 진지한 자세로 그는 독서에 암한다. 노인은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라고 감탄한다. 마치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름답다는 것에 대한 놀라움 같다. 현실 속에서는 결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는 말과도 같다.

그는 자연에 대한 존중심을 가지고, 고립된 젊은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변덕스럽고 광포한 기후에 대해 처절하게 패배당한다. 

  우기가 지나가자 두 사람은 쓸데없는 짓이라고 경고하는 인디오들의 도움을 받아 밀림을 개간하고 첫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었다. 땅이 끊임없는 비에 씻겨 내린 바람에 씨앗은 필요한 자양분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꽃도 피우기 전에 시들거나 해충에 갉아먹혔고, 그나마 살아남은 작물도 다음 우기에 접어들면서 첫 폭우와 함께 죄다 떠내려갔던 것이다.(53P)

 
  그는 수아르족 원주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전사로 만들어진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대자연의 법칙을 "존중"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과 자신의 문화를 수호하는 "수아르 족"과 치과의사 그리고 볼리바르는 선(존중)의 상징이다.
 그리고 읍장(마르케스의 "어떤 날"에도 읍장은 악당으로 등장한다), 양키 들은 그들의 삶을 파먹는 개미 같은 존재다. 그들의 영역을 침범해서 동물들을 놀래키고 이유없이 총을 쏴대고, 금을 캐고, 나무를 베어서 동물들과 원주민의 삶을 위협한다. 그들은 결코 자연을 이해하려 들지도 않으며, 동물의 본능조차 깨닫지 못한다. 다만 개척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표피를 걷어내면 탐욕과 위선만이 자리하고 있다. 신임 읍장처럼 과도한 세금을 걷어 거머리처럼 피를 빠는 존재이다. 
 
대자연과 친화적인 라틴아메리카인들의 모습은 우리 선조의 모습들과 유사해 보인다. 풍장을 하는 그들의 풍습도 닮아 있다.


끝으로, 인물의 순수함을 희화적으로 그린 삽화를 하나 소개한다.

 

 치과의사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났다는 듯 노인의 말을 막았다.

 "그 양키놈 때문에 깜박 잊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소설책으로 두 권 가져왔소."

 그 순간 노인의 눈이 빛났다.

 "연애 소설인가요?"

 치과 의사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아픈 얘긴가요?"

 노인이 다시 물었다.

 "영감은 목 놓아 울고 말걸."

 치과 의사가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오나요?"

 "이 세상에서 어떤 연인들도 그들만큼은 사랑하지 못했을 거요."

 "서로가 슬픈 일을 겪는가 보군요."

 "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서 차마 견딜 수 없었소."

 치과 의사는 노인의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책장조차 넘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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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동아일보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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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동안의 일>

남자와 여자의 관계의 어그러짐은 아이의 유산으로 발생되었다. 이야기의 순서는 역전되어 있으며, '정전'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두 사람의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리고 남자는 교수임용을 앞둔 사내라고 (암시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남자는 경제적으로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은근하게 드러나 있다. 몇 가지 여성의 보편적인 감정에 독자들은 서서히 가랑비에 젖듯이 젖어가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는 유산이 된 후 한동안 소원한 관계에 있다가 정전 때문에 둘 사이는 다시 옛 감정이 서서히 되살아난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은 이제 둘 사이는 화해의 국면으로 다가선다고 암시를 한 후에, 결말 부분에 여자는 남자와의 별거를 제안한다.
그녀의 소설은 계획된 수학공식처럼 소설이 짜여 있다. 

이 소설의 전반부는 단절의 이미지가, 후반부는 화합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있다. 상반되는 이미지, 상반되는 상황이 역동적인 플롯을 구축한다. 그녀(줌파)가 만든 상황은 단절감을 '메마른 흙' '정전' '떨어진 단추' '떨어진 음식' '닳아 없어진 치솔'로 암시했다. 어떤가 멋지지 않은가 라고 그녀는 내게 속삭인다.
그러면서 메마른 흙' '정전' '떨어진 단추' '떨어진 음식' '닳아 없어진 치솔'등 이런 감각적 이미지들은 명사지만 사건과 결합시켜 동적 이미지를 생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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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거꾸로 쏜 사자 라프카디오 생각하는 숲 4
셸 실버스타인 지음, 지혜연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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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소리를 듣고 도망하는 사자들을 보고 아기 사자인 주인공이 왜 도망가느냐고 물어본다. 묻지 말고 도망가기나 해, 라는 말을 듣고 같이 달리다가 그는 궁금해서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사냥꾼을 만나는데, 죽이지 말라고 애원한다. 사냥꾼은 널 죽여 껍질을 벗겨, 그 위에 앉아서 마시멜론(?)이나 먹어야 겠다.라고 말하며 총을 쏘는데 장전이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사자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총알을 집어넣는 순간 아기 사자가 그를 잡아먹고 총을 가지고 온다. 그리고 그는 여러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총을 쏘는 법을 익힌다. 그러던 어느 날 총소리를 듣고 사자들이 다시 도망을 가는데, 아기 사자역시 도망가다가 순간 머릿 속에 상념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그대로 고개를 돌리고 맞서서 총을 쏘기 시작했다. 명사수인 사자가 사냥꾼들을 모두 죽이자 사자들은 사냥꾼들을 모조리 먹고 곧 사자는 영웅이 된다. 오는 족족 그런 식의 사냥을 하던 어느 날 누군가가 찾아 온다.(이 부분의 서술이 압권이다.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사자는 귀가 밝았지만 사자는 귀를 씻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걸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지만 시야는 밝아서 고개를 돌리자마자 사람이 다가온 것을 알아챘다. 사자가 안경 낀 것을 본 적 없지? 실버스타인이 이 남자를 잡아먹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리얼리티를 추구한 부분인데...설명하기 힘듬)
이 남자는 서커스단의 단장이었다. 그래서 사자를 꼬시는 데 처음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다가, 혹시 거기 가면 마시멜론(드디어 등장)은 먹을 수 있나요? 라고 말하며 그를 따라 나선다. 뛰어난 사냥술로 곧 유명인사가 된 그는 좋은 옷과 화려한 자동차, 시거를 피고, 그림도 배우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삶에 의미를 잃고 눈물을 흘리며 작가인 실버를 만나 하소연한다. 그래서 달래고 있는데, 서커스 단장이 사냥이나 떠나자고 사자에게 말하자, 갑자기 신이 나서 다시 정글로 떠난다.
거기서 사자는 사자들에게 총을 쏘며 신이 나서 떠들던 중 한 사자나 나타나서 같이 도와서 사람들을 잡아 먹자고 설득하고, 사람들은 어서 사자에게 총을 쏘라고 채근한다. 사자는 자기가 사람인지, 사자인지 헷갈려 하다가 무리에서 떠난다.

실버스타인의 특징은 마치 곁에 있는 사람에게 들려주듯이, 정감 있는 어조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것이다.
이를 테면,
100발의 총을 쐈다. 빵 빵 빵 빵(아흔 여섯번은 직접 소리내 보렴) 그리고 사자는 사람들에게 카드를 들어보라고 해서 32,342발의 카드를 정중앙에 맞췄다.(실제 쏜 것은 32,343발이었다. 한 발은 빗나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의 머리에 마시멜론을 올려서 도합 2331개의 마시멜론을 떨어뜨렸다. 이번에는 한 발도 실수하지 않았다.

정말 재미있는 대목이라서 잠시 요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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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마르셀 에메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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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시트가 낡아 뭉개진 소파에 앉아 읽던 만화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다. 프랑스의 만화를 번역한 것인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예사롭지 않아 원작자가 따로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하면서 만화를 읽어 나갔다. 마지막 장에 아마 원작자의 이름을 밝혀 놓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그 후 한참의 시간이 지나 <벽을 통과하는 사나이>를 읽었는데, 나는 이 소설을 읽자마자 그 만화의 원작자를 드디어 접하게 된 것을 직감했다. 내용(특히 본질적인 부분들이)은 많이 변형되어 있었다.  만화가는 대중의 코드에 맞게 성적인 부분만을 지나치게 강조해 놓았던 것이다. 

 마르셀 에메는 <동화적 상상력>을 구가하는 소설가다. 느낌은 조금 다르지만 귄터 그라스 역시 동화에서 모티브를 찾아내는 작가다. 그리고 마르셀 에메의 동화적 상상력은 바다를 건너 잠시 우회했다가 중남미까지 영향을 미친 작가다.  마르케스는 마르셀 에메의 동화적 상상력을 신화와 성서 쪽으로 변형해서 수용한 작가다. 뒤늦게 평론가들이 그를 2류에서 1류 작가로 평가를 조정하는 작업을 진행한 이유는 아마도 프랑스 전통의 계보를 잇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벽을 통과하는 사나이>는 또 한 사람의 아까끼이다. 그도 정서하는 사람이다. 이 소설은 마술적 리얼리즘의 원조격이라고도 할 수도 있다. 그는 상사에게 정서하나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야단을 맞는다. 그는 그 순간부터 상사에 대한 정면도전을 작정한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욕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상사곯리기는 욕망이라기보다는 복수에 가까운 행위 같다. 상사가 사라지고 나자 그에게는 "대도"가 되고 싶다는 진정한 욕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니까 직장에서 상사는 욕망 자체를 거세시키는 인물과 다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욕망은 또다른 욕망 새로운 욕망으로 계속해서 확장되고 변형되고 왜곡되기 시작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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콧수염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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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과 비교가 되는 작품이 있다. 쥐스킨트의 비둘기와 마이클 더글라스 주연의 '더 게임'이란 영화다.
더 게임에서 나를 파멸하기 위해 주변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알고보면 그건 자신을 놀려주기 위한 그야말로 게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비둘기의 주인공은 한번도 행복해 보지 못했던 노인이 자신의 공간을 침입한 비둘기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는다. 비둘기이기 때문에 무섭고, 비둘기여서 누군가에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다. 간혹 유머스런 삽화들이 등장하지만 음률은 처음부터 침침하게 무거운 일관성을 띤다. 다소 과장스런 행동은 보이지만 인물의 성격과 행위는 거의 일치된다.
반면 '콧수염'은 모짤트의 경쾌한 소나타처럼 발랄하게 시작된다. 5년 동안 같이 살고 있는 '나'와 '아네스'는 그야말로 달콤한 인생을 살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도 없고, 불임의 고통을 겪고 있지도 않고, 여전히 뜨거운 사이이다.--게다가 그의 직업은 거의 자유스럽기까지 하다. 아내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도 그저 귀엽게 보일 뿐이다. 주말에는 부모님을 만나 식사를 하고,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서 보내기도 한다.
유토피아 소설인가? 그럼 이 이야기를 작가는 어떻게 빈 곳을 만들고, 채워나갈 것인가?
초반부에 등장하는 발랄한 음률은 태풍의 눈이었다.
현대인은 과거를 결코 중요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역설하듯이 '나'는 과거를 잃어버린다. 아니, 내가 알고 있는 과거와 사람들이 기억하는 과거가 일치하지 않는다.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던 과거 때문에 현재가 침탈 당한다. 누구의 과거(역사)가 원형인가? 무엇이 진실인가? 작가는 모든 질문을 독자에게 유보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도 이들의 진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인물은 안정된 현재를 위해 미래를 꿈꾼다. 그가 그리는 미래는 어떤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카레르가 보는 현대인의 모습은 어느정도 정확해 보인다. 주인공이 현실로의 도피처로 택한 것은 '홍콩'이었다. (그는 홍콩갔다^^;)거기서 그는 페리 선을 타게 되면서 혼자서 모두를 상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페리 선에서의 무한한 반복을 꿈꾼다. 반복이란 일상을 말하며, 그는 일상을 지겨워하는 게 아니라 일상을 그리고 하고 있다. 쿤데라는 행복은 무한한 반복이라고 다소 역설적으로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 일상은 결코 돌아오지 못할 어떤 꿈과도 같은 것이다.
쥐스킨트의 '비둘기'의 인물은 어딘가 보이지 않는 실로 작가가 인물을 조정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콧수염의 '나'는 인물 스스로가 텍스트 속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로 이것은 대단한 경지라고 할 만한데, 나는 텍스트가 거의 끝날 때까지도 이 작가가 어떤 결말을 낼지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작품의 결말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었는데, 실로 교묘한 재주로 날 감탄시킬 수 있으리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믿음은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다시 쥐스킨트의 비둘기가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콧수염'의 결말은 한마디로 말하면 잔혹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주는 효과는 그리스 문학의 잔혹과는 또 다른데, 작가가 의도한 것은 오랫 동안 독자의 기억에 남기기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되지만, 어쨌거나 내게는 그 결말이 아쉬울 뿐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주관(독단)적인 견해일 뿐이지만, 소설의 세계에선 하나의 사념이나 사건을 끝까지 지탱하는 게 최고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그 미덕에는 정말 충실했다.
그리고
1985.4.22-5.27이라고 마침표를 찍은 것을 보니 재주는 대단하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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